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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위로를 기다리는 자/누가복음 2:22-35
D.L.카네기 사무실 한쪽 벽에 낡은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은 바닷가 뭍에 걸려 있는 낡은 나룻배 한척이 있고 그림 아래 ‘반드시 밀물이 온다’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뭍에 걸려있지만 반드시 밀물이 오면 바다 위를 둥실 둥실 떠다니며 항해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주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조사를 했는데 사람들은 94%가 기다림으로 산다고 합니다. 한평생을 기다리면서 세월을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기다리고, 기회가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막연하지만 기다림으로 한평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무엇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소망’과 ‘희망’은 뭔가를 기다리는 같은 말이지만 그 의미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망’은 확실한 기대하는 바가 있고 결정적 대상이 있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소망의 대상이 나에게 주는 약속이 있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소망이라고 합니다. 기다림의 내용이 있고 내게 힘을 주고 교화시키고 지혜도 주고 용기도 주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치 떠 있는 구름처럼 단순히 희망사항일 뿐인 것을 바라는 것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먼 훗날에 어떠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꿈꾸며 그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노력합니다. 좋은 배후자를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고 살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를 보고 장래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부터, 남들에게 뒤지지 않고 앞서기를 바라고 나아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바라던 대로 되었을 때 행복함을 느낍니다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못하므로 실망합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방송에서 잃었던 가족을 극적으로 찾았을 때 좋아하는 것을 봅니다. 하물며 50년 60년 전에 잃었던 가족을 찾았을 때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봅니다. 잃었다는 한 맺힌 사연으로 살아왔던 그 한을 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25).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 오심으로 기대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당시 시대적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였습니다. 유대 왕은 있었지만 로마의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 왕이였지요, 종교적으로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행사는 있었지만 형식적일 뿐 이였습니다. 이미 말라기 이후 하나님의 침묵으로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의 목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보면 메시야가 오심으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민족적 해방을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정치적인 왕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야고보 요한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35-37)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따르고 배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유대인의 왕이 될 것으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이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은 야고보나 요한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위로’란 ‘어루만져 괴로움을 잊게 하는 것’, ‘마음을 즐겁게 하고 수고를 치사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생하는 사람에게 고생을 알아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가끔 대통령이 어렵게 고생하며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도 어렸을 때 모친과 함께 어렵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물건도 사고 고생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허름한 돼지 국밥집에 들어가 돼지 국밥 한 그릇 사 먹었을 때 그 주인은 크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 주인은 앞치마를 입고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장사를 할 때 피곤을 느끼지 않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서러웠던 지난날의 괴로움이 대통령의 위로로 다 날아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은 믿음으로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해 줄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는 어려움을 위로해 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정치적 이스라엘 나라 회복을 위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당시 사람들과 다른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다림의 목적에 따라 신앙관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병고침, 사업이 잘되는 것, 자녀들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바라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처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중에 버려진 자의 구원과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시므온이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같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제사를 지냈지만 시므온과 같은 위로를 기다리지를 않았습니다. 하물며 제사장들도, 장로들도, 율법사들까지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음에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 였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성도들이 물밀듯 밀려들어 예배를 드려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신앙의 초점이 어디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을 바라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니까 나도 그렇게 믿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바른 신앙관으로 오직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피곤하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마치 신부가 먼 외국에 간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행복한 것입니다. 신랑이 돌아왔을 때 어루만져 주면서 그동안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을 듣기를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시므온은 바로 메시야가 오셔서 위로해 주는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지도 못하는 복을 기다립니다. 오시는 것도 없는 것을 기다립니다. 우상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뿐 아무것도 주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위로를 기다립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였습니다. ‘의롭고 경건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의롭지 않고 경건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란 악하다는 반대말로 선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의미로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건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다고 한 것은 내적인 성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셔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탄생하신 지 팔일이 되어 할례를 행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셨습니다. 이때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에게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그동안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알 수 있었던 것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 올 뿐 아니라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난지 팔일 된 아이를 부모들이 데리고 올라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안고 올라온 아기 예수 역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함께 올라온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아무도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유대인들 중의 한 아기로 아무 생각없이 보았지만 시므온은 성전에 안고 들어오는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잃었던 딸을 50년이 지나서 만나는 것을 보면 환희의 기쁨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모하고 기다렸던 사람을 만났을 때 그동안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순간적으로 다 날아가버리고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기다리고 소망했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났습니다. 기다렸던 것을 만났을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도 기다렸던 위로가 난지 팔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기라는 것입니다. 이때 시므온은 정확하게는 몰라도 나이 많은 사람이였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아기를 안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한평생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났을 때의 시므온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이제는 ...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해줍니다. 평안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평안이 놓아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것은 아직 아기 예수가 시므온에게 무엇이라고 말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펴서 시므온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위로를 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아기 예수를 만남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30)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어린 아기를 본 것만으로 구원을 보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므온의 믿음이였습니다. 시므온은 더 이상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난 것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기다림으로 일생을 보내는 우리의 삶에 기다림이 성취 될 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이 성취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기다림이 성취되지 않고 죽었을 때 ‘눈을 감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기다렸던 위로를 만남으로 해피 앤드가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림 이야기에 ‘반드시 밀물이 올 것이다’는 말처럼 반드시 올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지 못할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아침에 웃으며 학교를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해가 질 때 그 아이가 웃으며 집으로 돌아올 것처럼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아이는 오지를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올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반드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언제가 기다리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며 고난당한 그 모든 것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해피 앤드가 되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가 될 때 그 주님은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핍박을 받으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믿음과 경건으로 기다렸던 위로를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히 놓아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처럼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시는 날에 위로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허창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