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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 곳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다음해(1920년) 9월 2일 한낮, 용두산 남쪽 기슭의 부산부청 곁에 자리한 부산경찰서에 느닷없이 폭탄이 터지면서 경찰서장이 피투성이가 되고 아래 위층에 있던 경찰관들이 혼비백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터트린 사람은 27세 젊은피가 끓는 부산청년 박재혁이었다. 박재혁(朴載赫, 1894∼1921)은 범일동에서 가난한 선비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지금의 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제4회)를 졸업한다. 15세 때 부친을 여읜 박재혁에게는 처지가 비슷한 세 친구가 있었다.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이었다. 셋은 결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할 때는 상주노릇을 하는 등 모든 일에 뜻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박재혁은 부산에 본사를 둔 조선와사전기(주)에 취직하는 등 직업전선에 뛰어드나, 1918년 최천택이 조직한 구국단(救國團)에 가입하고 1920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몸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해 7월 상해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므로 일본요인의 암살지령을 받고, 중국 서적상으로 변신하여 책보따리 깊숙히 폭탄을 감추고 일본을 거쳐 귀국한다. 서울로의 상경은 실패하지만 부산경찰서가 애국지사를 많이 체포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서를 폭파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결심한다.
거사 당일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한 박재혁이 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면담한다. 하시모토가 고서적을 구경하는 틈을 타서 폭탄을 꺼내 마룻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말로 우리나라 독립투사를 붙잡아 괴롭힌 죄상을 추상같이 꾸짖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박재혁도 무릎 부상으로 현장에서 잡히고 만다. 박재혁과 가까운 최천택을 비롯한 요시찰 인물들이 잡혀 들어왔으나 끝내 단독범행임을 주장하였다.
부산지방법원에서는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으나 대구복심원(지금의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 의사는 일본인 손에 교수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단식으로 절명한다. 사형집행 예정일을 사흘 앞둔 1921년 5월이었다. 옥사한 박 의사의 유해가 부산진역에 닿자 박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여 모인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일본경찰은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장례에는 유족으로 남자 2명, 여자 3명만 입회시켰으며, 입관 때는 인부 2명을 제외하고 삼엄한 경계를 폈다. 박 의사 유해는 좌천동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9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산의 일본경찰서는 개항 후 1880년 4월 `영사관경찰서'로 창설되어 1890년 이사청(지금의 동광동 2가, 일제가 부산에 설치한 통감부의 지방자치 기관) 입구 계단 동쪽에 청사를 지어 사무를 보았다. 후에 불타고 다시 지은 2층 목조에 기와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일본관공서 건물이었다. 1910년 이사청이 폐지되자 경찰권은 완전히 독립되었고, 1928년대 후반 지금의 대창동 1가의 중부경찰서 자리로 옮겨간다. 동광동의 건물은 부산부의 내무과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 건물에 남궁산부인과가 자리한다.
문의:010-8224-5424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