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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억의 올드팝스 원문보기 글쓴이: soul
제프 백은 클랩튼과 전혀 달랐다. 클랩튼이 블루스 적이었던데 반해 그는 훨씬 록에 가까왔고 클랩튼이 내면의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던 반면 그는 여러가지 기술적 장치를 사용한 사운드의 실험에 치중했다. 클랩튼이 정적이고 감성적이라면 백은 동적이고 이성적이었다. 클랩튼의 뒤를 이어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가 된 백은 소리의 합성에 의한 도전적이고 파괴력 넘치는 연주로 이내 클랩튼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타리스트로는 처음으로 퍼즈톤을 사용했고 인도 음악의 요소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악기 파괴로 유명했던 The Who에 앞서 기타를 부수는 파격을 연출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야드버즈는 백의 공격적인 기타를 앞세워 그룹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66년말 야드버즈를 떠난 백은 이듬해 백 밴드 성격의 제프 백 그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솔로 활동에 나서 [Hi-Ho Silver Lining]('68) 등 두어곡의 히트 싱글을 냈다. 그러나 그는 얼마지 않아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다. 그는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긴 했지만 팝 스타가 될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노래와 반주 등 여느 밴드의 기타리스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이제까지의 활동 방식에서 벗어나 오직 기타 하나에만 매달렸다. 제프 백 그룹의 다른 멤버들에게 보다 많은 재량권을 주고 자신의 역할은 기타로 한정시켰다. 그가 3대 기타리스트 중 가장 혁신적이었으면서도 대중적인 지명도에서는 가장 처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백은 68년 후일 자신을 능가할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되는 로드 스튜어트(보컬)와 론 우드(베이스), 드러머인 미키 윌러, 건반주자 닉 홉킨스와 함께 미국 투어에 나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첫 앨범 [Truth]를 발매했다. 그의 음악은 야드버즈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실험적이었지만 그 사운드는 한층 세련되었고 특유의 파격적인 기타 연주 또한 완숙미를 물씬 풍겼다. 그는 오직 연주 실력 하나만으로 대중을 사로 잡았던 거의 유일한 기타리스트였다. 백은 69년 스튜어트와 윈우드가 페이시스로 떠난 뒤에도 멤버를 교체해 제프 백 그룹을 이끌었으며 73년 이후로는 비록 드문드문이긴 해도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들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지미 페이지는 이들과 또 달랐다. 클랩튼 보다는 록의 느낌이 강했지만 백 보다는 블루스적이었다. 그렇다고 둘 사이의 절충도 아니었다. 페이지에게는 클랩튼이나 백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정열과 균형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 잦아드는 클랩튼이나 공격적인 실험주의자 백과는 다른 뜨거운 감정으로 스테이지를 달구었으며 절제 속에서도 현란함을 잃지 않았다. 세 사람 중 가장 뒤늦게 출발한 그가 일렉트릭 기타의 황금기인 70년대에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접받게 된 데에는 이러한 그의 특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찌감치 세션 기타리스트가 된 그는 야드버즈 가입 이전부터 영국내에서는 실력파로 이름이 높았다. 일설에 의하면 63년부터 65년 사이에 영국에서 발매된 음반의 절반 이상이 그의 연주였다고도 하는데 알려진 것만도 The Who의 [I Can't Explain]('65), Them의 [Gloria]('65) 등이 있고 이밖에 킹크스, 롤링 스톤즈, 허먼스 허미츠 등의 음반에도 참여했다.
페이지는 66년 야드버즈에 베이스 주자로 가입했고 얼마뒤 백과 함께 록 그룹 사상 최초의 더블 리드기타를 맡게 되었다. 백과 페이지 두사람의 연주는 물과 불 같았다. 양쪽 다 파괴적이고 힘이 넘쳤으나 백의 연주가 차갑고 이지적이었던 반면 페이지의 연주는 타는 듯이 뜨겁고 감정적이었다. 두 사람의 묘한 대조와 배가된 힘은 이후 모든 록 그룹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스타일이 달랐던 두 사람은 자주 부딪쳤고 6개월 뒤 미국 투어중 백이 그룹을 탈퇴하면서 짧았던 관계도 끝나 버렸다.(페이지는 후일 제프 백 그룹의 곡 <Beck's Bolero>에 세션맨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페이지는 이후 야드버즈의 리드 기타로 68년 7월 밴드가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석 달 뒤 그는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 존 본헴과 함께 70년대 최고의 록 그룹 Led Zeppelin을 결성했다. 페이지의 신들린듯한 현란함은 [Whole Lotta Love]('69)에서 처럼 보다 강하고 고도로 증폭된 사운드를 지향했던 레드 제플린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이후 헤비메탈이라는 용어가 생겨나면서 그의 연주는 헤비메탈의 상징처럼 되었다. 페이지는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마지막 스타였던 동시에 70년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의 원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