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대학 졸업을 앞둔 초겨울, 아프리카 난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돈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붕어빵 장사를 하기로 했다. 동지도 구했다. 고등학교 때 단 두 줄의 시로 도(道)대회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전설적인 친구였다. 사은회비 5만원이 장사 밑천이었다. 친구와 나는 국제시장에서 5만 원을 주고 붕어가 8개 달린 빵틀을 사서 18번 버스를 탔다.
"학생, 이거 빵틀아이가?"
운전기사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트럭에 실어야 할 빵틀을 들고 버스에 탄 게 미안해 고개를 숙이고 겨우 "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뿐만 아니라 버스에 탄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친구와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누군가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밝은 회색 잠바를 입은 아저씨였다.
"풀빵 장사 해봤나."
아저씨는 조용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또록하고 자상하게 물었다.
"밀가루 반죽해서 삶은 팥을 반 숟가락씩 넣으면…."
친구는 며칠 전 우리 둘이 작성한 풀빵의 레시피를 말했다.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리 준비해둔 듯한 메모를 건네주었다. 메모에는 밀가루와 팥 이외에도 열 가지가 넘는 재료들이 적혀있었다. 그 간단한 붕어빵에 이런 재료가 들어가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옆에 서서 그 재료의 효과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설명을 한 후 그것들을 살 수 있는 장소도 가르쳐주었다. 온천시장 안 어디였던 것 같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정육점에 가서 돼지기름을 얻어(사지 말고) 24시간 동안 빵틀에 기름칠을 하라고 했다. 그래야만 빵틀에 질이 나서 밀가루가 들어붙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우아하고 고상한 척해도
날 것을 죽여 숯불에 구워 먹으면서
사랑을 꿈꾸는 비루한 것임을 인정했다그날 친구와 나는 정육점으로 온천시장으로 바쁘게 다니며 돼지기름을 얻고 재료를 샀다. 빵틀의 질을 내고 그보다 오랜 시간 '청춘풀빵'이라는 야심찬 간판과 '로미오도 이 빵을 먹는 줄리엣에게 반했다'는 아치를 만들었다(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와 나는 사실 풀빵에 대한 연구보다 그 간판과 아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했다).
장사는 대성공이었다. 아침 일찍 착화탄으로 연탄을 피우는 게 고역이었지만 붕어빵은 굽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부산대학교 정문 앞 축제제과 사장님의 배려로 빵틀도 그 집 창고에 넣어둘 수 있었다(우리는 경쟁업체라고 생각했는데 축제 사장님은 별 경쟁의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코트를 입은 신사가 아침 일찍 찾아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매상이 얼마냐, 돈 벌어서 뭘 할 거냐, 뭐가 제일 힘드냐, 아침부터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 싶어 딱딱거리며 몇 마디 대답을 했는데 그게 신문에 실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상한 아저씨는 신문기자였는데, 그 뒤부터는 교수님들의 연구실에서도 청춘풀빵을 대량으로 사갔다.
한 달도 못가 우리는 빵장사를 그만두었다. 겨울바람에 귀가 얼었고 무엇보다 난민돕기 기금은 고사하고 원금도 까먹어가는 상태를 견딜 수 없었다. 해가 질 때쯤 뒷설거지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모여든 친구들과 밤마다 술을 마셨는데 술값은 당연히 우리 몫이었다.
눈발이 찔끔찔끔 내릴 때, '빵틀 매도'라는 건조한 글을 아치 밑에 달았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친구와 나는 빵틀을 사올 때처럼 그것을 들고 인근 고물상으로 갔다. 빵틀을 고물 값으로 넘기고 돌아오던 날, 나는 친구 몰래 눈물을 흘렸다. 친구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동네 골목에서 붕어빵을 만나면 세상을 향해 열었던 청춘이 생생하다. 그 기억은 붕어빵만큼 따듯하고 달콤하게 나를 격려한다. 힘내, 아줌마!
장어구이
정확히 몇 년 전인지는 모르지만, 십오륙 년은 더 된 것 같다, 방학을 앞둔 여름이었다. 1학기 마지막 회식을 해야겠다고 부장이 통고를 했다. 두툼하고 짙은 눈썹과 크고 거침없는 목소리, 솥뚜껑만한 손, 나의 허벅지만한 팔뚝, 우리는 그를 '장비'라고 불렀다. 회식이라면 평소에 미루어놓았던 일들을 줄줄이 떠올리면서 꽁무니를 뺐지만 그날은 장비 부장의 위용에 눌러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남천동 고깃집 아니면 횟집이겠지, 입술을 내밀고 있던 내게 장비 부장이 월전에 간다고 했다. 월전? 나는 처음 듣는 곳이었는데, 부장은 익숙한 곳이라는 듯 시시한 무용담 비슷한 것을 늘어놓으며 송정, 대변을 지나 월전에 닿았다.
"월전, 달밭 아이가. 달이 밝은 보름달이면 저 바다 전체가 달빛 밭이 되는 기라. 쥑인다 아이가. 저쪽 방파제에서 소주 한 잔만 주고 받아도 안 넘어가는 여자가 없더라꼬!"
"또 시작이다!"
제일 나이 많은 여선생이 쏘아 붙이자 장비 부장은 껄껄 웃으며 맞은 편 허름한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숯불이 나오고 곧 큰 쟁반에 등을 따 토막을 낸 바다 장어가 나왔다. 당근을 베어 먹고 있던 처녀 선생이 악, 징그러워! 비명을 지르며 등 뒤로 숨었다. 접시 구석에 있던 장어 꼬리가 움직인 것이다.
"징그럽긴 이 놈 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장비 부장이 익숙한 솜씨로 달구어진 석쇠 위에 장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이익 지익, 나는 석쇠 위의 장어가 몸을 태우며 내는 소리를 못들은 척 소주잔을 들었다. 처녀 선생이 아까 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번엔 석쇠 위에 놓인 장어꼬리가 고통스럽게 온 몸을 뒤틀고 있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이게 피부에 얼마나 좋은데."
이번에는 나이 많은 여선생님이 젓가락으로 꼬리를 뒤집으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을 외면한다고 눈을 조금 돌렸는데, 장어의 눈과 마주쳤다. 반으로 갈라진 머리에 붙은 눈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소주를 두어 병 마신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가다 주방 앞에서 발이 얼어붙었다. 아주머니 두 분이 고무장갑을 끼고 큰 소쿠리 안에서 파닥이는 장어를 잡아 도마에 박힌 못 위에 머리를 대고 칼등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장어의 긴 몸뚱이가 급박하고 맹렬하게 움직이자 한 손으로 꽉 잡고 잘 벼린 칼로 등을 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징그러웠는데도 나는 그 뒤 가족이나 지인을 데리고 몇 번 월전을 찾았다. 물론 꼬리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렸고 반으로 갈라진 머리에 붙은 눈은 맑고 투명했다.
남자들에게는 몸에 좋다는 말을 했고 여자들에게는 피부에 좋다는 말도 했다. 보름달이 뜨면 바다 전체가 커다란 달이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갈 때마다 조금 허전했다.
맛도 경치도 그대로고 달밤에 방파제에도 앉아봤는데, 뭔가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월전을 찾지 않았다.
얼마 전 외국에 살고 있던 친구가 거의 오 년 만에 얼굴 한 번 보자고 부산에 왔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단짝이라고 자타가 인정을 한 사이지만 몇 년 만에 보려니까 어색했다. 부산역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어디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 고민했다. 달맞이 언덕의 고깃집, 경양식집, 구덕포의 횟집…, 무수한 음식점을 떠올렸는데 갑자기 월전이 생각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중국의 베이징으로 옮겨온 친구는 두 곳 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며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 모든 풍경이 나의 소유라도 되는 듯 은근히 우쭐되며 월전에 대한 안내를 했다. 장비 부장이 했던 말을 조금 틀었다.
"저기 방파제 끝에 앉아 술을 마시면 마음을 얻지 못하는 남자가 없다는데."
나는 이미 수치로 입증이나 된 듯이 확신을 하며 말했다. 다른 말엔 별 반응이 없이 창밖에만 눈을 두고 있던 친구가 "진짜?"라고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니까! 내가 다시 확신을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한번 해볼까?"
우리는 마주보고 하하 웃었다.
몇 년 새 새 건물이 생겼지만 나는 장비 부장과 같이 갔던 식당으로 들어섰다. 창은 여전히 두꺼운 비닐이었고 이곳저곳 불똥이 튕긴 듯한 비닐장판과 낡은 테이블도 그대로였다.
장어 2인분과 소주 1병을 주문했다. 곧 숯불과 토막 난 장어를 담은 접시가 나왔다. 등을 가르고 끄집어내었을 내장도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다.
손가락만한 꼬리는 여전히 접시 밖으로 튀어 오르듯이 꿈틀거렸다. 술잔을 들던 친구가 멈칫하더니 곧 태연해졌다. 그까짓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친구와 나는 소주잔을 쨍 소리 나게 부딪혔다. 우리의 삶이 우아하고 고상한 척 해도 날 것을 죽여 숯불에 구워먹으면서 사랑을 꿈꾸는 비루한 것임을 서로 인정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오랜만에 만났든 처음 만났든 마음을 열어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월전 장어구이를 먹으러 간다. 달밭 방파제에서 술을 마시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어쩌면, 그 말을 하고 싶어 그곳으로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영선 소설가
◇약력: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평행의 아름다움', 장편소설 '실로 만든 달', '물의 시간'.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수상. 경남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