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유형문화재 제87호 극락전과 지방유형문화재 제35호인 대원사 자진국사 부도를 보유하고 있다. 신라 지증왕 때에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그 후로 고려시대 조계 제5세 원오국사가 중건하였다.
대원사는 천봉산 중턱에 있으며 6.25동란 이전까지만해도 1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여순반란 사건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현재 극락전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87호로 지정되어 있고, 극락전앞에 자진국사 부도가
있다. 최근 불사 중창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근처에 백민 미술관, 송재 서재필 생가 및 기념
공원, 주암호반, 고인돌 공원과 연계되는 교육문화 탐방 루트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원사 벚꽃 길
호남에는 많은 산과 계곡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원사 계곡을 으뜸으로 꼽는 지리학과 교수님이 있습니다. 산은 남성(양)을 상징하고 계곡은 여성(음)을 상징하는데 대원사 계곡의 특징은 호남에서 가장 깊고, 좁고, 깨끗한 계곡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원사 벚꽃 길은 천봉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와 어우러지며 온 몸의 기운을 열어주기 때문에 새봄을 맞이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5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대원사 벚꽃 길은 벚꽃이 만개할 4월 중순께는 하루 5000대 이상의 차량이 몰리는 벚꽃축제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원사 수미광명탑
티벳박물관 앞에 2003년에 건립된 티벳식 불탑‘수미광명탑’이 세워져 있다. 높이 15m에 달하는 큰 탑이다. 불탑장엄에는 호아동으로 제작된 상륜부 첨탑과 11면천수관음상을 모신 감실 등이 티벳 망명정부의 협조로 인도에서 제작되어 순금으로 옷을 입혔다. 불탑의 바닥과 탑신은 백옥으로 장엄하였으며 불탑 내부에는 사람들이 질병을 치료해 주기 위해 약초와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삼존불을 모셨다. 법당 내부에는 티벳 왕궁 화가인 락쌈과 체링 부부가 1년간 공들여 그린 약사여래,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미륵존여래의 사방불국토와 칼라챠크라 만다라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한꽃 문
대원사 입구 연못
대원사 일주문
연못옆에 서있는 기이한 조경석
대원사의 일곱연못
대원사 귀자모신
부처님 당시“하리티”라는 야차귀신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의 아기를 유괴해서 잡아먹으므로 사람들이 부처님께 와서 호소하였다. 부처님은“하리티”의 500명 자식 중 막내인“빈가라”를 신통력으로 발우 속에 감추었다. 7일 동안 미친듯 제자식을 찾아 헤매던 야차귀신이 부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너는 500명의 자식을 두고도 마음이 아픈데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생각해 봤느나?”하면서 사람의 아기를 잡아먹고 사는 야차귀신을 깨우쳐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불제자가 되게 하였다. 그후“하리티”는 어린 유아들을 보호하고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사랑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유아양육과 해산의 신“귀자모신”을 참배하면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미와 양초, 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대원사 부모공덕불
"집안에 부처님이 계시니 바로 부모님입니다"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에 이 부모공덕불을 만든 의미가 깃들어있다. 부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부모님이라는 것. 나무한테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듯 사람의 뿌리를 부모님과 조상으로 보는 것이다.
부모공덕불은 그런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뉘우치고 은혜에 눈뜨게 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부처님인 것이다. 화순 운주사에 있는 석조불감의 형태로 만들어진 이 부모공덕불의 앞면은 눈물 흘리는 아버지불이고 뒷면은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어머니불이다.
대원사 염주와 목탁
대원사는 염불선 수련도량이다. 염불선이란 통일신라시대 원효가 널리 퍼뜨린 염불선은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어려운 교리나 경전을 모르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외면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대중들에게 안겨준 수행방법이었다. 대원사 나뭇가지에 걸린 염주와 목탁은 일상 속에 염불을 생활화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원사 연지문
대원사 극락전
지방유형문화재 제87호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본 사찰의 주불전이다. 극락전은 6단의 계단을 중앙에 둔 다소 높은 축대형식의 기단위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덤벙주초 위에 배흘림이 약한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두꺼운 창방을 걸치고 평방을 그 위에 다시 얹은 다음 주간에 2구씩의 공간포를 두었다. 외진(外陣)의 낮은 평주위에 얹어진 평방은 단일부재로 전면의 3간 전체를 지탱하고 있어 참으로 희귀한 예이다. 이 평방 위에는 주두를 얹고 다시 외4출목, 내4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놓았다. 공포를 이루는 소로와 첨차가 다소 커 강직한 느낌을 준다. 특히 첨차는 교두형으로 공안이 없고 살미첨차의 외부는 경사 급한 3기의 앙설(仰舌)위에 수설(垂舌) 1기가 놓여있다
대원사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손가짐만 다를뿐 모두 똑같은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아미타불좌상은 길고 살찐 얼굴에 어색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로 결가부좌하여 아미타구품인을 결하고 있다. 오른쪽에 합장을 하고있는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 모셔진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새겨진 보관을 썼다. 뒤에는 붉은 바탕에 선묘하여 얼굴부분만 밝게 채색한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다.
대원사 극락전 수월관음도
달마벽화와 마주한 벽에 그려진 것은 해변가 바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이다. 반가좌에 측면관을 취한 관음의 곁에 목유를 꽃은 수병을 배치하고 뒤에는 묘사하여 전통적인 수월관음의 도상을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흔히 화면하단 구석에 작게 묘사되는 선재동자가 여기서는 관음의 뒤쪽에서 비교적 뚜렷이 그려졌고, 보통 관음의 두광밖의 위쪽에서 날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던 청조(靑鳥)를 선재동자가 두 손으로 잡게 한 점도 특이하다. 관음보살의 이목구비나 보관의 모습 등에서는 고창 선운사(高敞 禪雲寺) 아미타후불벽화의 관음과 강한 친연성을 엿보인다. 천의는 역시 백의로 표현되었는데 팔을 감아 내려간 둔중한 흐름과 가슴의 양쪽에 묶여 내린 진홍의 띠매듭은 수면위에서 매우 유치하고 기이한 형상을 구불거리고 있다. 그것을 따르는 몇 가닥의 평행 의습선은 극도로 도식화된 모습이며 반원형을 반복해 그은 여러 줄의 물결 또한 그러하다. 상체에 비해 반가한 하체는 매우 작아서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게 되었다.
대원사 극락전 달마도
중앙에 달마대사가 크게 그려지고 그 좌측에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치는 선사가 서 있는데 곁에‘신광선사단비(禪光禪師斷臂)’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것은 선종 제이조인 혜가(慧可)의「설중단비(雪中斷臂)」설화에서 힌트를 얻어 신광선사의 선심을 묘출하는 흥미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적갈색의 두포를 두른 건장한 달마는 일견 유명한 김명국의「달마도」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인상을 보이는데 팔을 잘라 바침에 움찔 놀라는 듯한 둥그런 눈과 찡그린 미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 건장한 신체를 두른 의습과 간략한 필획과 특히 두포의 끝단에 둘러진 검은 선은 긴장된 달마의 인상을 돋보이게 하였으나 아래로 흘러내린 띠매듭의 연장은 일면 빠진감을 유발하고 있다. 배경으로 설정한 바위와 나무줄기의 거친 묘사는 달마가 앉은 보좌의 도식적인 처리와 함께 치졸함을 느끼게 한다.
극락전 동종
동종위에 목어를 타고 피리를 부는 동자상이 너무 정감이 갑니다.
대원사 금종루
대원사 극락전앞 불족
극락전 앞에는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진 연화석이 있다. 큰 둥근 돌 주위에는 16잎의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으며, 평평한 윗면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족(佛足) 즉, 부처님의 발바닥을 파내어 조각하였다. 불상이 없던 무불상시대에는 부처의 족적이 가장 큰 예배대상이었다 한다. 대원사의 부처님발 예배에서는 그런 원시신앙의 한 형태를 접하게 된다.
대원사 지장보살입상
낙태된 어린 영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1993년 6월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는 위치는 조선 중기때 있었던 지장전(地藏殿)의 자리였다고 한다. 또한, 이 자리는 주위 산세로 보아 여성의 자궁에 해당하며 그 중심이라고 한다. 지장보살은 깍은 머리에 스님 모습으로 한 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잡고 한 팔에는 어린 아이를 안고 서 있다. 앞에는 동자상의 지장보살상이 108분을 모시고 있어 야외 지장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원사 수조
대원사 요사채
대원사 자진원오국사 부도
대원사 극락전 옆 평평한 대지위에 조성되어 있는 부도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편평석 11매로 방형의 구획을 하고 그 안에 이중의 방형 지대석위에 팔각원당형부도를 세웠다. 지태석 하단은 4매의 장방형 석재로 결구하고 상단은 1매의 판석을 놓았다. 기단의 하대는 측면과 상면을 구분하였는데 측면은 8각으로 한 변에 장방형의 안상 2개씩을 조각하고 상면은 크고 작은 16판의 복련을 조식하였다.
탑신은 세장한 8각형으로 전면에「慈眞圓悟國師浮照之塔」이란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후면에 3자의 범자가 양각되어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명문있는 면을 제외한 6면에는 신장상들이 양각되었다.
대원사 아도영각 아도화상
아도화상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전각 안에 모셔진 영정(影幀)이다.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아도(我道),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포교를 하려 하나 신라인이 불교를 싫어하여 숨어살다가 신라 공주가 병이 들어 병을 치료하니 왕이 기뻐하며 절을 짓고 불교를 일으켰다고 한다. 초가로 지은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짓고 스님께서 설법하니 하늘 꽃이 떨어졌다고 한다.
대원사 김지장전
백제고찰 대원사에 신라왕자 김교각스님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2001년에 지어졌다. 김지장 성인은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국의 4대 성인으로 추앙받고, 육신불이 되신 인물이다. 중국 구화산 기록에 따르면 ‘김교각이 차 종자를 신라에서 가져와 구화산에 심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온 시기보다 132년이나 앞선 것이다. 대원사에서는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지장전을 건립하고, 김지장전의 3면 벽에는 김지장 스님의 일대기를 벽화로 그렸다.
대원사 김지장전
대원사 마애삼존불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을 묘사한듯
대원사 황희선생 영각
황희선생은 조선 세종 때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하고 청사에 빛나는 위업과 송공이 지대해 역사적 인물로 추앙받는 분이다. 대원사와 선생의 인연은 1419년 남원에서 유배되어 근신하시며 경서와 시운을 탐구하던 중 보성 대원사를 참배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황희정승의 넷째 아들인 직신공이 보성땅에 내려와 살면서 황희정승의 영당을 대원사에 건립하게 되었다. 유교를 받들고 불교가 배척받던 조선시대에 사찰이 보호받을 수 있는 배경으로 경내에 황희영각을 건립하고 진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에 여순사건으로 대원사가 불타면서 영각마저 소실되자 전라남도의 후원과 황씨 광주 보성 종친회의 협조로 2002년 황희영각을 건립하고 선생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대원사 수관정
극락전 뒤의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숲속에 연못이 있고, 그 위쪽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수관정이 있다. 죽음을 관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내에는 죽음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관이 놓여있고, 입관하는 절차가 벽에 붙어 있어 체험해 볼 수 있다. 수관정 주위로는 짙은 녹음이 펼쳐지고, 정자와 연못이 있어 아름답다.
대원사 옥불전
대원사 옥불
대원사 묘길상전
옥불전 향좌측 숲에 묘길상전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에는 티벳식의 세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