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늙은 나(我老)'란 시에는 "이가 쑤시니 건어를 씹거나/연포를 마시기도 참으로 힘들구나(齒病嚼乾魚/軟飽眞難繼)"라는 구절이 있다. 연포(軟飽)란 음주를 뜻하는데, 송나라 소식(蘇軾)의 광주를 떠나며(發廣州)란 시에 "세 잔을 연포한 후/베개 베고 자니 여유로다(三杯軟飽後/一枕黑舌甘餘)"란 구절이 있다. 송(宋)의 홍각범(洪覺範)은 법명이 혜홍(惠洪)이란 승려인데, 그의 '냉재야화(冷齋夜話)'에는 중국 방언에 술 마시는 것이 연포(軟飽)이고, 달게 자는 것이 흑첨(黑舌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치통의 원인에 대해 '지봉유설'은 "보통 사람들은 치통의 아픔이 월식(月蝕)날 밤에 음식을 먹는 데서 많이 생긴다고 말한다"고 적고 있다. '성종실록'에는 제주 의녀 장덕(張德)과 제자 귀금(貴今)이 충치를 제거하는 의료술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민간 처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배 위에서 치통이 발생하자 맑은 물로 양치질했더니 통증이 가셨다는 이야기가 이유원(李裕元)의 '춘명일사(春明逸史)'에 나온다. 뿌리가 까마귀 머리처럼 생겨서 오두(烏頭)라고 불렸던 바곳의 덩이뿌리나 말벌의 집인 노봉방(露蜂房)이 민간 치통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박하(薄荷)잎이나 정자유(丁字油)를 아픈 이에 끼우거나 곤약(崑蒻)을 아픈 쪽 뺨에 대는 것도 통증 제거용으로 사용되었다.
새터민 교육기관인 하나원은 새터민들의 질환 중에 치과 관련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부실한 의료 시설과 낮은 영양상태가 주범일 텐데 치통처럼 시급히 치료해야 할 병이 없다는 것을 아파 본 사람은 안다.
[이덕일 사랑] 빈민구제책
2009.02.13
세종은 재위 4년(1422) 흉년이 들자 시신(侍臣)들에게 "매일 계사(啓事)에서 황정(荒政)에 관한 일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라"고 말했다. '황정'은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하는 구황정책(救荒政策)을 뜻한다. 세종은 승지들이 매일 황정에 관한 사항을 가장 먼저 보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정조 재위 7년(1783) 여러 지방에 기근(饑饉)이 든 상황에서 국왕 탄신일이 다가오자 지방관과 장수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했다. 정조는 "내가 한결같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백성일 뿐이다. 백성이 신음하는데 무슨 축하를 한단 말인가"라고 물리쳤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11월 화성(華城)의 성역(城役)까지 중지시키면서 "지금은 황정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나오는 사례들인데 두 임금이 왜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성공한 임금이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백성들의 고통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세조 3년(1457) 가뭄이 들자 우사간 서거정(徐居正)은 상소를 올려, "황정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경비입니다. 지금 '육전(六典)' 등의 편찬 사업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모두 정지하소서"라고 청했다. 재난으로 고통에 빠진 백성들을 '학철지부'라고 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 나오는데 수레바퀴 자국에 생긴 아주 작은 웅덩이에서 신음하는 물고기를 뜻한다.
가난한 장주(莊周)가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세금을 거두면 주겠다고 답했다. 장주는 수레바퀴 자국에서 신음하는 붕어가 "물 조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소연했으나 "남쪽 오월(吳越)의 왕에게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차라리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으라"고 화내더라고 대꾸했다. 빈민에게는 당장 지금이 급하다는 교훈이다.
정약용(丁若鏞)은 황해도 곡산 부사 시절 관내 모든 백성들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적은 '호적의(戶籍議)'를 만들었다. 호적의만 펼치면 누가 구휼에서 소외되고 누가 부당하게 수령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혹시 읽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지금도 필요한 호적의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 사랑] 정조 독살설
2009.02.11
필자가 정조 독살설을 추적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료를 섭렵하면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대목은 심환지를 내의원(內醫院) 제조로 그냥 둔 부분이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의 와병 사실이 재위 24년(1800) 6월 14일 처음 등장한다. 그날 정조는 예전에 심환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로자식'이라고 욕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불러 진찰을 받는다. 그런데 다음날 서용보를 교체해 그에게 치료를 맡길 수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심환지는 계속 내의원 제조로 근무시켰다.
이번에 공개된 서신은 그 의문을 상당 부분 풀어주었다. 정조가 사망 13일 전 심환지에게 와병 사실을 알린 것이 그가 정조의 의문사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그간 알려졌던 것보다 정조의 의문사에 보다 깊은 관련이 있다는 근거로 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 정조의 병세는 하루 전에 이미 약방의 진찰을 받음으로써 공개된 사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조가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의문사의 연원은 사망 28일 전인 5월 30일 그믐날 경연에서 한 오회연교(五晦筵敎)에 있다. 이 하교에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암시한다. 이는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처럼 천주교도라는 노론의 공세로 쫓겨났던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노론 벽파가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이런 구상이 사실이었음은 다산 정약용의 글로도 증명된다.
정조는 사망 16일 전인 6월 12일 밤 규장각 각리(閣吏:규장각 아전)를 정약용에게 보내 '한서선(漢書選)'을 전하면서 "너를 부르려고 주자소(鑄字所)의 벽을 새로 발랐다"면서 "그믐께쯤이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남인들을 중용하는 정계 개편을 결심하고 있었다.
규장각 각리는 정약용에게 "전하의 안색과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온화하셨다"고 정조의 동태를 전했다. 그러나 정조 곁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정약용은 그믐이 되기 전에 정조가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정약용이 정조 의문사에 관한 글을 남긴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덕일 사랑] 가뭄의 원인
2009.02.10
가뭄과 홍수 같은 천재(天災)를 인재(人災)로 보는 것이 유교 사회의 정치관이었다. 즉 사람이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에 가뭄이 든다는 인식이다. "홍양을 삶다(烹弘羊)"란 말이 있다. 한 무제(漢武帝) 때 염철(鹽鐵)과 술의 전매제(專賣制)를 처음으로 실시한 상홍양(桑弘羊)은 당초 유능한 관료였으나 나중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나쁜 관료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뭄이 들자 무제가 비를 내리게 하는 방안을 물었고, 복식(卜式)이 '홍양을 삶아 죽여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烹弘羊 天乃雨)이라고 진언했다는 이야기다. '한서(漢書)' 복식(卜式)열전의 이야기인데 '위서(魏書)' 정욱(程昱)열전에도 실려서 나쁜 재상을 쓰면 천재(天災)가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가 '부열의 장마(傅說霖)'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어진 재상 부열(傅說)을 등용하자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상서(尙書)' 설명(說命)조에는 고종이 부열을 등용하며 당부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만약 철이 필요하면 너를 써 숫돌로 갈게 하고, 만약 큰 내를 건너가야 하면 너를 써 배와 노를 만들게 하고, 만약 큰 가뭄이 들면 너를 써 장맛비를 내리게 하리라"(若金用汝作礪/若濟巨川用汝作舟楫/若歲大旱用汝作霖雨)는 말이다. '상서' 주석은 이때의 '장마(霖)는 삼일 동안 비를 내려 가뭄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현상(賢相) 등용이 하늘까지 감동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는 '하늘에 묻는다'는 '속천문(續天問)'이란 사부(詞賦)에서 "흉작의 재해는/사람이 만든다지만/어째서 우·탕왕의 인정(仁政)에도/홍수와 가뭄이 참혹했습니까(凶之降/寔由人作/何禹湯之仁/而�C焦爲虐)"라고 하늘에 묻고 있다.
은(殷)의 시조 탕왕(湯王) 때 7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기에 '탕왕의 가뭄(湯旱)'이란 말까지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세종 때도 가뭄이 많았듯이 선정을 베풀 때도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현재 겨울 가뭄으로 식수난을 겪고 있는 지역에 관정(管井) 개발 사업비가 지원된다는 소식이다. 정치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계기도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