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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지금 스테판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스테판은 지금 산헤드린 공의회에 잡혀 와 있습니다. 스테판 집사님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변론하고 있습니다.
스테판의 변론은 아브라함 이야기로부터 쭉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땅은 가나안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언약(言約)은 말로 한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잘라내신 언약이기 때문에 이 언약을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로 이어지고 이삭의 아들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아브라함 언약을 잇게 되었습니다. 에서가 아브라함 언약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야곱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새로운 이름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야곱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들과 친척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이주하였는데, 75명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430년 만에 100만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서 황야에 들어가서 황야에서 40년을 살게 되었으며 모세는 40년 동안 황야 교회를 이끌었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나고 모세가 120살이 되어 죽게 되자 모세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 이름이고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바꾸면 “예수”가 됩니다.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끄실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믿으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반발심은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고의로 왜곡하게 만듭니다. 아담의 죄 및 타락이 인류의 마음에 끼친 영향은 무섭고 놀랍습니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대하면 짜증이 생기면서 불쾌감이 일어나게 되고, 그들은 크게 소리치며 귀를 막고 듣고 싶어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체하며 종교와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토론하기 시작하였다가도 자제력을 잃고 조바심을 내고 화를 내며 듣기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취급을 받았습니다.1) 사람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1. 그들은 스테판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끝에 “그들이 그 치아를 그에 대해 이를 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마음들에 성났고 그에 대해 치아들을 이를 갈았습니다.
여기 “성나다”(디아프리오)는 “조각조각 톱질하다”를 뜻하며, “마음이 톱질 당하여 성났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행 5:33, 7:54). 스테판의 변론을 듣던 자들은 성내고 이를 가는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만들어진”이 “우상”의 관용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스테판이 성전을 우상이라고 하자 그에게 이를 갑니다(행 7:54).
스테판은 그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습니다.2) 그런데 스테판의 변론을 듣던 자들은 이를 가는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스테판이 이스라엘의 배역을 책망한 것에 대해 그들은 성나게 되고,3) 그들은 스테판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자 그들은 더 성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군중을 매우 자극한 것은 항상 성령을 거슬렀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재판처럼 보이는 데에서 그의 변론을 중단시켰습니다.4)
사도행전 7장 55절에 “성령의 충만하며 하늘로 주의 깊게 본 스테판이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서신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드득 이를 갈았으나 스테판은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5)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심처럼 스테판은 완전하였습니다(마 5:48).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욕먹고 박해될 때에 그 사람은 복됩니다(마 5:11).
그가 말하였기를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서신 인자를 지켜보노라”라고 하였습니다(행 7:56).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에서 거주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사람이 하나님께 집과 휴식 장소를 지을 수 없습니다(행 7:49, 사 66:1).
하나님께서는 성별과 아름다움의 높은 처소에 계신 분이며(사 63:15), 사람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신 하나님께 성전을 손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거짓된 증인들은 스테판이 성소에 대항하여서 이야기한다고 말하면서 “‘예수가 이 장소를 헐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고소한 것입니다(행 6:14).
‘손으로 만들어진 성소를 헐고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세우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그들이 거짓 증언하였습니다(막 14:57-5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이 성소를 허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몸의 성소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2:19-21).
스테판은 손으로 만든 성전인 우상을 지켜본 것이 아니었고(행 7:48),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신 참 성전이신 인자를 지켜본 것입니다(행 7:56).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에서 거주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거주하시며 하나님의 오른쪽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스테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자신이 지켜보노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큰 음성에 소리 지른 그들이 그들의 귀를 억압하였고 돌진하였습니다.
“귀”는 듣는 기관입니다(마 10:27). 귀를 가지면 듣습니다. 그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성전이 헛된 우상일 수 있다는 말이 싫었으므로 스테판이 진리를 말하자 그들은 듣지 않으려고 그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듣기 싫어하여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박해합니다.
그리고 도시의 바깥으로 쫓아낸 그들이 돌로 쳐서 죽였으며(행 7:58), 증인들이 그들의 옷들을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곁에 집어넣었습니다.
증인들은 그들의 옷들을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에다가 놓았습니다. 증인들은 옷들을 벗은 이유는 돌을 잘 던질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6)
스테판이 “주 예수여 나의 영(spirit)을 받아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영(spirit)이 몸을 떠나는데, 몸을 떠난 영(spirit)은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 아니면 악마의 왕국으로 가게 됩니다. 스테판 집사님은 자신의 영(spirit)이 천국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그가 큰 음성에 “그들에 이 죄를 세우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며 이것을 말한 그가 잠들었습니다(행 7:60).
스테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돌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스테판은 그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큰 선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며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은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면서 스테판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7)
그러나 사울은 그의 살해함에 승인하는 자였습니다(행 8:1).
사울은 스테판을 살해함이 진행된 동안 승인하고 있는 자였습니다.8)
2. 사울이 교회를 파괴하고 신자를 감옥 안에 넘겼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집들을 따라 들어간 사울이 그 교회를 파괴하고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당긴 그가 감옥 안에 넘겨준지라”고 하였습니다.
스테판의 죽음 후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믿는 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성과 나라에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행 8:1).9)
그때에 집들을 따라 들어가는 사울이 그 교회를 파괴하고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당긴 그가 감옥 안으로 넘겨주었습니다(행 8:3).
그 사울이 여전히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해의 숨을 들이켜며 대제사장에게 갔습니다(행 9:1).
그가 그에게 다마스쿠스 안으로 그 회당들을 향한 편지들을 요구하니, 남자들과 여자들을 예루살렘 안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입니다(행 9:2).
여기 “다마스쿠스(Damascus)”로 번역한 곳(다마스코스)은 히브리어 “다메섹”(담메세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메섹(Damascus)”은 시리아(Syria)의 수도입니다. 영어로는 “다마스쿠스”(Damascus)입니다.
“다메섹”은 아브라함 때도 있은 아주 오래된 도시 이름인데(창 14:15), 사울은 이 오래된 도시 안으로 그 회당들을 향한 편지들을 요구하였으니 그가 그 길을 따르는 누구라도 발견하였다면 데리고 오기 위해서입니다.
3. 사울이 다메섹에 가는 때에 빛이 주위에 비추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 “가는 때에 그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오게 되고, 갑자기 그를 빛이 그 하늘에서 주위에 비춘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오게 되었고 갑자기 그를 빛이 그 하늘에서 주위에(around) 비추었습니다(행 9:3).
다메섹은 예루살렘의 북동쪽으로 280킬로미터 정도 떨어졌습니다. 로마 전역의 다른 도시들과 연결되는 여러 통상로들이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데가볼리로 알려진 열 개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10)
사울은 갑자기 빛이 하늘에서 주위에 비추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11) 그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사울은 그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겔 9:4).12)
그리고 그 땅 위에 떨어진 그가 음성을 들었으며 그에게 이야기하기를 “사울아, 사울아, 어찌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행 9:4).
사울은 자신을 주위에 비추는 빛을 바라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음성은 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13)
그리고 사울이 대답하였기를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셨기를 “나는 너의 박해하는(are persecuting) 바의 예수라. 그러나 일어나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너의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이야기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5-6).
사울은 하늘의 존재에 대한 높은 경의를 나타내며 “주여”라고 불렀고, 그는 그 음성에게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행 9:5). 사울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밝히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14)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나는 너의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였고 이것은 예수님을 박해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어나고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사항이 무엇인지가 이야기될 것입니다(행 9:6).
“반드시”라는 말은 소명의 ‘신적 필연성’을 나타내려고 쓰였습니다.15) 사울은 그의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함께 여행하는 남자들은 말 못하고 섰습니다(행 9:7).
사울이 땅에서부터 일어났으나 그의 눈을 연 그가 하나도 보지 못하나 그를 손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다메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흘을 보지 못하였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4. 주께서 환상 안에 아나니아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0절에 “주께서 아나니아를 향해 말씀하셨기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향하여, “너는 ‘곧은’이라고 불리는 중심가에 가고 타르소스 사람인 이름에 ‘사울’을 찾을 것이라, 그가 기도하고 있음이고. 그가 들어왔고 그에게 손을 둔 남자인 이름에 아나니아를 바라보았으니, 그가 쳐다보았기 위하여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11-12).
사울과 아나니아의 만남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졌는데 주께서 그에게 갈 곳과 찾아야 할 사람에 대하여 알려 주신 것입니다.16)
기도는 거듭난 마음에 성령님께서 직접 새겨 기록하신 서명입니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과의 훌륭한 교제입니다. 기도는 거듭 태어남의 표지, 곧 양자됨의 증거입니다. 그는 기도하고 있음으로써 자신이 회심한 확실한 표지를 보입니다.17)
습관에 집착하면서 영적인 생명은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없습니까?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외적인 표지에만 매달립니다.18) 사람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안의 모습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기를 “많은 자들에서부터 이 남자에 관해 들으니, 그가 예루살렘 안에 당신의 성도들에게 나쁜 것들을 만들었다고 하오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묶기에 권위를 가지는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행 9:13-14).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떨었던 것은 납득할 만합니다.19)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불가능한 임무”라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불가능하여 보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우리는 전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자에게 전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이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이 살아 있는 영혼에게 부르는 모두가 이름이 되었으며(창 2:19), 또한 아담은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Eve)라고 부르게 됩니다(창 3:20).
사람들이 야훼의 이름으로써 부르기에 시작하였습니다(창 4:26). 카인의 자손들은 야훼의 이름으로써 부르지 아니하였으나(창 4:16-24), 셋의 자손들은 야훼의 이름으로써 부르기에 시작하게 됩니다(창 4:26).
야훼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야훼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훼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야훼께 종속적 관계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베델에 동쪽으로부터 산에 이동하고 그 천막을 고정시켰고, 그가 거기 야훼께 제단을 세웠으며 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8).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께 대한 헌신을 가리킵니다.20)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께 헌신한다는 뜻을 지닙니다(행 9:14).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 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대답하셨기를 “가라 이는 나에게 선택의 그릇이기 때문이니, 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나르기 위해서니. 이는 그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반드시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는 만큼들을 내가 그에게 보여줄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15-16).
사람이 “물건”, “그릇”(vessel)에 비유되기도 하며(렘 22:28), 이때에는 “물건”이 “도구”(instrument)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울은 주께 도구로 사용될 “선택의 물건(instrument)”입니다(행 9:15).
하나님께서는 여럿 중 고르시고 가리시는 분이십니다(민 16:5, 17:5). 그는 그 이름 안에 봉사하게 레위의 자손들을 선택하셨습니다(신 18:5). 하나님께서는 그에 봉사할 수 있게 그들 안에 선택하셨습니다(신 21:5).
주께서는 자신을 위해 사울을 도구로 쓰시기 위해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구원을 받을 백성을 선택하신 분이시기도 하시지만(막 13:20), 주의 일에 쓰시기 위한 사람을 선택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룩 6:13).
이 사울은 주의 이름을 나르기 위한 주께 선택된 도구였습니다. 주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나르기 위해서며, 그는 이방인들의 앞에 주의 이름을 가져가 전할(bear) 것입니다.
땅의 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사울을 고르신 것이며(행 1:8), 이방인들에 복음이 전하여지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사울을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사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이 땅의 끝까지 퍼지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그를 통하여 땅의 끝까지 퍼질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울의 사명을 변화시키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행 9:15).21)
“그릇”은 자기 선택권이 없으며 주인이 쓰는 대로 사용될 뿐입니다.22)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 날라야 하는 선택된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나르시기 위해 그를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나를 도구가 될 점에서 사울은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그릇”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나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여야만 살아갈 이유가 있습니다.23)
주께서 자신을 위해 이 사울이 “선택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주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였기 때문입니다(행 9:16). 주께서 땅의 끝까지 그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크리스트께서는 고난을 받으신다고 예고하셨습니다(마 16:21, 17:12). 크리스트께서는 그가 예고하셨던 대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룩 24:26). 사울은 크리스트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자였습니다(행 9:16).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도 당하게 될 것입니다(행 9:16). 사울은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네로 치하 때에 죽었다고 전해집니다.24)
지금까지 박해자 노릇을 하였던 사울이 이제는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통을 당할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여도 낙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5. 아나니아가 사울 위에 자신의 손을 두고 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에 “아나니아가 가버렸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 위에 그 손을 둔(laying) 그가 말하였기를,”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께서 나를 파송하셨으니 너에게 봄을 받으신 예수시니 너의 다시 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19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한 내용입니다.25)
아나니아가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가 오는 길에 나타나신 주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대의 시력을 회복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 위에 손을 두었고 자신의 사명을 이행하였습니다.26) 우리는 새로 믿는 자들을 “형제”로 부르면서 친절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그가 파송된 이유는 사울이 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사울의 눈에서부터 비늘들 같이 벗겨졌고 그가 쳐다보고, 일어난 그가 세례를 베풂을 받았습니다(행 9:18).
그리고 음식을 취한 그가 강해졌습니다(행 9:19).
6.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9-20절에 “그가 다메섹에서 그 제자들과 함께 되었고. 그가 그 회당들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9-25절은 사울이 다메섹에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신의 사명을 즉시 시작합니다(행 9:20).27)
모두가 말하였기를 “이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파괴시킨 자이지 않느냐 여기 그가 묶인 그들을 대제사장들에 데리고 가러 오지 않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행 9:21).
회중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박해하기 위해 오지 않았냐고 묻습니다.28)
사울은 더 강하게 함을 받고 다마스쿠스 안에 유대인들을 당황케 하니 이가 그 크리스트이신 것을 증명하는 것에 의한 것이었습니다(행 9:22).
사울의 변화에 대해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이 놀랐음은 당연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29)
그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 예언들을 예수님의 삶의 사실과 하나로 모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라고 증명한 것입니다.30)
7. 사울의 제자들이 사울을 성 밖으로 내려 보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5절에 “그러나 충분한 날들이 채움을 받았을 때에, 그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우기(kill) 위해 음모를 꾸몄으나(plot). 사울에게 그 음모가 알려졌으나, 그들이 문들을 밤낮으로 지켜보았으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 성벽을 통하여 광주리 안에 그를 내렸으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5절은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피하는 내용입니다.31)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행 9:23).32)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그 대문들을 밤낮 지켜봅니다(행 9:24).33)
사울은 그 음모를 그 제자들의 도움으로 모면하였습니다(행 9:25). 사울은 광주리에 숨어서 몰래 성벽 아래로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34)
제자들은 사울이 성읍을 빠져나갈 수 있게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35) 사울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벗어난 것입니다.36) 하나님께서 사울을 향한 계획을 가지셨기에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37)
구원영생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울도 변화시키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사울처럼 귀한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예수님을 전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21-425.
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46.
3) Darrell L.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전용우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394.
4)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395-396.
5)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45.
6)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00.
7)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446.
8)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02.
9) Grant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시리즈, 김일우·임미영 옮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3), 232.
10)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34.
11) 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2』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 60.
12)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54.
13) Marshall, 『사도행전』, 틴데일 신약주석, 272-273.
14)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55.
15)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56.
16)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38.
17) C. H. Spurgeon, 『사도행전』, 스펄전 설교전집 26, 김원주 역 (서울: CH북스, 2019), 201.
18) Spurgeon, 『사도행전』, 스펄전 설교전집, 212.
19)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39.
20) Meredith G. Kline, 『하나님 나라의 서막』, 김구원 옮김 (서울: CLC, 2012), 251.
21)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59.
22) 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2』, 81.
23) 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2』, 82-83.
24)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59-460.
25) F. F. Bruce, 『NICNT 사도행전』, 김장복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247.
26) Bruce, 『NICNT 사도행전』, NICNT 성경주석, 247.
27)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62.
28)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65.
29) Bruce, 『NICNT 사도행전』, NICNT 성경주석, 252.
30)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45.
31) Bruce, 『NICNT 사도행전』, NICNT 성경주석, 252.
32)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66.
33)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66.
34) Bock, 『BECNT 사도행전』, BECNT 성경주석, 466.
35)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46.
36) Bruce, 『NICNT 사도행전』, NICNT 성경주석, 252.
37) Osborne 편, 『적용을 도와주는 사도행전』, LAB 주석,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