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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0-23
깨닫지 못하는 자와 인내로 결실하는 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각종 행사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고, 종교개혁 지는 각국에서 찾아온 여행객들로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교회에 종교개혁 강좌가 넘쳐나고 종교개혁으로 과거 적폐 청산해야 할 95가지 종목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교회를 케케묵은 잘못된 전통에서 독립시키고,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Sola Scriptura가 바로 이 정신을 잘 요약한 표어다. 성경에 집중함으로써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도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간 교회는 신자들의 구원을 보장하고,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같은 전통 아래 있는 사람들을 신앙과 정서와 감정을 교류하게 하여 이른바 개혁교회적 문화를 형성했다. 종교개혁 이후 500년간 쌓인 이 교회적 문화는 또 다른 교회의 전통을 형성해왔는데, 오랫동안 교회의 전통에 익숙하고, 거기에 의거하여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교회에서 행하고 가르치는 것이 틀렸다고, 아니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그 전통에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어서 고치거나 더욱 풍성하게 다듬어야 하리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행해오던 것이니 그것이 틀렸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헌상과 기도와 관련한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을 읽고 잘못되게 해오던 것을 고친 교회를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 책 내용대로 하는 교회는 이미 그 책 내용에 동의하고 그대로 해오던 교회였다. 그러니까 그전에 해오던 것을 책 한두 권 읽었다고 바로 고치지 않더라. 내가 감히 그것을 고쳐 루터처럼 종교개혁하려고 그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와 대화를 하고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책이 출판되기 전이나, 출판된 후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다시 종교개혁 당시로 돌아가 보자. 그 당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문제는 모든 교회, 모든 신자의 중대한 관심사였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동의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음”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인데, 그간 도외시 해왔던 이 가르침을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에는 쉽지 않았다. 교황과 개혁자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전통에 젖은 신자들을 교화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인해 루터는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당시 오직 성경으로라는 표어는 과거 전통을 타파하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비텐베르크 도시는 독일의 비교적 북쪽 지방에 자리하고 있고, 그가 종교재판에 출석하라고 호출 받은 보름스는 남쪽에 있다. 작은 보름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맨 먼저 관광객을 맞이하는 것은 수령 500년쯤 된 보리수다. 거기에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이 담긴 글귀가 쓰여 있는데, 한국에서 보름스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대충 훑어보다가 Martin Luther라고 쓰인 것을 보면서, 이 나무가 루터와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나는 칼뱅 탄생 500주년이었던 해인 2009년에 보름스를 방문했는데, 마침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로 박사과정에 있던 감리교 소속의 서00 목사님의 가이드를 받았다. 서 목사님은 수령 500년 된 보리수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분이 전해준 내용을 토대로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금 실감나게 표현하면, 당시 보름스의 보리수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종교재판을 받는다는 소문이 독일 남쪽 지방에까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얼굴도 모르는 루터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도착하기로 예전 된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보름스 도시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 사뭇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아주머니가 있었다. 화제는 당연히 보름스에서 종교재판을 받게 될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 마르틴 루터에 모아졌다.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루터가 주장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에요? 우리가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을 받고, 지상에서는 교황님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잖아요.”
사람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당대 교회와 신자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교회가 선행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일에나 신경을 쓸 것이지, 왜 쓸데없이 교황님의 교서에 토를 달고 교황님 권위에 도전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교황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도 해주시고, 선행으로 구원 받는 방법도 알려주시니 얼마나 좋아요. 더군다나 우리 조상님들 중에서 혹시 연옥에 들어가신 분이 계시더라도 자식들이 면죄부만 사준다면 얼마든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죠. 교황님께 감사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교황님의 권위와 교회에 도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다시 첫 번째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약간은 조심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루터가 말한 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는 면죄부 사느라 괜한 데 돈을 쓰고, 공연히 선행하느라 수고하는 건 아닐까요?”
그러자 두 번째 아주머니가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루터의 말이 옳다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거예요.” 그러고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한국사람 같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루터의 말이 옳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거예요. 또는 소금밭에 싹이 날 거예요.”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에요? 처녀가 애를 낳는 것이 더 가능성이 많지요.”
그런데 그 후 그 아주머니가 땅에 박은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 그게 바로 보름스 에 있는 “마르틴 루터의 보리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당시 사람들은 기적 같은 일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인데 말이다.
아무튼지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난 보리수는 이제 노화가 되어 쇠기둥으로 지지해야 하는 큰 나무로 자라 보름스 시의 마을 입구, 보름스 성당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보름스 시의 상징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500년 전의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으며, 정말 보름스 시 앞에 있는 보리수나무가 그 때 것인지는 몰라도, 그 나무는 지금 시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 앞에 있는 팻말에 나무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어, 그 보리수는 루터가 말한 것이 옳다는 증거로 5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계교회는, 아니 범위를 좁혀 한국의 개혁교회는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는가? 그렇다.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나아진 개혁전통 때문에 너무 당연하고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개혁교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개선의 여지가 없고, 혹시 그 전통에 고착화되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가르치고 풍성하게 제시하는 교훈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어느 시대나 이런 문제는 있었던 것 같다. 씨 뿌리는 자 비유로 이 문제를 간접적으로 살펴보자.
비유 자체
씨 뿌리는 자 비유는 예수님이 생애 전환기에 말씀하신 비유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선언하셨으며, 그 증거로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내쫓으셨다(막 1:14, 15, 34). 사망의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리셨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들의 반응은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얼마 동안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인 말씀을 하셔서, 누가 듣더라도 그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알아들을 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예수님은 이처럼 명료한 말씀이 아니라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제자들도 의외라는 듯이, 놀라 물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마 13:10). 제자들도 비유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 비유의 뜻은 무엇입니까?”(막 4:10).
예수님의 심중에 변화가 생겼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게 틀림없다. 둘 다 맞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마가복음 2-3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분이 하시는 행동에 도전을 받으신다. 안식일에 일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귀신을 내쫓고 한 사람을 구원했는데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 일을 한다고 반대를 받으신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할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만 반대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친척들의 몰이해(마 12:46-50; 막 3:20-35)와 친척들의 배척을 받으셨다. 마태복음 13:57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심중에 변화를 일으켜 이제부터는 명료한 말씀이 아니라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말하자면 교훈의 방법을 바꾸신 것이다. 첫 번째는 우선 자신을 배척하는 당대 사람을 풍자하셔야 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처럼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노골적으로 밝히셨다(마 13:11-15). 13:14-15에 인용된 이사야 6:9-10은 종교 행위는 풍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이스라엘(남 유다)을 향한 심판 선언이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예수님은 그 심판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선언하신 것이다. 나중에 마 15:1-11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장로들의 전통과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않은 사람을 향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마 15:8, 9).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켰고,”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다”(막 7:8, 9).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무리들에게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5:11).
약간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마태는 그 후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표현했다(13:33). 예수님이 왜 비유로 말씀하게 되었는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려고 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예수님의 교훈과 나아가 신약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마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면 어찌 다른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씨 뿌리는 자 비유는 예수님의 전체 비유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핵심적인 비유다.
비유는 어떤 실체와 진리를 빗대어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어떤 상황 또는 태도를 빗대어 표현하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구원의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지키면 구원을 얻는데, 사람들은 그 말씀을 좀처럼 들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과 신앙 인격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이것을 당시 사람들의 삶에서 공감하는 씨 뿌리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4-5절에,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졌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졌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각기 다른 땅에 떨어진 씨는 저마다 다른 운명을 맞았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새에게 먹혀버렸고,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기운이 막혀 시들어버렸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
예수님은 4종류의 밭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두 종류의 밭을 대조하신 것이다.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과 열매를 맺는 밭이다. 이 밭은 비유 해석 처음과 끝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19절)과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23절)에 표현되었듯이, 말씀을 깨닫는 여부와 관련이 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음 문제로 비유 해석이 시작되고 끝나니, 이 어구는 비유의 수미쌍관(inclusio)이다.
비유 해석 – 씨앗에서 토양으로 초점 이동
9-15절은 전해진 말씀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을 이런 식으로 밭에 씨를 뿌려 씨마다 다른 결과를 낸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한 것인지를 설명한 부분이다. 씨 뿌리는 자 비유 자체는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가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면, 비유 해석에서는 씨가 떨어진 토양의 종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토양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부류를 설명한다.
관상용 화초를 심는 경우가 아니라면, 농부는 열매를 맺게 할 목적으로 씨를 뿌린다. 농부는 열매를 잘 맺게 하려고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물을 공급한다. 별의 별 땅이 다 있겠지만, 열매를 맺는 입장에서 보면 나쁜 땅과 좋은 땅만 있을 뿐이다. 땅이 그러하다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왜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까?
첫 번째로 길 가에 있다는 것은…
첫 번째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은 경우다. 누가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다”고 설명한다. 새는 마치 씨앗이 길 가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씨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얼른 날아와 냉큼 집어먹었다. 마귀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할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게 하여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히 4:12). 마치 생명력이 강한 식물의 씨앗처럼, 말씀은 안착한 곳에서 생명력을 발휘한다. 마귀는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는다. 마가는 이 상황을 완한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귓전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빗대어서 표현했을 것이다(막 3:5).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판단(3:22)은 사탄이 그 배후에서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마태는 다르게 설명한다. 이런 경우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의 경우라고 말이다(마 13:19).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본문에서는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는 장소가 “마음”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마음에 새겼다는 의미다. 우리가 어느 사람에게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덕담을 듣거나, 중요한 충고를 받았을 때 “평생 마음에 간직하겠다”고 말하듯이, 그 사람도 메시아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거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설명하면서 밝혀지겠지만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과 반대 상황이다. 그러나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거나 지적으로 공감하고 많은 것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 즉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를 무척 쉬운 비교로써 설명하셨다. 산상설교를 다 마치신 후에 그 내용을 정리하시면서 이렇게 마무리하셨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눅 6:47-49). 집을 지었는데 비가 와서 무너지는 것이나, 씨가 길 가에 떨어져 “깨닫지 못하는 경우” 악한 자(마귀)가 와서 씨앗을 먹어버려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나 동일하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사람마다 다른 결과가 발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듣고 행하지 않느냐”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부주의하게 듣고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런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인격에 반영하지 않아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결국, 행함이 없는 것,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들이 들은 말씀이 그에게 아무런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말씀을 들은 회수가 많아지면, 자신은 그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다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설령 듣는다고 해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습관적으로 듣는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깨달으려고 고민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말씀을 듣고 마음에 심지 않는다. 밭에 심겨지지 못하고 단단해진 땅에 떨어진 씨가 토양에 뚫고 들어가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 마음에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더 정확하다. 그 사람은 말씀은 듣지만 말씀이 그가 고수하고 있는 신조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그 말씀을 몰아내는 것이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말씀을 들었는데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에게는 전통이 더 중요하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지, 우리의 인생을 확 뒤바꾸는 말씀이 자신에게 들어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도 그렇게 바꿔가면서 살아갈 의향이 없는 거다.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한 사람의 경우다. 이것은 위기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무디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성경 내용도 많이 알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도 다 아는데, 행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앉아 있지는 않는지. 단지 새로운 교훈을 찾고 지적인 만족을 얻는 데에만 관심을 갖지는 않은지.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감동은 받고 좋은 말씀이라고 마음에 간직은 하는데, 행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말씀을 듣는 것은 오히려 해악일 수가 있다. 마음이 더 완악해져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말씀을 깨달아 실천하게 해달라고 통곡하며 은혜를 구해야 한다.
두 번째로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두 번째로 소개하는 땅은 바위 위에 흙이 있는 땅이다. 농부는 일부러 바위 위에 씨를 뿌리지는 않는다. 바위 위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농부가 밭을 갈기 전에 씨앗을 흩뿌린 후 밭을 갈아엎었더니 토양 밑에 커다란 돌이 있는 곳에 씨가 떨어진 경우를 가리킨다. 어찌 되었든지 바위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씨앗이 이런 곳에 뿌려진 경우다. 예수님이 설명하신 것처럼, 바위 위에 씨가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한 후 얼마간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 행복해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이 경우는 길가에 씨가 떨어진 경우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가 열매를 맺지 못한 데에는 깨닫지 못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 토양이 얕으니까 반응도 빨랐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씨앗이 금세 말라버리듯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역시 그가 말씀을 받은 후 얼마 있다가 받은 말씀이 말라버린다. 처음에 그는 복음에 기뻐 반응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을 진정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점차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한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사람에게는 토양에 정착하기 위해 내릴 뿌리가 없다. 비유에는 토양이 없다고 했지만, 비유를 설명한 곳에서는 “뿌리가 없어” 말랐다고 한다. 근본이 없는 거다.
그 사람에게 뿌리가 없다고 한 것은, 받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살 마음이 없다는 의미다. 이 말씀에 목숨을 걸지 않겠다는 거다. 말씀을 받고 적당히 기뻐하고, 적당히 말씀을 인용하며, 교양이 있는 체 하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전부 던질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겉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힘보다 그 말씀을 방어하는 자신의 저항하는 힘이 더 강하기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복음으로 또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으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들은 말씀이 그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이 말씀을 받아 반응한 기뻐함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설교(복음)를 듣고 그 내용에 대해 좋은 설교라고, 또는 감동적인 내용이라고 감탄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부복하고 그 말씀에 헌신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을 감싸지 못한다면 그가 처음에 설교에 반응한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는 신기루를 본 것이다.
그는 결국 세상에서 말씀의 사람으로서 “잠깐 믿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자들에게 따라다니는 어려움(환난, 박해)이나 불이익을 당할 때, 말씀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본문에 언급된 “잠시 견디다가”라는 것은 복음을 간직하는 한시적인 기간을 암시한다. 처음에 복음을 들었을 때 가졌던 기쁨을 지속할 영적인 힘이 없어지는 순간, 그가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맞든지, 신앙 때문에 그가 속한 교단에서 제재나 박해를 받을 때 배반한다. 그 순간 그의 신앙은 무너지고 만다. 신앙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도취되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던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말씀을 포기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말씀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환난이나 박해”는 교회 밖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교회 내부에서 또는 같은 집단 안에서 오는 것일 가능성도 많다. 즉 자기 교단에서 공적으로 선언한 것과 다른,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더라도 그 교단에서 그 내부 집단에서 인정해주지 않고 배척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집단 내부의 다수도 문제고, 분명히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깨달은 것인데도 자신이 이것을 끝까지 붙들고 나갈 힘이 없는 것도 문제다. 결국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다수가 공유하는 교훈과 집단의 전통은 지킬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세 번째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세 번째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앞의 두 토양에 떨어진 씨에 비해 훨씬 나은 경우다. 성공적으로 좋은 토양 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농부라면 당연히 그러하듯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기를 기대할 수 있다. 씨앗이 떨어진 땅은,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공급받고 일정 기간 잘 자라는 씨앗처럼,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말씀이 그 속에서 자랄 수 있는 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좋은 토양이다. 그는 말씀의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말씀을 듣고 당분간 말씀의 생명을 경험하고 신앙생활도 기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에 씨앗이 떨어진 땅에는 다른 식물의 씨앗이 동시에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번식력도 왕성하고 생존력도 더 강한 식물 말이다. 예수님은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설명하셨다. 누가는 여기에 “향락”도 첨가한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히 교회 밖의 공간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아이온”(aion)으로서 메시아가 임하시기 이전의 질서와 세계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메시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세대와 질서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의 염려와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염려,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 그들이 누리는 향락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는 신자들의 삶에도 여전히 동반자로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깊이 들어와 성장하는 속도보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 성장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사람들이 이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정도가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크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진 토양에 얼마든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도 살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산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교수로 있는 데이비드 반드루넨은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라는 책을 썼다(부흥과개혁사 출간, 2012). 그는 이러한 두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삶을 어느 것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규형 잡힌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버려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나라도 버려서도 안 된다. 세상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된 세계관 문제다. 그런데 균형 잡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한 쪽으로 쏠릴 유혹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한다. 하나님이 새들보다, 들의 꽃들보다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더 돌보시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염려에 빠져 산다. 세상을 좇아가는 것을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연약하여 이런 염려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 번째 토양으로 이 “세상의 염려와 세상의 유혹”을 문제 삼으신 것은 말씀을 받은 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물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재물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지?’라며 자신의 삶을 걱정한다. 우리는 건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건강을 잃을까 염려한다. 재물을 모으고 건강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멀리 제쳐둔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의”는 고사하고 사회 정의도 없다. 오직 이기주의와 불의만 있을 뿐이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에 떨어진 씨가 그보다 생존력이 강한 가시떨기에 “기운이 막혀” 중간에 질식하여 죽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기운이 막혀버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다. 외려 열매를 맺는 것이 이상하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것처럼 자기가 받은 말씀을 저버릴 정도로 마음이 모질지도 못하고, 돌밭에 뿌려진 것처럼 잠깐 동안만 기쁘게 말씀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일락에 사로 잡혀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다. 말씀대로 살다가는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고, 심지어 자기가 속한 교단에서도 따돌림을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사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버리는 구나”(막 7:8, 9)라는 예수님의 탄식이 딱 여기에 어울리는 경우다.
네 번째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네 번째로 소개하는 땅은 좋은 땅이다. 계산상 이미 씨앗의 4분의 3이 허비되었고, 농부는 낭패를 봤다. 남은 것은 4분의 1뿐이다. 그러나 그 적은 양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엄청나게 많은 결실을 한다. 100배, 60배, 최소 30배의 결실을 한다는 것이다(마 13:23; 막 4:20).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앞에서 손실을 입은 씨앗들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결실을 맺는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들은 사람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씨앗 4분의 3이 열매를 못한다니, 구원 받는 사람은 적을 것이 아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눅 13:23).
그러나 낙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농사를 지을 때 으레 그러하듯이, 농부는 씨를 뿌릴 때 이런 세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하지 않고 씨를 뿌린다. 그는 확률 상 4분의 1에 해당하는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에 소망을 걸고 추수 때를 기대하면서 씨를 뿌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과장법을 즐겨 사용하셨다. 당시 농사를 지으면, 수확할 수 있는 양은 파종할 때 비해 평균 5.5배에 불과했다. 당시에 8배가 넘으면 풍년이라고 생각했으니, 예수님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맺은 열매를 100배라고 말씀하셨다면, 이것은 농사의 결실 비율과 비교가 되지 않는 많은 수다.
마태는 이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설명한다(마 13:23).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깨닫는 것은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황에 대적했고, 당대 교회의 전통을 타파할 것을 부르짖으면서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적인 전통의 대명사인 장로들의 전통과 바리새인의 율법 실천을 타파하셨다. 사실 전통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고치고 완전히 타파해야 할 것도 있지만, 수정 보완하고 더욱 풍성하게 해야 할 것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쓰고, 그 말씀의 가르침을 전통보다 우위에 놓고 그 말씀을 실천하느냐에 있다.
앞에서 세 토양을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대할 때부터, 이른 시기, 지속되는 시기 동안 사람들이 말씀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착화된 전통 속에 지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과 풍성한 의미를 깨닫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데 그 말씀으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뀌어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와 모진 마음이 필요하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를 어떻게 설명했는지에 주목해보자. 마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설명하고, 누가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표현하며(눅 8:15), 마가는 아주 핵심적인 내용만을 언급하며 “말씀을 듣고 받아 …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라고 설명한다(막 4:20). 들은 말씀을 깨닫는 것 이외에, “지키어 인내하는 것” 그리고 “열매 맺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깨달아 행하는 것도 힘들고, 씨앗이 처한 환경과 관련된 주변의 유혹과 박해를 견디는 인내도 힘들다. 하지만 예수님이 기대하신 것을 충족하려면 둘 다 중요하다. 인내하고 지키고 열매를 맺는 것은 마음 전체를 써야 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좋은 땅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은 앞의 세 땅 중에서 특히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비교하시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질식시키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서 그것을 이기려고 애쓰는 인내가 씨앗이 결실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예수님 당시 그분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 너무도 적었다. 씨앗 4분의 1도 안 되는, 정말로 적은 수였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적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엄청나게 많아진 지금도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다. 명목상의 신자들은 많지만,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다들 사람의 눈치는 보지만 하나님의 눈치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는데, 깨달음이 적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고, 세상에 압도당하면서 말씀이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처지를 보고 있는 신자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힐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기를 요구하는 행함을 강조하는 교훈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에서 행함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열매 맺기를 요구하는 것이 어쩌면 앞에서 인용한 루터의 보리수에 얽힌 이야기처럼, 절대로 진리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적과 같은 일이겠지만, 사실은 진리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말을 오해하여, 그들의 표어를 단순하게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요약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함을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후대 교회가 잃어버린 유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해야 하며, 그것을 잊고 살아왔던 세월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어쩌면, 그분 주위에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주시는 비유일 수도 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의 말씀처럼 말이다. 비록 현재 우리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사람들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사람이 적어 보여도, 이 적은 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커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배수보다 훨씬 많은, 30배 60배 100배나 되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 주님이 한편 열매 맺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도전이면서 다른 한편 좋은 땅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큰 확신의 말씀이다.
2017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