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석(金利錫)은 평양 출생(1914)으로 부친 김치화(金致和), 모친 이득화(李得和)의 4남 3녀 중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평양 종로보통학교, 1933년 평양 광성고보를 졸업했다. 1936년에 연희전문에 입학하였다가 1938년에 중퇴하였다.
대학시절 그는 평양 광성고보 출신들로 이루어진 『단층』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부어(腐魚)」가 입선되기도 했다. 이때의 작품은 신심리주의적 경향으로 파악된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면서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기도 하고, 문예지 편집장, 신문사 기자 등으로 활약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이 때의 단편들은 치밀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 등으로 리얼리즘적 성격을 지닌다. 그는 1957년 단편집 『실비명』으로 아세아문학상을 수상하고, 1964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민국일보에 『흑하(黑河)』(1960년), 한국일보에 『난세비화(亂世飛花)』(1962)를 연재하면서 대중적인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64년 『신홍길동전』을 집필하던 중에 병사(향년 54세)했다.
김이석의 소설경향은 크게 3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단층』 동인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의욕적으로 신심리주의적 경향의 소설을 썼다. 이는 이상(李箱)의 「날개」가 발표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젊은 신인들의 도전적 실험의 한 양상으로 파악된다. 둘째는 단편소설을 통한 리얼리즘의 정착이다. 리얼리즘은 근대소설의 가장 핵심적 요소다. 이 시기에 작가는 소설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로 장편 연재시기를 들 수 있다. 이는 그의 만년의 작품들로서 신문소설의 대중적 속성을 충분히 살린 작품들이다. 소설이 지니는 대중적 속성이 잘 드러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작품적 경향을 참고로 해서 그의 작품을 3분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1. 『단층(斷層)』 동인과 신심리주의 소설
『단층(斷層)』 동인지는 1937년 4월에 창간되어 1938년 3월에 3호로 종간되었다. 단층동인의 인적 구성은 시인 3명과 소설가 8명으로 되었다. 이들이 모두 평양 출신이어서 국토의 분단과 더불어 더 이상의 활동여부를 알지 못한다.
『단층』 동인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국판 고급 모조지를 사용한 호화본으로 100여 페이지에 달했다. 이 동인지에는 동인의 명단과 그 문학적 성격, 창간의 취지, 편집 경향은 물론 심지어는 서문이나 편집 후기까지도 모두 생략되고 다만 작품만이 게재되어 있다. 정확한 동인의 숫자나 그 구성 성분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동인지에 게재된 작품만으로 동인들의 면모를 짐작하게 된다.
단층지에 실린 소설가로는 김이석, 김화청, 이휘창, 김여창, 유항림, 구연묵, 최정익, 김성집 등이고 시인으로는 양운간, 김환민, 김조규 등 3명이다. 3명의 시인은 이미 문단에 등단하여 활동을 한 사람들이고 소설은 김이석만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바 있어서 그가 단층동인의 중심 멤버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의 나이 이때 23세였던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동인들이 20대 전반의 젊은이들로 여겨진다.
동인 중에 황순원과 최명익의 동참여부가 관심이 되고 있다. 황순원(1915)은 오산 숭실중학 출신이고 1935년 『삼사문학』 동인이어서 단층 동인에 가입한 일은 없다고 한다.(필자와의 대담,1988) 그러나 시 한편을 발표한 기억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동인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 『단층』은 특정 동인의 범주를 정하지 않고 발표자를 그대로 동인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명익(1903)의 경우도 특이하다. 최명익은 단층동인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단층』제1집에 실린 평론「DH 로렌스의 한과 자의식」(1936)과 제2집에 실린 소설 「자극의 전말」(1937)은 최정익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지만 작품의 수준으로 보아 최명익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층 동인들의 작품을 좀더 면밀히 살피면 1)문학수준이 비교적 높고 2)동인들의 수준이 고르며 3)대체로 ‘의식의 흐름 소설’을 지향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최재서의 다음 평에서도 드러난다.
“이상의 제 작품들을 통하여 이 일파의 의도는 명백하다. 사회적 양심과 이론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신념에까지 윤리화 시킬 수 없는 인테리의 회의와 고민을 심리분석적으로 그리려는 것이 공통적인 경향이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가 김이석이다. 김이석은 『단층』 1호에 「감정세포의 전복」, 3호에 「환등(幻燈)」이란 작품을 발표한다. 두 작품 모두 동인지 첫 페이지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동인들의 김이석에 대한 예우를 짐작할 수 있다.
「감정세포의 전복」은 나레이터인 ‘나’와 친구인 승우, 그리고 애인인 명애의 애정문제가 중심제재다. 이들은 새로운 의식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의욕을 지니지만 여건의 악화로 소시민의 향락을 추구하며 좌절 속에서 자신을 합리화를 꾀하는 지식인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술과 여자 속에 묻혀 버린다. 「환등」의 경우는 문학청년인 나레이터 ‘나’가 고향 선배인 형재라는 인물을 만나서 그의 꾐에 빠져 요정으로 유곽으로 헤매다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기생 탄연이의 방에서 밤을 새우고 그녀에게 탐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주인공 ‘나’는 부모가 대어주는 학비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고 애정관계로 갈등하며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뜻을 지니고는 있지만 시대적인 한계로 좌절하고 술과 여자(기생)로 도피하는 양상이다. 이들 작품을 신심리주의 경향이라고 보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과 기법에 있다.
일반적으로 심리소설은 도시 지식인의 자의식 세계를 다룬다. 지식인의 복잡한 내면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법에 있어서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다.
“금시에 눈이 핑핑 돌았다. 움직이는 방안 속에 壁, 天井, 이불, 까운, 어둠, 어둠, 燈 …피, 花甁, 畵額, 書架, 바요린, 아다린, 바요린…”(「환등」, 『단층』 3호)
이런 기법은 등장인물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의 과정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즉 어느 특정의 개인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감각, 사고, 기억, 연상 등의 부단한 유동을 빠짐없이 포착하여 기록하려는 기법이다. 이는 이상의 「날개」에서 드러나는 기법과 동질의 것이다.
서술에 있어서도 내면독백의 형태로 이어지며 복잡한 심리의 변화를 추적하는 양상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문장을 길게 늘여서 부단히 흐르는 내면심리를 그대로 표출하고자 한다.
“비누거품 같이 아주 귀한 것 같으면서도 그 실 맹랑하기 짝 없는 것이 세상의 우화라는 것을 일이 지치도록 느껴진 나로서는 다시 우화의 트릭 즉 하나의 진리를 내세우려 아홉의 사실을 우겨댄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수법에 대하야 여론하기를 피하려는 것이요 또한 일 한 곳에서는 아모리 학구적으로 그 우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치밀한 명문장의 학설을 쓴댔자 지루한 하품을 돋아주는 영양분의 효력밖에 없다는 것도 역시 확연한 사실이므로 애써 둔치의 짓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이 가장 쉽게 예를 들어 가령 어항에 든 물고기의 불행을 끔찍이도 생각하야 어항을 깨쳐버렸다는…“ (「환등」의 서두부문)
이 문장은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 두 장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엔 마침표 없는 이런 식의 긴 문장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백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동일한 패턴이다. 이들 단층 동인에 대해서 조연현은 그의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언급한다.
“이러한 신심리주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이상 이외에도 <단층>지의 동인들의 일부도 가졌던 것으로서 이것이 주지주의의 한 계열로 해석되는 것은 그 분석적 해석적 방법은 그것이 그대로 과학적 방법임을 말하는 것이며, 과학적 방법이란 곧 그것이 지성적 방법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김이석이 추구한 신심리주의 소설은 소설의 근대성에서 현대성으로 탈바꿈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로 인식된다. 1910년대 서구에서 제임스조이스의 『율리시즈』 등의 작품이 나왔고 이런 경향을 일본이 전승받은 것이 1920년대였고 우리나라의 경우 1930년대에 이르러 이상, 박태원, 김이석 등에 의해서 실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1910년- 1937년)은 김이석과 거의 동년배이며 그가 「오감도」를 발표하고 <구인회> 멤버(1934년)가 됨으로써 문단적 성가를 얻었지만 그의 소설 「날개」(1936년) 「지주회시」(1936년) 「동해」(1937년) 등의 발표는 김이석과 거의 같은 해에 속하고 작품의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박태원(1909- 1987)의 경우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과 『천변풍경』(1936년)의 발표가 김이석과 거의 동시대라고 볼 수 있다. 김이석은 이미 초등학교 때 동요 「돌배나무」(11세, 1925)를 발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던 경력을 감안할 때 문학적 역량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김이석의 『단층』동인에 발표한 신심리주의 경향의 소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우리의 신심리주의 소설이 이상의 소설에 한정되고 있는 문학사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단편소설과 리얼리즘의 정착
김이석의 단편소설로는 단층지 수록 작품 이외에 1936년 「부어(腐魚>」, 1940년 「공간」 「장어(章魚)」, 1953년 「실비명(失碑銘)」「외뿔소」 파경」「악수」「동면」「소녀 태숙의 이야기」 「분별」 「춘한(春恨)」 「연습곡」 「달과 더불어」 「추운」 「한일(閑日)」 「한풍지대」 「등정」 「아름다운 행렬」, 1956년 「뻐꾸기」 「학춤」 「그와 그 여자와 소년들」, 1958년 「풍속」 「이러한 사랑」 「결혼을 앞두고」, 1959년 「기억」 「청춘 택시」 「여배우」 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그의 단편집 『실비명』(1956년, 청구출판사)과 『동면』(1964년, 민중서관)등에 수록되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제재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30년대 곤고한 시대의 단면을 다룬 경우, 해방 이후의 소시민적인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다룬 경우, 그리고 6․25 전란으로 인한 피해와 1․4 후퇴 이후의 실향민들의 고단한 생활을 다룬 것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소설에 대해서 “따뜻한 애정” “인간미” “치밀한 구성” “착실한 표현”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필치” 등의 말로 평가 되어지고 있다.
1920년대의 단면을 다룬 작품으로 「실비명」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인력거꾼 아버지가 어미 없이 키운 도화라는 딸에 대한 애정을 다루고 있다. 아버지의 희망은 딸을 의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딸은 <긴찌요자>의 여배우로 출연한 일로 학교에서 불량학생으로 퇴학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는 딸을 간호사로 취직을 시켜 꿈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끝내 기생이 된 도화는 아버지의 무덤에 술을 뿌리고 소나무를 북처럼 두들기며 아버지의 생각에 젖는다.
해방 이후의 소시민적 삶을 다룬 작품으로는 「학춤」「뻐꾸기」 등을 들 수 있다. 「학춤」은 늙고 병들어 양노원에 수용된 성구영감이 주위의 비웃음을 감당하며 젊은 시절 자신이 추던 학춤을 자랑한다. 그는 한 때 원각사에서 설중매의 연극과 함께 학춤을 추어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자신의 기예를 옥주라는 제자에게 전수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를 떠나고 말았다. 어느 날 고개 넘어 있는 고아원 애들이 와서 위문 공연을 한다. 이층 강당에서 박수소리 들리며 떠들썩하다. 몸져누웠던 성구영감은 보따리에 간직했던 당목 주의를 찾아 양복 위에 걸쳐 입고 직원의 도움으로 강당으로 올라간다. 무대에 올라선 성구영감은 학춤의 자세를 취하다 그대로 목을 꺾고 쓸어져 죽는다. 학의 최후 같은 몸짓이기도 하다.
「뻐꾸기」는 서술자인 ‘나’의 이야기다. 미국 어느 군수품 용달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미군들의 철수로 실직을 하게 된다. 오랜 실직생활로 곤궁해진 내께 중학교시절 친구가 소개장을 써준다. 서울에서 4백여 리 떨어진 곳에 H발전소 공사판이 있고 미군인 기술자를 잘 아니 찾아가 보라는 것이다. 그가 산골로 찾아가니 X 미인 청부회사 경비원이 그들에게 늦은 시간이라 오늘은 만나기 힘들고 아랫마을에 가서 자고 내일 오란다. 마침 같은 처지의 토니 최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미군부대 잡부로 들어갔다가 요령을 잘 부려 통역을 맡게 된다. 영어는 잘 몰라도 순전히 눈치로 둘러쳐서 요령껏 살아온 인물이다. 마을로 내려와 상점 주인에게 하룻밤을 빌어 자게 되는데 마침 미군과 살림을 차린 여자가 이웃 방에 있게 된다. 그는 술을 시켜 취한 후에 여자방에 가서 술을 마시다 미군에게 들켜 혼줄이 난다. 다음날 다시 경비원에게 가서 사람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서울 올 차비까지 떨어진 나는 트럭을 빌어타고 떠나게 되었는데 토니 최가 손에 찼던 시계를 글러 차비에 보태라며 쫓아온다. 그저 들리는 것은 뻐꾸기 소리뿐이었고 마치 그 소리를 들으려고 찾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6․25의 상처를 다루거나 1․4 피난 이후의 실향민의 어려운 생활을 다룬 작품으로 「파경」「동면」을 들 수 있다. 「파경」은 6․25로 부모를 잃고 외숙에게 의탁하여 살고 있는 숙희의 삶이 다루어지고 있다. 숙희는 미군부대에서 양키들의 화상을 그려주고 생계를 꾸리는 섭이의 끈덕진 구애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섭이가 군에 입대하고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자 시어머니를 모시고 구멍가게로 생계를 꾸린다. 숙희는 돈을 더 벌 욕심으로 다방의 레지로 나가기도 한다. 시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자 숙희는 자립한다. 마담의 도움으로 몇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중의 한 사람의 도움으로 환도 후에 서울에서 다방을 차려 직접 경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포로교환으로 섭이가 돌아오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남편 볼 면목이 없게 된 자신을 깨어진 거울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동면」은 1․4 후퇴 대구 피난시절을 다룬 것으로 연극을 위해 함께 모인 6명이 집단 월남하여 입고 있던 외투를 밥과 바꾸면서 근근히 살아가다가 하나 둘씩 헤어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굶주리며 방황하는 처절한 생활 모습은 김동리의 「밀다원시대」를 방불케 하는 역작이다.
이러한 서술구조를 지닌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소설의 본령인 리얼리즘의 정착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점이다. 1)우선 주인공이 평범한 소시민이다. 「실비명」의 인력거꾼 덕구나 「파경」의 다방 레지인 숙희, 「학춤」의 춤꾼 성구노인, 그리고 「뻐꾸기」의 실직자인 ‘나’는 물론 「동면」의 주인공들이 모두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며 힘들게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2)주제는 이들 소시민들의 좌절의식이다. 딸이 의사가 되기를 소망했던 인력거꾼의 좌절,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새로운 삶의 터를 만들어가던 숙희의 절망, 학춤을 제자에게 전수시키지 못하고 죽는 성구노인, 직장을 구하러 갔다가 사기를 당해 돈만 날리고 마는 ‘나’는 모두 그들의 희망이 좌절된 양태로 끝난다. 이는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참된 이상을 추구하다가 필연적으로 좌절당하고 마는 인생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다. 3)다음은 문체의 사실적 표현이다.
“평양 모란봉 기슭인 진위대 마당에 연년이 시민대운동회를 열던 일도 생각해 보면 이미 삼십여 년 전의 옛일이다. 그때 경기 중에선 장애물 경기가 제일 볼만했지만, 역시 인기의 초점은 마라톤이었다.”
“어디서 우는지 알 수가 없으면서도 나는 안개가 자욱한 산 중턱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뻐꾸기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 멀어지는 뻐꾸기 소리에 귀를 기울여가며, 내가 예까지 왔던 것은 혹시 저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 왔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세를 구기지 않고 서 있던 그는, 주춤하고 학의 걸음으로 두어 걸음 걸어 나가고는 지금까지 광채가 나던 눈이 부드러워지며 팔을 차차 거두기 시작했다. 마치도 학이 벌렸던 날개를 거두듯이, 그러고는 사풋이 주저앉아 목을 두어 번 비꼬고서는 옆으로 약간 누인 채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고즈넉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런 치밀한 묘사와 사실적 서술은 리얼리즘 소설이 지향하는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4)다음은 따뜻한 인간미와 풍부한 유우머를 들 수 있다. 「실비명」에서 덕구가 딸을 인력거에 타라고 하고 딸은 싫다고 싱갱이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딸의 애정이 담뿍 들어난다. 「뻐꾸기」에서의 다음 장면은 웃음 없이는 대할 수 없다.
“위스키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그네들한테 한국 위스키 가지고 카나디안으로 숱해 골려먹었지요. 피엑스에 위스키 떨어지면 우리 보고 위스키를 사다 달래는걸요. 그러면 누가 진짜를 꼬박꼬박 사줘요. 가짜로 먹이지. 하여튼 카나디안 한 병이면 열 병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한국 술이라면 죽는다고 벌벌 떠는 애들이 카나디안 위스키병에만 넣으면 넘버 원이 된단 말요. 그러면서두 한국 술은 하여튼 넘버 텐이라니, 까땜.”
김이석 소설에서 4)구성의 치밀성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특히 작품 표제의 절묘한 설정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적 의도를 엿보게 한다. 「실비명」은 딸이어서 비석에 이름을 새겨놓지 못한 한이 잘 드러나 있고, 「학춤」에서 성구 노인의 죽음의 동작 「파경」에서 산산조각 난 거울의 파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뻐꾸기」에서 취직을 하러 왔다가 뻐꾸기 소리나 들으며 떠나야 하는 처절함 등이 표제 설정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김이석의 소설이 지니는 가장 큰 특성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리얼리즘의 정착이란 소설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점이다. 이는 당대 대부분의 소설이 낭만주의적 한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다. 또한 특정이념을 표방하면서 소설을 이념의 경연장으로 오해했던 일부 소설가의 작품과도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단편소설사에 있어서 김이석의 위상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 장편 『흑하(黑河)』와 『난세비화(亂世飛花)』의 대중성과 오락성
장편 『흑하』는 <민국일보>에 1960년 10월부터 276회에 걸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배경은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하던 순조시절이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당파 싸움이 극심하던 때에 천주교 신자로 박해받은 집안의 아들인 김태근이란 인물이 중심 주인공이다. 김태근은 조정을 뒤엎고자 하는 혁명의 큰 뜻을 지니고 서울로 떠난다. 그는 여로에서 장돌뱅이 유병서, 행수 덕보, 젊은 장사 홍총각, 도둑의 여두목 곱단이, 그 여동생 은실이 등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로 잠입하여 당대의 권세가인 호조판서 김재찬으로부터 거사에 필요한 쌀 천석을 빼앗는다. 그들 일당은 그 쌀을 군자금으로 하여 홍경래의 반란에 참여하게 된다. 작품의 소제목들을 보면 *서울 가는 길, *쫓기는 사람들, *젊은 장사 *진상 봉물 *갈림길 *달과 그림자, *거미줄, *첫 기러기 *모의 *젊은 행렬 *까마귀 *피없는 복수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 소설은 선한인물 중심의 주동적 인물과 악한인물 중심의 반동적 인물간의 대립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김태근을 정점으로 한 선한인물과 김재찬을 정점으로 한 악한 인물의 2분법이다. 또한 흥미를 위해서 여두목의 설정이 특이하다. 이는 윤백남의 『대도전』에서 이미 선 보인 바가 있다. 그 밖에 음모와 배반의 연속, 진실된 사랑의 추구, 탐관오리의 발호와 징치. 뛰어난 무술과 재능 등은 무협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양상이기도 하다.
사건은 곱단이를 중심한 도둑들이 임금의 생일을 맞아 서울로 올라가는 봉물짐을 탈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도둑이 된 자들은 대부분 천주교도로서 핍박을 받아 집안이 몰락한 양반가문이거나 아니면 재산을 수탈당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된 농민들이다. 김태근은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잘못된 나라를 뒤엎고자 하는 혁명의 뜻을 품고 투쟁의 대열에 들어선다.
이에 비해서 반동적 인물의 정점은 김태근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김재찬이다. 그는 재상가의 아들로 현재는 호조판서의 직임에 있다. 재찬의 부친 김익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천주교 학살 때 피해를 당한 집안의 재산을 맡아 두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나중에 배반하고 재산을 가로챈 인물이다. 재찬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기득권을 누리며 파당을 지어 음모와 모략으로 꾸준히 재산과 권세를 늘려가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주동인물인 김태근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반동인물인 김재찬(호조판서)과 그 일파와의 쟁투가 사건의 핵심이다. 여기서 김태근의 활략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작가는 중도적 인물의 설정을 염두에 둔듯하다. 저항의 중심 세력은 곱단이를 중심한 도둑과 그들에 동조하고 있는 양민들이다. 여기서 여두목의 설정과 무당 생신님의 설정이 특이하다. 점을 잘 친다고 소문난 생신님은 복수의 인물인데 애기무당과 곱단이, 은실이, 옥담이다. 이들은 가면을 쓰고 동일 인물인 것처럼 행세한다. 생신님이 점과 굿이라는 방법으로 민심을 얻고 여두목을 따르는 도둑의 집단이 힘을 실천한다.
장편 『난세비화(亂世飛花)』(1962년, <한국일보>에 연재)도 『흑하』와 유사한 구조다. 이 작품은 연산군 폭정시기에 대립되는 두 인물을 중심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일오(一吾)라는 호를 지닌 김필갑은 유학자 김종직의 아우의 서자다. 그는 지식도 쌓고 검술도 익힌 늠름한 사나이다. 그는 출세에는 뜻이 없고 황음무도한 연산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에 비하여 청담(淸潭)이란 호를 지닌 남섭은 남효온의 후손이다. 그도 검술에 능했지만 일오와는 달리 어떻게 하든 출세해서 자기의 천하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에 넘친다. 그리하여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여자들을 농락하면서 야심을 성취하고자 하는 책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중국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일오라는 인물의 경이적인 무용과 초인적 능력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그러면서 여두목의 설정이라든지 포교와의 싸움, 당대 세도가의 개입, 권모술수, 남녀간의 사랑, 탁월한 재능 등으로 무혐소설의 양상이 된다.
이들 소설은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있다. 재미로서의 이야기에 더 치중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소설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즉, 단편소설의 경우는 인간 삶의 성찰이라는 리얼리즘적 영역을 의식한 것이지만, 장편의 경우는 특히 신문연재소설의 경우는 재미와 즐김의 스토리, 즉 대중성과 오락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하여 1)우연성 내지는 돌발성이 작품 서술의 중심이 되고. 2)남녀간의 연애가 사건의 핵심이 되며, 3)모험과 위기의 연속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소설을 로망스적 특성이 되게 한다. 4)그리고 김이석의 경우 소설의 배경을 역사적인 특정시기로 정하여 역사소설 장르의 성격이 되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실고증(史實考證) 위주의 박종화의 소설경향 보다는 천재적 개인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김동인의 『젊은 그들』의 유형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에 유행되던 <물어(物語)>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대해서 정창범은 다음 같이 평한 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난세비화』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단편에서 보인 농축한 구성력이 여기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신문 연재인 탓도 있겠으나 지나치게 스토리 전개에 치중한 나머지 도리어 구성이 산만해졌다. 뿐만 아니라 역사소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해야 할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소홀하고 과거의 풍속․ 용어를 도외시한 채 현대소설을 써나가듯이 작품을 전개했다.”
정창범은 이어서 이 작품의 특성으로 1)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 2) 영웅 중심에서 역사상의 대중, 상민 중심의 서술을 들었다. 특히 역사의 그늘에 숨어살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크로즈업시켜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했다.
김이석의 신문연재소설이 지니는 구성적, 또는 표현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작품이 당대의 독자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는 점이다. 대중적인 독자들은 소설의 문학성보다도 오락성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고, 여가를 즐기며, 단조로움에서 탈출하려는 심리의 드러남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전기소설이 파한(破閑)의 요소에 치우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런 점에서 김이석의 장편소설이 지니는 대중성과 오락성의 가치에 대해서 재검토해 볼만 하다.
소설은 시나 희곡에 대응해서 대중적인 부르조아를 상대로 탄생된 문학 장르다. 그런 점에서 장편소설의 대중성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매체들, 영화, TV 연속극, 또는 컴퓨터 게임, 그리고 팝송 등이 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비하여 우리의 소설문학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음은 대중적인 기반을 점차로 잃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설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김이석의 장편이 지닌 대중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김이석은 문단 데뷔기에 『단층』 동인으로서 신심리주의 소설을 시도하여 소설의 근대성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단편소설을 통하여 근대소설의 본령인 리얼리즘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유행적 이념이나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리얼리즘의 방법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장편소설에 있어서는 흥미 위주의 대중성에 치우쳤다. 신문의 독자들을 의식한 이런 대중성 내지 통속성은 소설이 지니는 파한적(破閑的) 요소로서 오늘날 대중문화 시대엔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겠다.(*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