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시인들의 내용 없는 요설, 언어의 발작, 광란에 질려버린 이들에게 그의 시는 깊고 따뜻한 위안과 평화를 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에 어느 순간 박하향처럼 싸하게 그의 시로부터 건너온 쓸쓸함이 번진다. 세상의 변경으로 물러앉아 시를 쓰거나 석판화를 새기며 세상의 외풍을 묵묵히 견디는 그의 시는 온갖 소음과 현란한 간판들에 점령당한 도시 한복판에서 찾은 ‘고요의 정원’이다.
막막한 실존의 불안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꾸 뒤처지고 있다는 인식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 젊은 시인들인가 하면 그들은 세계를 비출 수 있는, 아직 먼지나 얼룩이 덜 낀 깨끗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이라고 누구나 다 세계를 비춰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몸으로 비추려면 우선 세계를 바라보는 순진한 눈이 있어야 한다. 젊은 시인 중에는 허명을 얻고 나서 이미 상투성의 늪으로 굴러 떨어진 이들도 없지 않다.
휠터 여과 마음의 체로
장석남의 「들판이 나를 불러」 · 「저녁해가 지다 말고」 · 「망국(亡國)을 가면」과 같은 짧은 시들을 읽으며 우리는 순진한 눈을 지닌 1990년대의 새로운 시적 개성의 천진한 개화를 예감하게 된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러 집 나온 / 들꽃들”, “노을을 헤쳐가는 새들”, “내 뿌리 근처에 내려와 속닥거리”는 “어둠”, “어둠에 뒹굴다 별이 되”는 “발소리”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를 저문 봄 들판에 데려가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는 “숨가쁨이 삶이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글썽임이 아니라면”, 저런 것이 아름답겠는가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 물음 속에서 봄 들판에 매혹되어 부풀어오른 시인의 영혼은 우리의 마음에도 고스란히 전염된다(「들판이 나를 불러」). “저녁해가 지다 말고 / 내 얼굴에 왔다”와 같은 평범한 시행도 그 날카로운 감각적 환기력 때문에 빛난다. 다음 시행인 “얼굴을 버리고 놀다보면 / 저녁해를 비끼는 / 새도 될 수 있으련만”은 어느 결에 우리를 땅에 발을 딛고 서서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꿈과 자유로 충만한 억압 없는 세계 속으로 이끌어간다.
우리의 마음은 크게 흔들린다. 어린 시절이 아니면 누가 얼굴을 버릴 정도로 놀이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 그 몰입 속에서는 누구나 다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법이다(「저녁해가 지다 말고」). 그가 쓰는 모국어에는 우리만 맡을 수 있는 바람과 노을의 냄새가 묻어 있다. 이런 것이 그가 뛰어난 시인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는 또 불필요하게 말을 비틀거나 구부리지 않고도 삶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빈집들 속에 빈집으로 걸어들어가 / 쪼그려 잠들면 / 만발하는 고통아 잎 넓은 한 그루의 애인아” 같은 시행을 보라(「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바람에 흔들리러 집 나온 / 들꽃들을 보겠네. / 봄 들판이 나를 불러 그것들을 보여주네 갑자기 저, / 노을을 헤쳐가는 새들 / 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네 숨가쁨이 삶이 아니라면 / 온 들판 저 노을이 새들을 끌고 내려와 덮인들 / 아름답겠나 // 봄은 / 참았던 말들 다 데려다 어디서 어디까지 웅얼대는 걸까 / 울컥 / 떠오르는 꽃 한 송이가 온 / 세상 흔드는 것 보겠네 // 오래 서 있으면 뿌리가 아프고 / 어둠은 어느새 내 뿌리 근처에 내려와 속닥거리고 / 내 발소리 어둠에 뒹굴다 별이 / 되면 거기 / 내 뿌리가 하얗게 글썽임에 젖고 있네 / 살아 있는 것이 글썽임이 아니라면 온 / 하늘 별로 채워진들 / 아름답겠나 그렇게 봄 / 들판은 나를 불러 봄 들판이게 하고
장석남, 「들판이 나를 불러」,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장석남의 상상력은 물활론적(物活論的)이다. 장석남의 물활론은 발로 기어다니거나 돌아다니는 동물보다 한 군데 뿌리를 내리고 붙박이로 서 있는 식물에 더 민감하게 작용하는 물활론이다. 자연에 대한 친화는 시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의 원초적 세계 체험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들판이 나를 불러」는 주체의 판단에 따라 들판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들판이 그를 불러 거기까지 나간 것이라고 말한다. 들판은 우주이며,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숨결과 활력으로 충만한 원초적인 터전이고, 억압 없는 세계의 자유와 해탈의 표상이기도 하다. 시적 자아는 자연과 서로 내밀하게 열려 있으며, 의사 소통하고 있다. 들판은 시적 자아에게 바람에 흔들리러 집 나온 들꽃들, 노을을 헤쳐가는 새들을 보여준다. 삶의 숨가쁨은 시적 자아로 하여금 들판의 세계의 그 모든 생명 있는 것의 몸짓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꽃들의 흔들림, 새들의 날아감, 이 모든 것은 우주 속에 깃들여 사는 생명의 운동을 보여주며, 동시에 생명의 살아 있음은 우주 속에 가득 차 있는 숨가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우주는 생명으로 충만해 있으며, 동시에 생명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 “뜰의 눈인 꽃”(「나는 뜰을 안고」), “만발하는 고통아 잎 넓은 한 그루의 애인아”, “늙은 산의 울음 소리 들리고”(「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 “밀물과 썰물이 몸 섞으며 웅성대던”(「해변의 묘지」)과 같은 시구들을 보면 그것은 한결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뜰은 그냥 뜰이 아니라 눈을 갖고 있는 뜰이다.
장석남의 물활론적 상상력은 우주 가득히 생명 있는 것을 풀어놓는다. 풀어놓을 뿐 아니라 그런 것과 두런두런 말을 나눈다. 우주 속에 깃들여 사는 온갖 것의 숨결과 고달픔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한없이 따뜻한 생명 긍정의 관조와 통한다. 그 따뜻함은 눈물겹다.
장석남의 따뜻함은 우연히 획득된 것이 아니다. 그 따뜻함은 지난 연대의, 저 찢김과 죽음의 연대의 음산하고 피비린내나는 죽임의 문화에 알게 모르게 감염된 내면의 독성과 부정을 맑게 걸러낸 뒤에 획득된 것이다. 시적 자아는 들판에 “오래 서 있으면 뿌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시적 자아 역시 들판에 서 있는 들꽃과 같이 ‘뿌리’를 갖고 있으며, 뿌리를 가진 식물조차 살아감의 고달픔을 예민하게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들판에 나가 한 그루의 식물로 뿌리를 내리고 선다는 상상력은 언뜻 범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내 뿌리가 하얗게 글썽임에 젖고 있네”와 같은 시구는 그 범박함을 갑자기 어떤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다. 다시 한 번 시인은 “살아 있는 것이 글썽임이 아니라면 온 / 하늘 별로 채워진들 / 아름답겠나”라고 묻는다.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 살아냄은 숨가쁨이며, 동시에 글썽임인 것이다. 장석남의 시 세계는 우주에 깃들인 생명성을 참 맑게 비춘다.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 싹이 돋아 문득 /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 해와 달에도 겸하여 /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 무릎 펴고 일어나며 / 일생(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 그 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 그러한 작고 간절한 일생(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 이 애기들 앞에서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젖은 눈』(솔, 1998)
‘순진한 눈’의 시인 장석남의 세 번째 시집 〈젖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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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의 시는 “잠시 지나치는 것, 삭아가는 것, 해살거리는 봄빛, 사라지는 잔광(殘光), 여린 무늬나 잔잔한 물결, 달님, 아지랑이, 빗소리, 꽃 진 자리, 뱃고동 소리, 멧새가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 같은 것의 목록이다. 시인은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는 이런 것을 일일이 챙겨 가슴에 담고 있다가 고요한 순간에 꺼내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달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