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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통치하의 유대인(주전 63-주후135)
유다에 대한 로마의 통치기간은 주전 63년에 시작하여 로마의 황제 Hadrian(A.D. 76-138)이 유대인의 생활을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기간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파괴에서 끝이 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당시 로마가 제시한 법률에 굴복하여 순종하는 한, 그들은 정상이 참작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며, 산헤드린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열심당(the Zelots)이란 극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여러차레 반란을 일으켰다.
주전 49년에 씨저와 폼페이의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폼페이가 48년에 패할 때까지 Aristobulus 2세(67-63 B.C)(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와 그의 아들은 씨저(100?-44 B.C.)의 편을 들었다. Aristobulus 2세는 씨저가 제공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향길에 불행히 독살당했다. 주전 44년에 씨저가 살해된 뒤에 Brutus(85?-42 B.C.), Cassius(?-42 b.c.), Mark Antony(83?-30b.c.), Augustus Octavian(63-B.C.-A.D.14)의 쟁투가 벌어졌다.
로마통치하의 유대인의 역사(다섯으로 구분)
| (1) 이두매 왕조, |
| (2) 첫 지방 총독, |
| (3) Agrippa 1 세의 통치, |
| (4) 두번째 지방 총독, |
| (5) 유대인의 반란. |
1. 이두매(에돔) 왕조 (B.C. 63-A.D.6)
푸톨레미 왕당파에 속하였던 Antipater(헤롯왕의 아버지)가 씨저의 동맹국 버가모의 미트라타테스의 군사횡단을 협조하여 씨저의 호의를 얻게 되었다. 씨저는 힐카누스 2세의 대제사장직임을 보류하는 반면에 이두매의 왕인 Antipater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에 임명하였다.
안티파터는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한 뒤에 그의 아들인 파사엘과 헤롯에게 고위직을 맡겼다. 파사엘은 유대의 군대장이 되였고, 헤롯은 갈릴리지방의 분봉왕((Tetrach)으로 삼았다. 안티파터는 로마에 충성함과 동시에 유대에 정치적 국내적 이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매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호의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 갈릴리의 분봉왕이 된 헤롯은 갈릴리를 횡단하는 일당의 도둑때를 분쇄하고 처형한 결과 산헤드린에서는 그를 직권남용이라고 산헤드린에 출두명령을 내렸으나, 헤롯은 이에 불복하고 한 때 자기를 코엘레-수리아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던 Sextus Caesar에게 탄원하였다.
Julius Caesar이 암살된 후 Cassius는 수리아로 가서 스스로 총독으로 자처하며 경제와 군사를 모았다. 이때에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파사엘과 헤롯)은 카시우스를 적극 협조하여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때에 카시우스는 헤롯을 수리아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하고, 장차 유대의 왕위까지도 약속을 하였다.
주전 43년 안티파터는 말리쿠스라는 열심당의 한사람에 의해서 독살되고, 헤롯은 즉시 그의 대권을 발동하여 말리쿠스를 처단하였다. 안티파터가 살해된 후 유다 땅은 그의 첫아들 파사엘에게 넘겨졌고, 헤롯은 갈릴리를 통치하게 되었다.
주전 42년에, 옥타비안과 안토니는 빌립보 전투에서 카시우스와 브르투스를 참패시켜, 안토니가 아시아를 통치하기 위하여 등장했을 때에, 헤롯은 즉시 뇌물로 그의 환심을 얻어냈다. 그 결과 안토니는 헤롯과 파사엘을 유대의 협동 분봉왕으로 임명하고, 힐카누스 2세는 계속하여 대제사장으로만 봉직케하였다.
그러나 알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Antigonus는 Parthian의35)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Pasael은 체포되자 자결하였고, 헤롯은 대적의 눈을 피하여 로마로 망명하여, 안토니에게 알리스토불루스 2세를 유다의 왕을 삼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안토니는 하스몬 왕조를 신뢰하지 않은 까닭으로 원로원의 제가를 얻어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았다. 이 일은 주전 4년의 일이며 그후 3년만에 그는 예루살렘을 재 탈환하였다. 그리고 할당된 영토를 차지 하였다.
2. 헤롯 대왕
헤롯은 Parthian 사람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즉시 바벨론의 Hananiel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헤롯은 하스몬가의 후손인 Mariamne 1세(힐카누스 2세의 손녀딸)와 결혼하여 왕권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였다. 마리암네의 모친, 알렉산드라는 하스몬家 사람이 아닌 제사장이 대제사장의 자리를 점유한데 대해서 분개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하여 안토니로 하여금 헤롯에게 압력을 가하여 Hananiel을 해임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일은 성공을 거두어 힐카누스 2세의 손자인 알리스토불루스(3세)가 대제사장으로 임명이 되었으나,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리스토불루스는 헤롯에게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어 결국은 헤롯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헤롯은 그의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안티고누스(알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제거되었다. 노령의 힐카누스 2세는 살해되고, 헤롯의 아름다운 부인이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던 마리암네 1세(하스몬가의 알렉산드로 여왕의 증손녀)는 헤롯의 여동생인 살로메(마리암네 2세의 손녀)에게 불충하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일대의 숙청작업이 끝난 후에 헤롯은 불필요한 전쟁을 삼가고 국가재건을 위해 몰두하였다. 많은 도시에 건물이 들어섰다. 그는 주전 20-19년 사이에 스룹바벨의 성전이 신도시 건축물에 비하여 너무도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재건에 착수하였다. 사마리아와 가이사랴 지방에도 많은 성음들이 재건되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참으로 대중은 이렇게 세파에 흘러가기 마련이다).
11년간 헤롯은 안정을 누렸으나, 그의 치세중 마지막 10년간(B.C.14-4), 가족간에는 정권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리스도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인 Mariamne는 마카비 왕가의 공주였으며 헤롯이 가장 사랑하였던 부인이었으나, 헤롯의 장모인 Kypros와 그의 여동생이며 이두매인을 대표하는 Salome가 하스몬 왕조를 대변하는 알렉산드라(마리암네의 모친)와 마리암네를 미워하여 흉계를 꾸몄다. 그리하여 헤롯은 사랑하는 마리암네를 처형하게 되었다. 얼마후에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 헤롯은 또 다른 피바람을 일으켰고, 로마의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헤롯의 자녀가 되기 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낳다." 그의 아들 가운데 3명이 처형되었고, 헤롯은 불치의 병으로 더욱 심성이 강퍅해져서 많은 잔인한 행동과 살인극을 벌렸다. 그의 통치 말년에 있었던 일 가운에 가장 가혹한 일은 주전 6년이나 5년으로 추정되는 벧들레헴의 어린 아이 살해사건을 들 수 있다.
헤롯은 34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주전 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지를 따라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는데, Archelaus (3)는 유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포함)의 왕으로, Herod Antipas(4)는 갈릴리와 뵈뢰아의 분봉왕으로,36) Herod Philip(2)은 트라코니터스와 인근 지역의 분봉왕으로 세웠다. 이러한 조치는 반드시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로마는 어느 왕도 세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 형제는 모두 인준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야만 했다.
3. 아르겔라우스(Archelaus)(3)(헤롯의 장남)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유대인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여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갔고, 그가 자기 일로 로마에 가기 전, 유월절에 모여든 유대인 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유대인 3000명을 학살하였다.
그는 두번에 걸쳐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기가 직접 직접 야만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대제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10년간에 걸친 유대인의 반란에 의해 로마 정권은 그를 Gaul지방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유대는 이어서 코포니우스(Coponius) 출신의 총독을 맞아드리게 되었다(A.D.6-9).
4. 헤롯 안티파스(Antipas)(4)(차남)
갈릴리와 뵈뢰아 지방의 분봉왕이다. 그의 통치는 그의 형에 비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건축사업을 벌렸고, 국방을 견고히 하였다. 그는 신약의 세례요한과 관련이 있다. 헤로디아와의37) 불법적인 결혼은 세례요한의 분노를 샀으며, 요한은 이로 인하여 순교를 당했다.
안티파스는 빌라도가 성 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을 보낸 헤롯과 동일인으로 본다(눅 23:7-12).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쿨라(Caliqula)에게 왕의 칭호를 다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안티파스는 그 청원을 윤허(允許)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였다.
5. 빌립(Philip) (헤롯대왕의 셋째)(5)
그는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의 아들 가운데 그는 단연코 최상의 통치자였다. (서열이 낮아질수록 나아진다.)
그는 신약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바리세인의 위협이 있을 때에 빌립이 다스리는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고 적혀 있다.
6. 헤롯 아그립바 1세(6) (A.D. 41-44)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에 왕위를 박탈당하여 Gaul로 추방당한 후, 아그립바 1세가 계승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로마에서 사치와 방종으로 지냈다. 그는 중년에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남부 팔레스틴의 구석진 곳에 피신하였었다. 한 때는 파산과 극심한 빈곤으로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그의 신실한 아내의 설득으로 생명을 구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다시 로마로 가서 그의 체권자들에게 몸을 숨기는 데 성공하였다. 로마에서 그는 Tiberius 황제의 양자인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의 친구가 되고자 하였다. 어느날 가이우스와 함께 마차를 탄 자리에서, "만일 황제가 죽으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말을 전해듣고 아그립바 1세를 투옥하였다. 티베리우스가 A.D. 37년에 죽자, 칼리굴라가 계승하자, 아그립바는 옥에서 풀려나고 그는 칼리굴라의 총애를 입어, A.D. 39년에 왕으로 재 임명되었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빌립의 분봉국(Tetarchy)을 떼어 받았으며, 얼마후 유다와 이두매와 사마리아까지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에도 수년간 기다리다가 그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그는 4년간 매우 성공적인 정치를 했다. 그는 유대인, 특히 바리세인의 지지를 받았다. 행 12에 보면, 그는 유대인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를 핍박하였고, 요한의 동생 야고보를 죽였으며, 베드로까지 죽이려 했으나 이제는 기독교인의 눈치를 보느라고 베드로를 당장 죽이지 못했다. 칼리굴라(로마 황제)가 자기의 동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우고자 한 것을 그가 저지함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헬레니즘의 숭배자이었으며, 로마적 향락에 탐닉된 사람이었다. 그는 심각한 질병으로 A.D. 44년에 사망하였다.
7. 헤롯 아그립바 2세(7)
아그립바 7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아버지의 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후에 레바논 지방의 Cholchis 지방을 분배받았고, 다시 그후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빌립의 이전 분봉국을 얻었다. 그는 네로에 의하여 갈릴리의 여러 곳과 뵈뢰아의 유리아스란 도시를 다스리게 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24:13-26-32에서 그가 바울의 재판에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에 유대전쟁이 발발하였다(A.D. 66-70) 그는 A.D. 100년까지 살았다.
8. 유다의 종식을 고하는 직전의 로마의 총독들은 모두 일곱명이였다(A.D. 44-66 사이). Fadus(A.D. 44-48), Alexander, Cumanus(A.D.48-52), * Felix(A.D. 52-60), *Festus(A.D.60-62), Albinus, Florus.(* 표를 한 총독이 성경과 관련이 있다).
베릭스(Felix)는 유대인을 다루는데 전임자들 보다도 더 혹독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의 Sicarii(단검을 찬자)로 알려진 유격대로 인하여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항거의 바람이 조장되어 갔다. 또 메시야의 출현 운동이 일기도 했다(행 21:38절 참조). 사도행전 24장에는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 그후에 베스도의 통치기간(A.D.60-62)에 유대인의 처지는 많이 호전되었으나, 그가 유대인을 다스릴 능력이 더 없었기 때문에 곧 소환되었다.
A.D.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끊기지 않았으며, 로마는 대대적이고 피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9. 유대인의 반란
열심당의 충동으로 유대인은 로마와 로마적인 것에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유대인은 열심당에 의하여 살해되어가고 있었다. 로마에 대한 혁명운동은 Florus 총독 때이다(A.D. 66). 동기는 풀로루스가 성전의 보물 창고에서 얼마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은 이에 크게 격분하여 로마의 멍에를 벗어야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격분을 진정시키려고 시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수리아의 총독, Cecitus Gallus가 이를 진압할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개입하였으나 패배하고, 극히 수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로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혁명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그리고 동족(유대인)들의 혁명적 행동이 무익하다고 주장하던 평화주의자들에게까지도 동의를 얻어내는 데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 이 시기에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가 갈릴리 지방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의 반란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화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팔레스틴의 여러 지방의 군사적 지도자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로마는 뛰어난 그들의 장군 Vespasian을 팔레스틴으로 파송하였다. 일년 사이에 대부분의 요새들이 무너지고 Vsepasian은 예루살렘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바로 Nero가 죽었기 때문에, Vespasian은 그가 황제로 취임하기 위하여 급히 로마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 즉 그들의 전력을 보강할 기회에 유대인들은 내란을 겪고 있었다. Vespasian의 아들, Titus는 부친의 후임으로 4개 군단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서 다시 출정하였다. 예루살렘은 5개월만에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무너지고 수십만의 백성이 살해되고, 포로가 되었다. 이때에 최후의 항쟁을 벌린 마사다의 결전을 역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마사다란 히브리 말로 산성(Mountain fortress)란 뜻이다. 엔게디에서 사해를 끼고 남쪽으로 16Km정도 다리면 난공불락의 바위요새가 나온다. 유대인의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마사다(Masada)이다.
성경엔 한 차례의 언급도 없는 이곳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지로 부각 된 것은 유대인 학자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해서 이다.
주후 66년 예루살렘에선 로마에 저항하는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성은 물론 성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성에서 쫓아냈다. 이때 엘리아살 벤 야일의 지도하에 약 1천명이 마사다로 모여들어 최후 항쟁을 벌였다. 로마군은 총 공격을 퍼부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렇게 하기를 3년, 마침내 로마군은 성 밖에 흑담을 쌓아 겨우 함락했다.
요세프스의 "유대인의 전쟁사"에 의하면 함락 직전, 주후 73년, 곡식창고에 불을 지르고 거주하던 9배60명 전원이 자결을 했다. 항복 보다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곳을 점거한 로마군은 곡식 창고와 물탱크를 보고 "우리가 졌다"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이 생생한 역사는 헛간에 숨어 목숨을 부지한 두명의 부녀자와 다섯 명의 어린이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 요새화된 것은 마카비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대제사장 요나단에 의해서 이다. 그후 헤롯에 의해 왕궁이 세워지고 1천 4백50m의 성벽이 축조되는 한편 각종 창고와 급수시설 로마식 목욕탕까지 완비되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
로마군에 의해 폐허가 된 후 비잔틴시대엔 수도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으나 역시 모슬렘에 의해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마사다 요새는 사해 면에서 4백50m의 장방형의 절벽이다. 정상은 운동장과 같이 평평하다.
이스라엘독립이후 성지로 발굴되어 정상까지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훈련 중 최종 코스로 이곳에 올라 "이 비극은 다시 없을 것이다. Masada will not fall again"를 서약하며, 소리친다. Israeli Army recruits go there to swear an orth that "Masada
will not fall again."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의 주체성을 상실한 결과가 되었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 그들의 중심지는 그들이 이전부터 다수의 지도적 랍비들이 피신하였던 Yamnia로 옮겨갔다.
이후에도 2번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첫째는 A.D. 115-117년에 구레네(Cyrene), 애굽, 구브로(Cyprus),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나, 트라얀 황제는 상당한 살육을 감행하여 이것을 진압하였다. 다른 하나는 A.D.132-135년에 바르 호흐바(Bar Kochba), 또는 바르 코지바(Bar Koziba)가 유대인에게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트라얀 황제는 이 반란을 철저하게 분쇄하였고, 오히려 팔레스틴에 분산하여 잔존한 유대인들을 궤멸하였다. 그리고 로마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제한 조치를 내렸다.
이때부터 팔레스틴에 이교도가 번영하였고,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1948년 유엔에 의하여 독립될 때까지 종식되고 있었다.
========== 주
31) "디베리오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헤롯이 갈릴리의 분볻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안나스와 가야바가 재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32) "그 때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행 12:1,2)...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33) 요세푸스의 유대사(Antiq), XVIII.v.4).
34) 그는 쿠마누스(Cumanus)의 뒤를 이은 유다의 행정관이였다(A.D. 52-62). 그의 언급은 행 23:24-24:27에 있다.
35) 북부 이란에 살던 민족.
36) 분봉왕이란 한 나라를 넷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통치하는 왕이다. 로마인들은 반드시 넷으로 나누지 않드라도 분활된 한 왕국의 지배자나 혹은 왕에 버금가는 주권자에게는 이를 적용하였다. 헤롯이 죽고난 후에 그의 아들들에게 이를 적용한 것이다.
37) 헤롯 대왕의 손녀인데, 저의 삼촌 헤롯 빌립과 결혼하였다(막6:17). 후에 그녀는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이 불의의 결혼이 세례 요한을 죽게했다(마14:3-12, 막 6:17-28, 눅3:19).
출처: 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