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원래 생각을 잘 못한다. 컵의 앞면을 보여주고 뒷면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그리지 못한다. 뒷면은 앞면의 반대다. 그냥 반대로 그리면 되는데 그것을 못한다. 앞과 뒤는 대칭된다. 좌우, 상하, 전후, 내외, 원근은 대칭된다. 대칭만 살살 따라가도 생각은 풍성해진다. 그런데 못한다. 숨은 대칭을 찾아내지 못한다. 넌센스 퀴즈와 같다. 질문이 넌센스 퀴즈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힌트가 된다. 정답을 맞출 확률은 극적으로 높아진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넌센스 퀴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넌센스 퀴즈는 어떤 대칭을 제시하고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며 압박하는 방법으로 배후에 숨은 대칭을 찾아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사건에는 층위가 있다. 대칭 속에 또다른 대칭이 숨어 있다. 이 사실을 알기만 해도 사유의 지평은 크게 확대된다. 대칭은 선 위에서 서로 마주본다. 선에서, 면으로, 입체로, 질량으로 도약하기만 해도 사유의 폭은 크게 확대된다. 그만큼 시야가 넓어진다. 생각한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것이다. 분류는 칼로 도마 위의 생선을 내려치는 것과 같다. 구분지로 구분대상을 때린다. 단 방향과 순서를 알아야 한다. 결따라 가야 한다. 넓은 데서 시작하고 좁혀가는 방법으로 칼질을 해야 한다. 본질에서 현상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야 한다. 큰 것을 먼저 하고 작은 것을 나중 해야 한다. 그래야 제자리에서 맴돌지 않고, 귀퉁이에서 헤매지 않고,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핵심을 추려낼 수 있다. 문제는 자기도 모르게 좁은 구석으로 가는 쏠림현상이다. 어쩌다 한 번 구석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좁은 섬에 갇혀서 그게 우주 전체라고 착각한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계속 잘못된다. 잘못된 습관을 들이게 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생각을 넓혀간다.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뛰어다니며 활동적인 사람이 더 많은 생각을 얻는다. 청년은 투쟁을 통해 생각을 심화시킨다. 피아구분을 통해 생각의 깊이를 더해간다. 외부를 닫아걸고 내부를 압축하되 사방에서 조여들면 공중으로 도약할 밖에. 더 높은 층위에 이르게 된다. 성인이 되면 퇴행한다. 활동을 늘리는 것보다 더 독해지는게 적은 비용으로 많은 성과를 올린다. 가성비가 좋은 것이다. 남을 추궁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쥐어짠다. 일본만화 진격의 거인처럼 삼중성벽을 쌓고 자신을 방어하며 상대를 홈으로 유인하려고 한다. 성벽 밖의 넓은 세계로 나가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러면서 점점 코너로 들어간다. 원심분리기에 의해 자신이 분리되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 전체 판도가 100이라면 100의 넓은 공간을 활용하지 않고 1의 공간만으로 승부를 내려고 한다. 악독해지면 일시적으로 사유가 늘어난다. 더 많은 차별, 더 강한 혐오, 더 거친 괴롭힘, 더 심한 압박으로 더 많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만 하면 소설을 100 페이지 쓸 수 있다. 평소에 한 줄을 못 쓰던 사람이 조선족을 증오하기만 하면 갑자기 상상력이 폭발해서 하룻밤 사이에 백 가지 거짓말을 지어낸다. 한 마디도 못하던 사람이 지구평면설 음모론을 추종하기만 하면 갑자기 달변가로 거듭난다. 환빠들은 말이 많다. 원래 말을 못하던 사람이 환빠가 되자 말문이 트여서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사이비 종교집단에 들기만 하면 대단히 뻔뻔스러워져서 낯선 사람에게도 대담하게 말을 걸 수 있다.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그럴 때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나와주기 때문이다. 긴장되고 흥분되고 설레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업되는 것이다. 그 쾌감에 중독된다. 긍정보다 부정이, 찬성보다 반대가, 도움보다 훼방이, 공격보다 수비가, 능동보다 수동이, 대안제시보다 이죽거리고 빈정거리는 방법이 더 쉽게 생각의 대량생산에 성공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해 간다. 자신을 점점 나무의 가지 끝으로 몰고 간다. 더 나아갈 곳이 없으면 거기서 말라죽는다. 생각해야 산다. 구석에 숨지 말고 넓은 광장으로 걸어나와야 한다. 차별과 혐오라는 좁은 구석의 틈바구니에 낑겨서 자신을 쥐어짜지 말고 천하를 쥐어짜야 한다. 고립을 탈피하여 더 많은 외부와의 연결망을 가져야 한다. 생각은 분류다. 분류는 쥐어짜는 것이다. 원심분리기를 돌리는 것이다. 탈수기에 넣고 돌리되 버튼을 1단, 2단, 3단으로 올릴때마다 다양한 칼라의 아이디어가 나와준다. 남을 탈수기에 집어넣고 돌려야 하는데 자신이 탈수기에 기어들어가서 돌고 있는게 인간의 병폐다. 그 속에서 쥐어짜기를 당하는 자신의 다양한 비명소리를 풍성한 아이디어로 착각한다. 구조론은 사건으로 분류한다. 역시 쥐어짜는 것이다. 사물의 관점에서 사건의 관점으로 도약하는 순간 사유가 폭발한다. 한 가지 주제를 던져주면 남이 서너가지를 말할 때 백가지를 말할 수 있다. 사물은 공간에 머물러 있다. 사건은 시간을 타고 여행한다. 사물은 제 자리에 머물러 있으므로 할말이 별로 없고 사건은 함께 여행을 떠나므로 할 이야기가 풍성하다. 여행자는 원래 말이 많다. 좁은 구석에 숨어서 철벽으로 방어하며 차별과 혐오로 자신을 쥐어짜는 것도 사유를 늘려가는 하나의 테크닉이 되지만 그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멀리 신세계로 여행을 떠나면서 천하의 다양한 면면들과 만나 온갖 소스를 조달하느니만 못하다.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개소리가 틀렸음을 일일이 지적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래봤자 내 입만 피곤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개집에 숨어서 짖어대는 개와 다르지 않다는 거다. 개가 시끄럽게 짖는 이유는 목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목줄이 없는 개는 짖지 않는다. 적이 다가오면 피하면 되니까. 묶인 개는 선택지가 없다. 상대가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대문간에서 차단해야 한다. 짖는 행위는 이쪽으로 다가오지마라는 경고다. 각종 차별과 혐오와 증오는 목줄 묶인 개의 울부짖음이다. 그들은 좁은 구석에 몰려서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쪽으로만 기동한다. 짖어보고 안 되면 더 세게 짖는 수 밖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쥐어짜는 것이다. 그러다가 탈진해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