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차 서해랑길 답사를 다녀왔다.
심포항에서 만경정까지 서해랑길 52코스
18km인데 지도를 보니 김제시에서 해안길
산들길 강변길 호수길로 이어진 천리길로
안내하는 바람길과 중복되어 걷는 길이 많아
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답사하기로 계획한다.
19일 화요일 아침 37만km를 달린 애마
로시난테가 삐그덕거려 전주공업사에 차를
맡기고 귀여운 모닝을 대차서비스 받아
심포항에 10시30분 도착 예상 시간보다
한시간 늦게 출발한다.
심포항은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드는
큰 어항이었는데 연안 어업의 쇠퇴와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인해 지금은 담수호가 되었고
넓은 심포항엔 배가 겨우 몇 척 자리해 있었고
갈매기만 날아들며 한적한 풍경이었다.
삼십년 전 아이들과 소풍 나와 어선과
항구 풍경을 화폭에 담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지금의 한적한 항구 모습이 너무나 쓸쓸하다.
비탈진 숲길로 접어들어 망해사로 향한다.
오르고 내리는 숲길은 곧게 자란 소나무
오솔길이 걷기에 더 없이 좋고 살랑살랑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도 지난주와는 또
다르게 가을향이 스친다.
1km정도 올라가면 망해사에 도착하기 전
진봉산 뒷산에 김제 평야를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3층의 진봉망해대가 있다. 망해사 옆에
위치해 있어 보통 망해사 전망대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진봉망해대이고 서해바다의 세찬 바람과 바다위에 떠 있는
구름에 물드는 낙조와 수평선 속으로 똑 떨어져
모습을 감추는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하기에
정말 좋은 전망대이다.
망해사로 접어들기 전 이정표가 세워 진
코너에 지금은 문을 닫은 휴게소가 있고
휴게소 맞은편에 독립군으로 국립공원 현충원
애국지사이신 남촌 곽경열 선생의 묘소와
추모비가 있다. 곽경렬 선생은 1901년
(고종 28) 9월 17일 전북 김제시 진봉면
남상마을에서 태어나 1915년 7월 15세의
어린 나이에 항일 비밀결사대인 광복조직회에
가담해 활동 1918년 항일운동 전개와
1920년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4년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의 모진 고문 끝에 2년 후
1926년 3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으로 추서되어
2009년 9월 22일 이곳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2012년 8월 25일 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안장했다. 스쳐 지나가는 길이지만 조국을
위해 몸 바친 곽경열 선생의 묘소와 비석 앞에
잠시 묵념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은 후 현
정권에서 말도 안되는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홍장군의 육사에 세워진 흉상을 이전한다는
문제를 떠올리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곽경열 선생의 묘소와 추모비 아래에
두곡서원이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
두곡서원은 조선 후기 서원으로 성리학자
강원기(1423-1498)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방문하려 했지만 문이 잠겨있어 건물 밖에서만
바라봤고 성리학자 강원기는 야은 길재
정몽주와 더불어 경전을 읽어 유풍을 크게
일으켰고 그가 경원과 은성 두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충성과 효도의 길을 가르쳐
주는 ‘이존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다고 하며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 후 간청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 만경현(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후세에 <봉호집>이라는 유집을 남겼으며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두곡서원을 세우고 포은
정몽주 봉호당 문헌공 강원기 난계 함부림 등을
같이 배향했다고 한다.
서원을 개방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망해사로 들어섰다. 삼십년 전 낙서전을 돌아
언덕바위를 돌아 내려가 해안가에 앉아 들고
나는 밀물 썰물 일몰을 바라보던 망해사는
온데간데 없고 단청의 모습이 현란한 현재의
모습에 사진만 두세장 찍고 나오고 만다.
망해사 낙서전은 조선 선조 22년(1589)에
진묵 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부설
스님이 처음 망해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때의 절은 땅이 무너져 바다에 잠겨버려
그 이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편액에 ‘낙서전(樂西殿)’이라 썼고 4개의
주련이 걸려있는 낙서전에는 신중도가
봉안되어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낙서전도 문이 닫혀 있었다.
망해사를 나와 본격적으로 바람길 야자매트가
깔려 있고 갈대 가득한 해안 갯벌길을 걷는다.
야자매트 깔린 갯벌길을 지나니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산 해안가엔 수색대가 불침번을
섰던 군인들의 야전 초소가 지금도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분단의 흔적을 남기고 있고..
갯벌길이 끝나는 곳에 코스모스가 반겨주고
석소마을 입구에 도착 물 한모금 바람 한 숨
들이키고 잠시 휴식한다. 석소마을은 옛날부터
질 좋은 숫돌이 많아 나라에 공납하면서
석소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석치마을은 돌이
쌓여 고개처럼 이루어졌다고 해서 불렸다고
하는데 석소마을의 푯말에서부터 습지와
산길을 번갈아 만나며 좁은 길을 걷기도 한다.
얕으막한 해안 산길을 오르고 내릴 때
지나간 사람이 없어 스틱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거미줄을 걷어 내가며 도착한
곳이 전선포 제방이었다.
전선포는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고군산
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어선의
닻을 내리는 항구로 왜구의 적선과 싸움을 하기
위해 배를 배치시켰던 곳으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고 한다.
왜적이 침입했을 때 서쪽 봉화산 정상 봉화대
신호에 따라 군선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라
하여 ‘전선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1920년대 일본인들의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과거의 흔적이 사라졌고 그마저도
전라도 표를 얻어 보고자 시작해 쌓아 놓고
개발을 하네마네 지들 이익에 따라 널을 뛰는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된 후로 바닷물 유입이
안되니 제방도 유명무실해지고 갯벌엔 소들을
먹이는 총체보리를 심어 거둔 하얀 타래
뭉치가 멀리 쌓여 있는게 보인다.
전선포 제방을 지나 진봉방조제로 올라 서고
열심히 걸은만큼 때가 되니 배가 고프다.
방조제마다 정자가 잘 지어져 있어 트래킹하는
길손들이 휴식 취하기엔 더 없이 좋고 고맙다.
잠시나마 신발을 풀고 뜨거운 발바닥을 식히며
간단하게 싸 온 묵은지 된장지짐에 달고 맛난
점심을 먹으며 만경강 넘어 월하산 군부대와
상평 회현 군산 고향땅을 마주하고 앉아 쉬고
있노라니 오랜 세월 살고 돌아 와 선 육십넘은
지금의 모습에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점심 후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출발
진봉방조제 갑문을 만나고 고사교회앞에
도착 그 옛날 고사교회 지붕 청기와를 김제
옥구 군산의 대지주로 쌀을 수탈해 간
구마모토가 죽산 자기집 지붕에 얹기 위해
뜯어 빼앗아 가고 해방이 되자 도망가는
와중에도 그 청기와를 뜯어 간 사실을
상기하며 징그럽게 악랄한 일본놈들의
행태와 욕심에 혼자서 실소를 머금어 본다.
100년도 넘은 고사교회의 험난한 역사앞에
잠시 숙연해지고 한때 수탈을 도운 앞잡이들
본거지였던 진봉면사무소와 파출소를 지나
7km 남은 만경정낙조대를 향해 걷는다.
들엔 벼이삭이 알알이 맺혀 영글어 간다.
바다 수평선이 아니라 끝도 없는 넓은 평야
들녘 논이 펼쳐져 있는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지평선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여기 김제
진봉 평야이다.
양희은의 "들길 따라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송창식의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 🎵 🎶
간혹 발밑에 폴짝폴짝 뛰어 도망가는 개구리와
멈칫 꼼짝 않고 서 있는 독사 두세마리
지나친게 다인 들판길에서 꺼릴것도 없어
목청을 돋워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걷다보니
오늘 걷는 길이 끝이 보이는 만경 화포
이정표가 보인다.
화포 마을엔 평산신씨 충열비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 걸어 온 서해랑길 15차 52코스는
찻길을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해안가
방조제와 갯벌길 들길 숲길로만 걸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만경정낙조대에 도착 만경8경과
만경강이야기를 만경정에 한가로이 앉아
가슴에 담아본다.
만경강은 기억하지
수 많은 흔적과 생명을 품고
군산 김제 부안을 거쳐
바다로 가는 만경강
갈대들은 알고 있지
그 강의 모든 이야기를
"그대곁에 서 있는
갈대가 흔들리는 것은
내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실어 보낸
내 마음이 그대에게
가 닿은 것이라오 ^^ "
2023.9/21.고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