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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봄 냄새 따라 떠난, 남쪽 여행
淸溪 이종선
푸른 물 넘실대는 섬진강가에 수줍게 피는 매화를 보고, 지리산을 넘을 때는 옥화네 주막*에 들러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싶다. 먼 남쪽 바다, 동백꽃 피는 섬들, 순천만이 눈에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는다. 꼭, 소풍가는 날, 밤잠을 설치던 초등학생 시절 같다.
젓갈처럼 곰삭고,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오랜 친구들과의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딱히 어딘가에 먹고 잘 곳을 미리 정해 놓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마음은 더 설레는가 보다. 봄이 오는 길목을 따라 전라남북도의 맛있는 음식 찾아 먹고 이름난 관광명소를 찾아보는 4박 5일의 여행을 떠난다.
첫날, 전주에 도착한 우리는 한국관에서 비빔밥에 모주를 반주로 점심식사를 하고, 시내관광에 나섰다. 형형색색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한옥마을을 관광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따금 웨딩 촬영하는 커플도 눈에 띈다. 할배는 우리들뿐이다. '꽃보다 할배'들처럼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풍년제과의 쵸코파이를 사먹고, 사진도 찍었다.
천주교전동교회는 프랑스 신부 보두네가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의 순교지인 풍남문 자리에 세운 100년이 넘은 성당이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딕양식의 건물로 한옥마을에 가까이 있어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붐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경기전,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길에 승전을 자축했다던 오목대와 이목대를 관광했다.
한벽루를 휘돌아 풍남문 아래 유유히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걷노라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곡주마을로 향했다. 삼천동은 막걸리 골목이 유명하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십여 가지의 안주가 따라 나오는 '상다리 부러지는 상'을 주문했다. 상차림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막걸리 두 주전자가 덤으로 나왔지만 다 비우지도 못한 채, 별빛 반짝이는 전주천 길을 한 시간 남짓 천천히 걸어 숙소인 홀인원모텔에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콩나물해장국이 유명한 삼백집에서 해장을 하고, 노고단을 보려고 지리산 성삼재에 오르니 어찌나 춥고 바람이 강하던지 5분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산봉우리는 눈이, 나뭇가지에는 상고대가 하얗게 서려 있었다. 휴게소에서 따끈한 커피에 몸을 녹이고 다시 내려와 천은사를 관광했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인도의 덕운 스님이 창건한 화엄사의 말사이며,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순천 가는 길에 선암사계곡의 길상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채와 더덕구이, 그리고 특별히 벌교에서 수송해 온 참꼬막 등, 수십 가지의 반찬이 오른 상차림은 맛뿐 아니라 비주얼 또한 일품이었다.
조계산 동쪽기슭에 있는 단아한 자태의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2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태고종 총림으로 호남의 중심 사찰이다. 그래서인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고고한 기품이 서려 있다.
낙안읍성은 순천시 낙안읍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태조 6년(1397년)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축조하고, 세종 6년(1424년)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 4년(1626년) 임경업 장군이 중수하였다. 민속초가와 관아, 그리고 성곽을 돌아보니 꼭 조선시대에 와있는 느낌이다.
세계 5대 연안습지의 하나인 순천만은 690만평의 갯벌과 160만평의 갈대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습지보호지역이며 남사르협약에 등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체 조류의 절반가량이나 되는 230여종의 철새가 발견되며, 농게, 칠게, 짱뚱어 등과 같은 갯벌 생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낙조가 깃든 갈대밭을 걷다가 어느새 어둠이 내려 공원 시설을 다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는 순천이 자랑하는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을 기리는 순천문학관이 있다.
김승옥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네 살 때부터 순천에서 자란 현존하는 소설가이다.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 기행>은 순천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이며, 한국 단편 문학사에서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다.
정채봉은 1946년 승주군 해룡에서 출생하여 2001년에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인 동화 <오세암>은 설악산 관음암의 설화를 동화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문장이 매우 아름답고 깊은 울림이 있다. 2003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국제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정채봉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경을 여러 작품에 드러내고 있다. 작품 <스무 살 어머니>에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오세암>의 마지막 부분에 폭설에 갇혀 죽은 거지 소년 '길손'이 하늘나라의 어머니 품에 가만히 안기는 연상으로 끝을 맺었을까?
작가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철도운동장 부근에 관사식당이 있다. 얼핏 보기에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있는 테이블 6개 정도의 작은 식당이다.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자리가 없을 때는 단칸방인 내실을 내어줄 만큼 인기가 있다. 평범한 것 같은 김치찌개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먹어보면, 할머니의 손맛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약 40분 남짓 걸어 사모아모텔에 돌아와 투숙했다.
셋째 날의 아침은 윗장의 국밥골목에 있는 향촌식당에서 국밥을 먹었다. 주재료는 돼지머리고기인데, 육수가 담백하고 콩나물을 넣어 시원한 맛을 더했다.
순천에는 윗장과 아랫장 등 두 개의 재래시장이 있다. 윗장은 구례, 곡성, 달천 등지에서 주로 농산물을 내다 파는 시장이며 5일, 10일에 장이 선다. 아랫장은 해룡, 벌교, 보성, 고흥 등지의 수산물을 가지고 와 파는 시장으로 2일, 7일에 장이 선다. 음식 맛도 서로 다르다. 윗장의 국밥은 담백한 반면, 아랫장은 내장을 넣은 좀 더 짙은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여수의 세계박람회장은 박람회를 개최한지 오래되어선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썰렁하다. 스카이타워전망대에 올라 행사장과 공원시설, 앰불호텔과 오동도, 그리고 바다 건너 멀리 남해의 전경도 두루 살펴보았다. 오동도를 관광한 후, 돌산대교를 지나 ‘꽃돌게장1번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알이 꽉 찬 간장꽃게에 밑반찬도 매우 정갈하고 돌게장은 무료로 무한리필 된다.
장흥 가는 길에 정남진 편백숲우드랜드에서 피톤치드 삼림욕을 했다. 억불산 자락에 위치한 이 시설은 장흥군에서 관리하며, 목재문화 체험관, 한옥 및 황토방 숙박시설, 사우나 등을 갖추고 있다.
득량만 연안은 김, 미역, 굴, 피조개, 키조개, 바지락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사촌리는 주꾸미, 수문포는 키조개의 주산지이다. 수문의 포구 갯마을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새콤달콤한 바지락회무침이 입맛을 당겼다. 장흥의 청풍모텔에서 세 번째 밤을 맞았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강진군 마량항으로 갔다. 마량은 제주에서 기른 말을 육지로 들여오고, 고려시대에는 청자를 개성으로 실어 나르던 해상교통의 관문이었다. 우리는 생일도를 관광하기 위해 그곳에서 유람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고금도와 약산도를 잇는 약산연도교가 생긴 후, 여객선터미널이 약산도의 당목항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아직 식전이었으므로 마량포구의 남양식육회관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감태무침이 별미였다. 당목항에는 생일도와 금일도를 운행하는 여객선이 있는데, 둘 다 시간이 맞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었다.
해남으로 이동하여 고산 윤선도 유적지인 녹우당 고택과 고산사당을 둘러보고 유물전시관을 관람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유하백마도, 미인도, 그리고 해남 윤씨의 종부인 광주 이씨가 한글로 쓴 13미터에 달하는 편지 형태의 두루마리 규한록이 매우 인상적이다.
대흥사는 밖에서 볼 수 없는 경관이 일주문을 지나면서 펼쳐진다. 두륜산의 능선이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와불의 형상이다. 가련봉, 두륜봉, 도솔봉, 연화봉 등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연꽃의 꽃잎처럼 둘러져 있고, 한가운데 씨방과 꽃술이 있을 자리에 대흥사가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는 이런 곳을 두고 명당이라고 하는 것일까? 속세와는 인연이 먼 참으로 아늑한 곳이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가 있다. 서산대사는 두륜산을 만년불패지지(萬年不敗之地)라고 했다. 입적을 앞두고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륜산에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웅보전은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천장의 연꽃무늬와 운학문양은 형상과 색채감각이 매우 뛰어난 걸작이다. 또한 현판과 용두, 빗살무늬 합문, 처마 등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다.
대흥사에 들어가려면 피안(彼岸)교를 건너야 한다. 바로 그 앞에 숙식하며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유선관에 잠깐 들렸다. 기둥과 툇마루, 처마의 모양으로 보아 사찰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고택이다. 계곡을 끼고 있는 뒤뜰의 아름드리 고목 아래 지기들과 둘러앉아 두륜산탁주 한 사발 기우리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해남 땅 끝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간헐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미 땅거미가 지는 때라 아름다운 바다의 경관을 오래 볼 수 없었다. 땅 끝 마을을 나와 해남 군청 관광과의 소개를 받은 한성정에서 품격 있는 만찬을 즐기고, 피아노모텔에서 여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모텔에서 가까운 예향식당에서 아침을 간단히 하려고 했는데, 감자채볶음, 소고기메추리알조림, 파래무침, 총각김치 등 밑반찬이 모두 깔끔하고 맛있어 결코 가벼운 식사는 아니었다. 해남을 출발하여 변산반도국립공원을 탐방했다.
내소사는 고창 선운사의 말사이며,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가 창건하였다. 대웅보전은 그 의장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이며, 모든 접합이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교합하여 만들었다. 꽃살무늬 문짝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절 입구의 전나무길, 수령이 천 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삼백 년으로 추정되는 보리수나무가 인상적이다.
새만금 방조제는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에 이르는 총 길이 33km의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차로 달려 보니 정말 길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갇힌 바닷물을 다 퍼내고 그 자리가 땅이 되려면, 언제 끝날 지도 모를 방대한 사업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의 32.5km보다 0.5km 더 길어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라고 한다.
방조제를 건너 군산의 꽃게장 전문인 금강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번 여행에 찾은 마지막 맛집이다. 모두들 아쉬워했다. 돌아가서 무얼 먹을지를 걱정하는 눈치들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안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 나누며,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음 여행은 11월 6일부터 9일까지, 동해안으로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오후 6시경 양재역에 도착하여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해산했다.
지하철에 오르니, 정수 말마따나 달콤한 피로가 몰려온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즐거웠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노을에 붉게 물든 새털구름, 한 떼의 철새가 하늘을 날며 그림을 그린다. 화선지에 그리는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부산을 떠는 철새들, 낙조가 내린 순천만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산봉우리 너머로 해 넘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우리도 황혼이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을 한탄하지만, 누구도 낙조를 슬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이 있기 때문이다.
멋쟁이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석양처럼 붉다. 지하철을 내리며 무심코 차창을 바라보니, 초승달 같은 미소가 입가에 물려 있다.
* 옥화네 주막: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에서 화개장터에 있었다는 주막
참고
1. 여행 일시: 2017년 2월 13일부터 2월 17일까지(4박 5일)
2. 여행 코스: 서울 →전주 →지리산 성삼재 →천은사 →구례 →선암사 →낙안 읍성 →순천, 순천만 →여수 →오동도 →장흥 →득량만 →강진군 마량 →완도군 고금도 →약산도 당목항 →고산 윤선도 녹우당 →대흥사 →해남 땅 끝 마을 →변산반도 내소사 →새만금 방조제 →군산 →서울
3. 참가자: 김종건, 양재호, 유정수, 이선용, 이종선, 이태영
첫댓글 역시 작가의 글, 다시 여행하듯 생생함에 감개무량합니다.
wow! 이작가님,,역시나임니다..열흘이 지난지금도눈앞에 펼처진그림이 선함니다,,모두들에감사함니다
내가 마치 여행길에 함께 하는 듯 하구먼... 남도여행 언제가도 좋기만 하지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 정말 아름답고 귀한 시간이었어요. 다음엔 다 함께하는 여행이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