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경의 문학 감상] : 소설가 박혜지의 최신작 장편소설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2024)을 읽고
2024년 11월 마지막 날, 소설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2024)을 읽었다. 소설가 박혜지의 최신작이다. ‘라샤(Raxa)’라 불리는 서양의 모직물을 16세기에 일본이 받아들일 때, 한자로 ‘羅紗(ラシャ)’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말인 ‘라사’. 양복점 이름에 그 ‘라사’를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양복(洋服)이 일제강점기에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양복점들의 상호(商號)는 흔히 ‘○○라사’라는 식으로 정했는데 1980년대 초까지도 대개 그러했다. 그 ‘라사’라는 오래되고 촌스러운 단어가 사용된 소설 제목처럼, 박혜지의 이번 소설은 1970년대 혹은 1980년대 초 아주 시골스러운 면소재지의 아주 촌스러운 남자아이 김판근이 주인공이며, 그 주인공의 아주 촌스러운 ‘성장기(成長記)’를 그렸다. 주인공 판근의 지극히 촌스러운 생각과 말투와 행동을 작가의 더욱 촌스러운 감성으로 담담하게 써놓아서, 오히려 읽는 느낌은 편하고 따뜻했다. 시골 동네에 새로 생긴 양복점 ‘런던라사’의 주인 ‘삐에르’를 한번 만나보고 그의 ‘세련됨’에 반하여, ‘드자이너’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판근이 그 꿈을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내용의 소설이다. 내용은 간단하며, 큰 반전도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장점이며, 매력이다. ‘런던라사’ 같은 양복점이 있던 시절의 촌스러운 동네에서 나고 자라는 지극히 촌스러운 아이인 판근의 ‘성장기(成長記)’에 무슨 거창한 반전을 넣을 수 있겠는가? 박혜지 작가는 그 촌스러운 시절과 그 시절의 촌스러운 어린 아이 판근을, 역시 작가의 촌스러운 감성으로 그저 촌스럽게 말해주는데, 참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 촌스러운 자연스러움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촌스럽다’는 “세련된 맛이 없이 엉성하고 어색한 데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시간의 연속(連續)과 관련이 있다. 즉 과거의 감정, 태도, 예술 등은 현재에 비해 자연스레 ‘촌스러운 것’이 되고, 현재의 것들은 미래에 역시 ‘촌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박혜지 작가의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은 ‘런던라사’, ‘삐에르’, ‘세련된’, ‘옷차림’ 등 과거의 ‘촌스러운 것들’을 통해 주인공 판근의 ‘촌스러운’ 성장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촌스러움’은 바로 우리가 살아낸 과거의 실체 그 자체이며, 바로 우리들이 지닌 과거의 이야기 자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자신의 따뜻한 감성으로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에 빠져들며 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박혜지 작가는 이 소설에서 거창한 것이 아닌, 촌스러운 어린 아이 판근의 아주 ‘촌스러운’ ‘성장기’만 담담하게 얘기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 겪었을 ‘촌스러움’의 기억을 작가는 모든 사람에게 되살려주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촌스러움’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특별한 반전이 없는 우리의 ‘촌스러운’ 과거 및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동시에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소설, 그것이 바로 박혜지 작가의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이다. 박혜지 작가는 그 동안 단편소설집 『오합지졸 특공대』(2019), 『사랑, 입니까』(2022) 등을 출간했었다. 이번에 출간된 2024년의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은 촌스러운 아이 판근의 지극히 촌스러운 ‘성장기(成長記)’이면서, 내가 보기에는 작가 박혜지 자신의 ‘성장기(成長記)’로도 느껴졌다. 동시에 박혜지 작가가 이제 새로운 작품세계로의 ‘비약(飛躍)’을 위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완전하게 훌훌 털어내는 하나의 ‘통과의례(通過儀禮)’로서 그 작품을 낸 것으로 느껴졌다. 세상사람 대부분에게는 큰 반전조치 없는 과거의 평범하고도 ‘촌스러운’ 삶을 거쳐, 언젠가 한 차례 미래의 큰 ‘반전(反轉)’이 만들어진다. 작가로서는 자신의 촌스러운 ‘성장기(成長記)’를 완전하게 그려내어 남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나면, 그 뒤에야 비로소 세상사람 모두를 감동시킬 사람얘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작가가 새로운 작품세계를 완성하는 ‘반전(反轉)’일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이 소설을 펴낸 박혜지 작가에게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은 그 작품세계의 획기적인 ‘반전(反轉)’이다. 그래서, 박혜지 작가의 다음 소설이 궁금해지고 또 엄청 기대된다. 어느 시대에 형성되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삶의 양식(樣式)은 시간이 지나면 지극히 ‘촌스러운’ 것이 되고, 다시 새로운 양식이 만들어져 그 촌스러움을 대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새로움도 역시 ‘촌스러운’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세상이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와 작품을 생산해내야 하는 이유이다. - 2024년 11월 30일 임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