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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6 (2022)년12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
▷ 일 시 : 불기2566 (2022)년12월23일(금)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대한불교조계종 전문포교사 보광-조철주
동 참: 대주-이병기 포교사
*상구보리 하화중생 *
2022년12월23일(금)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신앙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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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오늘의 상담 교리를 회향했다
2022년 한 해를 되돌아 보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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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내용<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108~116p
★지식의 부정(3)★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
이 경전에서 붓다는 이런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은 붓다가 가장 훌륭한 제자 중의 한 명인 사리푸트라(sariputra)에게 설한 것이다.
*舍利弗,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 ) 또는 사리풋다 ( 팔리어: Sāriputta ), 사리불 (舍利佛)
➤왜 하필이면 사리푸트라인가?
첫째날, 나는 사다리의 일곱 칸, 일곱 개의 차원에 대해 말했다.
일곱 번째는 초월의 차원이다. 선(禪), 탄트라, 도가(道)가 여기에 속한다.
여섯 번째는 영성 초월(spiritual-transcendental)의 차원, 즉 요가의 차원이다.
여섯 번째 단계까지는 방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떻게' 라는 문제가 중요하다.
여섯 번째 단계까지는 계율과 의식(儀式), 방법론이 중요하다.
일곱 번째 단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無)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 경전에서 사리푸트라가 거명되는 이유는 그가 여섯 번째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붓다의 가장 탁월한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붓다에게는 여든 명의 탁월한 제자들이 있었는데,
사리푸트라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제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붓다의 주변에서 가장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훌륭한 학자였다.
붓다를 찾아갔을 때 그 자신이 이미 5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붓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붓다와 논쟁해서 이기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가 5천 명의 제자를 대동한 것은 깊은 인상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가 붓다 앞에 섰을 때 붓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붓다가 말했다.
사리푸트라여, 그대는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대가 아주 많은 지식을 간직하고 있지만 공허하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나와 논쟁해서 이기려고 왔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로 나와 논쟁하고 싶다면 최소한 1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사리푸트라가 물었다.
"왜 1년씩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대는 1년 동안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와 논쟁하기 위해 앞서 그대가 지켜야 하는 조건이다.
그대는 1년 동안 침묵을 지킨 뒤에야 비로소 나와 논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침묵에서 나온 말들을 그대에게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전(前)에 그 침묵에 대해 다소나마 경험할 필요가 있다.
사리푸트라여, 내가 보니 그대는 단 한순간의 침묵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대는 온갖 지식으로 가득 찼다. 그대의 머리는 너무 무겁다.
사리푸트라여, 나는 그대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대는 여러 생 동안 너무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왔다.
그대는 이번 생뿐만 아니라 여러 생 동안 브라민(brahmin)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브라마나(Brāhmaṇa)'
여러 생 동안 그대는 베다(Veda)와 갖가지 경전에 묻혀 살아왔다.
여러 생 동안 이것이 그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능성을 본다.
그대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아직 가망은 있다.
아직 지식이 그대의 존재를 완전히 가로막지는 못했다. 아직 몇 개의 창문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는 1년 동안 그 창문들을 닦아 내고자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깊은 곳에서 만나 대화 할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1년 동안 여기에 있도록 하라."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리푸트라는 인도 전역을 순례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109
➣이것은 그 당시 인도의 사회 풍조였다.
박식한 사람들은 나라 전역을 여행하며 대규모의 장기적인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이것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일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학자들을 꺾고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커다란 에고의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왕이나 황제보다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 어떤 부호(富豪) 보다도 더 위대한 거물로 인정받았다.
사리푸트라 또한 그렇게 여행 중이었다.
그는 붓다를 꺾지 않고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목적으로 붓다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다의 권유에 좋습니다.
제가 1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승낙했다.
그리고 그는 붓다 곁에 머물며 1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의 내면에 침묵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년 후, 붓다가 그에게 말했다.
"사리푸트라여, 이제 우리가 토론할 수 있는 때가 왔다.
나는 그대에게 패한다 해도 말할 수 없이 기쁜 것이다."
그러자 사리푸트라는 조용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붓다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그가 말했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지난 1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당신의 말씀을 듣는 동안 몇 차례나 제게 섬광 같은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애초에 저는 당신의 적수로 왔지만 '어차피 1년 동안 여기에 있을 작정이라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기심에서 당신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번인가 당신은 저의 내면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저의 가슴을 흥건히 적셔 주었으며, 저의 내면에 있는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음악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패배시키지 않고도 저를 이기셨습니다."
사리푸트라는 붓다의 제자로 귀의했다.
그가 데리고 온 5천 명의 제자들 역시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사리푸트리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경전은 그런 사리푸트라에게 설(說)해지고 있다.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이다.
공(空)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공(空)과 다름이 없나니,
무릇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공(空)이며, 공(空)한 것은
모두가 형상이니라.
감각, 지각, 충동, 인식 작용도
이와 같느니라.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이 '여기에서는' 이란 말은 어떤 뜻일까? 이것은 붓다 자신의 차원을 말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서 있는 차원, 이 초월적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
내가 존재하는 이 영원의 차원에서 본다면….“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形象)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이다.
불교의 방법론 전체가 이 한마디에 의존하고 있다.
현현(顯現)된 것은 현현되지 않은 것이다.
형상은 공(空) 자체의 형상에 지나지 않으며, 공(空) 또한 형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공(空)은 기능성으로 존재하는 형상이다.
이 말은 분명히 비논리적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린다.
어떻게 형상이 공(空)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둘은 정반대다. 또한 공(空)이 어떻게 형상이 될 수 있겠는가?
이 둘은 정반대의 극(極)이다.
경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붓다가 논리적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이다.
실체(reality) 에 대한 접근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논리적인 접근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에서 논리학의 시조로 통한다. 논리는 직선상에서 움직인다.
단선적(單線的)논리는 정반대의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것은 배척되어야 한다. 이런 접근 방식에 따르면 A는 A일 뿐, 결코 비(非) A가 아니다.
A는 A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的)인 논리 공식이다.
이런 공식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런 논리를 주입받았다.
A는 A이며, 결코 비(非) A가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실체에 접근하는 두 번째 방법론으로 변증법(法)이 있다.
서양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헤겔이 이런 접근 방식과 연관된다.
변증법적인 과정에 따르면, 삶은 정반대되는 양극(兩)을 통해 움직인다.
마치 두 개의 마주보는 둑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이 두 개의 둑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로 강물이 흐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더 실제적이다.
전기에는 음극과 양극이라는 두 개의 극이 있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합당하다고 한다면 전기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그렇다면 신(神)도 비논리적인 존재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남성과 여성, 서로 대립되는 음(陰)과 양(陽)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神)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랐다면 동성애(同性)가 정상이고 이성(異性) 간의 사랑은 변태로 여겨졌을 것이다.
남성은 남성을 사랑하고 여성은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정반대되는 양극(兩極)은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神)은 변증법적이다. 모든 곳에서 양극이 만나고 있다.
그대 안에서 삶과 죽음이 만나고 있다. 밤과 낮, 여름과 겨울이 만난다.
가시와 꽃송이가 만나고 있다. 가시와 꽃은 똑같은 가지 위에 있다.
그들은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아름다움과 추함, 몸과 영혼, 세속과 신, 이 모두가 정반대되는 것들이다.
여기에 상반되는 것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교향악이 있다.
상반되는것은 단순히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위대한 교향악을 만들어낸다.
오직 상반되는 것들만이 다채롭고 조화로운 교향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일 상반되는 것들이 없었다면 삶은 조화로운 교향악이 아니라
무미 건조한 단음(單音)이 되었을 것이다. 삶이 권태롭고 지루해졌을 것이다.
단 하나의 음계(音階)만이 계속 반복된다면 당연히 지루함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은 상반되는 음들로 이루어졌다. 정(正, thesis) 과 반(反, antithesis)이 만나 합(合, synthesis)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합(合)은 다시 정(正)이 되어 반(反)을 만들어내고 더 고차원적인 합(合)이 전개된다.
이것이 삶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따라서 붓다의 접근 방식은 변증법적이다. 이것이 더 타당하고 실재에 가깝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여기서 또 한가지 이해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심리학자들도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이제 생물학자들은 남성이 단순히 남성일뿐만 아니라 여성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은 단순히 여성일 뿐만 아니라 남성이기도 하다. 113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이 만날 때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와 만난다. 그런데 남자는 그 자신 안에 여자를 감추어 두고 있다.
여성도 자기 안에 감추어진 남자를 갖고 있다.
각자의 내부에 숨어 있는 이 두 사람 또한 만난다.
따라서 양면적 차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남자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다. 왜 그런가?
그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어떤 부분은 아버지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또 어떤 부분은 어머니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대의 피 속에는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가 함께 흐르고 있다.
그대는 양성(兩性)적일 수밖에 없다. 그대 자신이 이미 대립되는 양성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의 통합(合)이다.
어느 한쪽을 부정하고 나머지 한 쪽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류는 지금까지 이런 오류를 범해왔다.
지금까지 세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선적 논리를 따라왔다.
이것은 인류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르는 한
이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은 오로지 남자다워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자신 속에 내재한 여성적 요소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
가슴 속의 부드러움을 내보여서도 안되고 수용적인 자세를 취해서도 안되며
항상 투쟁적이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남성은 울거나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다.
눈물은 여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남성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투쟁적인 자세를 보여서도 안 되고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해서도 안 된다.
항상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은 실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런 교육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불구로 만들었다. 114
더 깊은 이해를 가진 보다 나은 세상에서는 남성도 양성(兩性)이며
여성도 양성(兩性)이 될 것이다. 때로는 남성도 여성이 될 필요가 있다.
부드러움과 유연함, 사랑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여성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할 순간들이 있다.
분노하고 있을 때, 자신을 방어하거나 저항할 때는 그런 특성들이 필요하다.
만일 여성이 수동적인 자세에 머문다면 자연히 그녀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수동적인 여성은 당연히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투쟁적인 남성, 지극히 공격적이며 온유함을 모르는 남성은 십중팔구 전쟁을 일으킨다.
그는 세상에 폭력과 광기를 가져온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싸움을 일으킨다. 마치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지난 3천 년 동안 무려 5천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이 계속된다.
지구는 단 하루도 평온하고 정상적인 날이 없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이스라엘에서, 인도에서,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에서...
어디선가 학살이 계속되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남자는 살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남자이기 위해서는 살인을 해야 한다. 인류가 가진 에너지의 75퍼센트가 전쟁에 소모된다.
수소폭탄, 중성자탄 등 전쟁물자를 만드는 데 막대한 에너지가 투입된다.
마치 인간은 오로지 전쟁을 하기 위해 지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전쟁영웅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다. 전쟁당사자인 정치가들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된다.
아돌프 히틀러, 윈스턴 처칠, 조셉 스탈린, 모택동 등 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들은 커다란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침략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 모두가 전쟁광(戰爭狂)이다
어느 쪽이 침략자인지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독일이 침략자였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은 누가 역사를 기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쪽이든 이기는 쪽이 역사를 쓸것이고 그는 상대방을 침략자로 기록할 것이다. 115
만일 히틀러가 승리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뉘른베르크(Nurenbung : 옛 서독 나동부 바바리아 주 동부의 도시,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독일 전법의 국제 군사 재판이 열렸다)의 재판이 열렸겠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의 장군과 정치가들이 전범(戰犯)으로 법정에서야 했을 것이다.
역사는 독일인들의 손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며, 당연히 그들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남성들이 모든 노력을 전쟁에 쏟아붓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남성이 오로지 남성이도록 교육받아 왔으며,
그 안에 내재한 '여성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전체적이지 않다.
이것은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또한 전체적이지 않다.
여성은 자신의 남성적인 부분을 부정하도록 강요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남자아이와 싸울 수 없었다.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도 안되고 오로지 인형 놀이나 소꿉 장난을 하며 놀아야 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시각이다.
남자는 양성(兩性)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인간, 조화로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
➤존재계는 변증법적이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은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한다.
붓다는 말한다.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사리푸트라여,
나의 세상에서는, 나의 공간, 나의 시간 속에서는...
사리푸트라여, 사다리의 일곱 번째 차원, 이 무심(無心)의 차원,
이 삼매의 경지에서는... 이 열반의 상태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形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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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 ) 『반야심경 』 초판 2쇄; 서울:태일출판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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