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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역사를 품다 12> - 《시조21》 2024. 여름호 연재
묘지 위의 집, 비석마을
- 피란 수도 부산
김덕남
살기 위해 떠난 길의 종착지 부산이 갑자기 북적이기 시작했다. 예고 없는 6·25 발발로 요행히 기차를 얻어 탄 사람들이 부산에 처음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29일 새벽이었다. 이후에도 피란민은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으나 11월에는 중공군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자 다시 피란길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4 후퇴가 시작되면서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과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모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향 탈출이었다. 한반도의 최남단 부산에서 만나자는 기약을 뒤로한 채 노부모는 남고 자식은 떠났다. 아내는 남고 남편은 떠났다. 기차의 객실, 지붕이 따로 없었다. 승강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관실 밖 머리 쪽에도 매달릴 수 있는 한 매달렸다. 기차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은 걷고 또 걸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젖먹이는 업고 어린 것은 손을 잡았다. 달구지에 짐을 실은 소도 남으로 남쪽으로 무조건 걸었다. 무명옷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길에서 잠을 자고 끼니라고도 할 수 없는 요기로 허기를 때웠던 피란길이었다. 그동안 적의 치하에서 치를 떨었던 북한의 흥남부두에는 피란민이 눈보라와 함께 몰려들었다. 부산은 이미 과포화 상태로 함흥에서 내려온 미군 군함의 일부는 거제도로 기수를 돌려야 했다.
물밀듯 밀려든 피란민으로 부산은 인구가 40여만에서 100만으로 폭증했다. 남의 집 단칸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 가마니로 얽은 움막에 몸을 뉘든지 노숙을 해야 했다. 산기슭 어디에든지 짐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다행이었다. 더 갈 데 없는 사람들은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부산은 가마솥[釜] 모양의 산[山]이라는 데서 지명을 따 왔듯이 바다를 동남으로 끼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파른 산 중턱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다. 화장실도 수돗간도 없이 모두 한방에서 생활했다. 초량동, 수정동, 문현동, 우암동, 감천동, 아미동 등 피란민이 가득했다. 전쟁통의 처참함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이어갔다. 일제가 소를 수탈하기 위해 지은 소의 막사를 숙소로 사용한 우암동 소막마을, 미로를 따라 레고처럼 쌓아 올린 감천동,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지은 아미동 비석마을이 생겨났다. 지금은 많이 개량되어 시멘트 블록집으로 바뀌었으나 골목길은 그대로이다. 그날의 아픔이 문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토성동 부산대학교 병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까치고개 산복도로를 올라 감천문화마을에서 내렸다. 맞은 편 ‘비석문화마을’이라 새겨진 안내판과 벽화가 그려진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납골묘 위에 지은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이 그대로 있다.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투명 아크릴판으로 집 전체를 덮어 보존하고 있다. 축대나 구조물이 원형 그대로인 8동의 피란 주택은 ‘피란생활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오밀조밀 당시 상황을 전시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 아무 데도 발붙일 데가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옆집이 떠나가면 그 자리를 넓혀 삶을 이어갔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골목길은 방문에 접해 있다. 골목길엔 가스통, 기름보일러통이 비석이나 상석을 방석으로 깔고 앉았다. 비석이 계단석이나 댓돌로 쓰인 곳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천마산 경사지, 1906년 조성)를 축대 삼아 집을 짓고 살았을까. 입구 벽면에 비석마을 내력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부산역 앞으로 가니 공무원이 와서 종이쪽지 한 장이랑 천막을 주면서 그곳에 가서 살아라고 했습니다. 종이쪽지에는 아미동 산 19번지라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석과 비석 사이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하다 서너 평 규모의 판잣집을 지었다. 묘 크기에 따라 집의 크기도 달라졌다. 조심조심 골목길을 돌아가자 비석과 상석이 여러 개 박혀 있는 축대가 보인다. 집은 허물어지고 공터에 이동식 커피집이 차지하고 있으나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시멘트가 덧발라진 축대에 낀 비석에는 ‘明治四十二年五月廿七日沒’이란 글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 옆의 또 다른 비석에는 ‘金滿家靈標’라는 글씨와 가족들의 이름이 나란하다. ‘昭和’ ‘大正’이란 연호도 보이는 가족 납골묘 비석인 것 같다.
축대로 사용한 비석들
비석들이 주춧돌로 벽으로 숨을 쉴 때
하늘도 제 몸 찢어 쪽빛으로 가린 골목
아미동 비탈길에서 변함없이 웃고 있다
금이 간 구석자리 여미면서 버틴 날들
생사가 공존하는 경계에 올라서서
간격을 품에 안는다 경사면을 당긴다
- 김석이 「비석마을 민들레」 전문
피란민들은 비석과 상석을 이용하여 계단과 옹벽을 만들었고 이러한 묘석은 지금까지 140여 개 이상 발견되었다고 한다. “비석들이 주춧돌로 벽으로 숨을” 쉬고 “생사가 공존하는” 비석마을에 올라서면 아랫동네를 굽어보는 곳에 대성사란 절이 있다. 이 절을 창건한 고故 효담스님(속명 김한순, 부산시무형문화재 제6호, 상쇠)의 따님인 무애스님이 주지를 이어가고 있다. 이곳엔 특별한 탑이 두 기가 있다. 효담스님의 꿈 이야기를 무애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
1966년, 효담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땅 밑에 묻힌 보물을 찾아달라고 했다. 마침 집안에 우환이 있던 주민이 찾아와 집안을 살펴봐 달라는 요청으로 집을 살펴보니 원형 기둥으로 된 비석을 문지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둥에는 ‘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과 ‘大正八年七月三十日 山田七太’라는 날짜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원형 비석을 아무 장비도 없이 대성사로 끌고 오는데 거짓말같이 술술 딸려왔다고 한다. 3단의 연꽃좌대는 뒷집 축대로 사용하고 있어 좌대를 빼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 좌대를 본떠 제작한 연좌대로 현재의 탑을 받쳤다. 그 옆에는 상석 11개를 쌓아 올린 상석탑이 있다. 이 탑들을 향해 매월 초하루와 백중날(음 7월 15일)에 제를 올리며 일본인 혼령을 위로한다고 한다.
상석탑 앞에서 설명하는 무애스님
일본인 후손들이 조상의 무덤을 찾아오는 사례가 있었단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으나 비석의 이름 부분은 담벼락 안쪽으로 박혀 있기에 찾을 수 없어 허탈하게 돌아갔다고 한다.
마을을 돌다 이 마을에 70년을 살았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낙들이 묘비였던 납작돌을 주워 와 다듬이질을 하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고 한다.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 뜨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지하에서 밤중에 게다 소리가 들렸다든지,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무서웠겠다고 하니, “당장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지경인데 무덤이면 어떻고 비석이면 어떤가. 오히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데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 지금까지 비석 위에 수시로 물 한 그릇 올려놓고 명복을 비는 거야.”라고 한다. 또한 명절에는 밥 한 그릇 수저 한 벌을 더 놓고 차례를 같이 지내는 사람들도 있단다. 이제 이 마을의 젊은이들은 다 떠나가고 고령의 주민들만 남았다. 절반 가까이 집이 비어있단다.
비석마을에서 20분 정도 경사진 마을을 걸어 내려와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을 찾았다. 국민만 피란 온 게 아니었다. 정부도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오고야 말았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 부산은 1950년 8월 18일부터 1,023일 동안 대한민국 피란 수도가 되었다. 따라서 경남도청 청사(1925년 건립, 현 1, 2층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3층은 부산 임시수도 청부청사 기록실)는 임시 중앙청이 되고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관저인 임시 경무대가 되었다.
피란민들의 조형물이 서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잘 가꾸어진 기와집이 보인다. 1926년 일제가 지은 건물이다. 붉은 벽돌에 2층 지붕면의 경사가 우리나라 지붕과 달리 가파르다. 수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가기 위해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왔을 때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하던 건물, 즉 임시 경무대이던 임시수도기념관이다.
‘사빈당思邠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목조다. 응접실에는 당시의 탁자와 벽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에게 임명장을 주는 사진과 릿지웨이의 이임인사 장면이 걸려있다. 옆방 서재에는 대통령이 사용하던 타자기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나라 걱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대통령 조형상과 친필의 족자, 병풍, 초상화도 걸려있다.
1951년 이후 전쟁의 장기화로 미국은 휴전협정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도 없이 휴전된다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압박용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렸다. 그 결과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정치 현안의 토론과 최종 결정이 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의미가 깊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쟁 중에도 겨울은 가고 봄은 왔다. 근심스럽게 붓을 잡는 대통령의 문사다운 모습이 보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지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산 마슬엔 새 밭 매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 이승만 「전쟁 중의 봄」 전문 (1951년 봄, 부산에서)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 씹고” 다니는 피란민의 걱정에 잠 못 이루다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듯이 이 땅의 평화를 갈구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이 느껴진다. 요즘 ‘건국전쟁’ 영화 탓인가 임시수도기념관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그 외 이승만 대통령의 두루마기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한복이 전시된 내실, 피란 시의 정치활동, 피란민의 생활, 교육, 시장 등을 보여주는 모형 전시실 등이 있다. 화장실에는 청화백자로 된 변기가 보인다. 청화백자 변기가 100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보물이 될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다. 증언의 방에는 한국전쟁 당시 19세에 월남하여 특공대원으로 참가한 이정숙 할머니의 처절했던 체험담이 흘러나온다. 2층에는 집무실과 손님이 머물던 방이 있다. 손님 방은 회상의 방으로 꾸며 임시수도 관련 영상물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임시수도기념관을 돌아 나가면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건물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관사였으나 리모델링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쟁터로 아들을 보낸 아버지의 위문편지, 군번, 북한군 물통 등을 전시하고 부산에 자리 잡게 된 피란민의 일상을 판잣집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음식과 다방, 예술인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피란 중에도 교육은 이어져 야외에는 천막학교가 있다.
전쟁은 일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음식은 꿀꿀이죽과 밀면이다. 꿀꿀이죽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을 수거하여 다시 끓여 만든 죽으로 햄과 소시지 등 육류까지 들어있어 굶주린 피란민들의 영양 음식이 되었다. 또한 미국의 원조 밀가루로 만든 밀면은 냉면보다 면발이 부드러워 입맛을 돋우는 인기 음식이 되었다. 이제 꿀꿀이죽은 없어졌지만 밀면은 돼지국밥과 함께 부산의 서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전쟁 영화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눈처럼 빛나고 그녀처럼 고왔다는
낙하산 떨어지던 하늘 꽃밭처럼 환했다는
마른 비 내리는 50년대의 화면 속에는
죽음이 사랑이 허청 든 가난이
양키들 꿀꿀이죽처럼 엉켜있다 굳어있다
기부 미 초콜릿 기부 미 대한민국
그 애 누이는 치마를 벗어주었고
핏덩이 선사받았다 지폐 몇 장과 함께
- 양점숙 「전쟁영화를 보다가」 전문
전장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이 있는가 하면 후방의 국민은 “꿀꿀이죽”, “기부 미 초콜렛” “핏덩이를 선사 받”는 등 슬픔이 뒤따랐다. 그로 인해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기도 했다.
전쟁 원조물자와 함께 들어온 커피는 다방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전쟁으로 인해 갈 곳 없었던 예술인들의 숨구멍과 같은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른바 다방 전성시대를 열었다. 음악감상실이요, 습작실이요, 미술품 전시 공간이기도 한 다방은 종합예술 공간이었다. 한잔 커피로 전쟁의 아픔을 잊고자 한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밀다원’은 문인들 아지트이자 연락사무소 역할까지 했다. 김동리는 밀다원에 드나들던 문인들의 이야기인 『밀다원 시대』라는 소설을 썼다. 부역 혐의로 체포된 친구를 호송 중에 풀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황순원의 『학』도 한국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담아낸 소설이다. 피란지 부산에서 세 번째 시집 『패각의 침실』을 펴낸 조병화는 “식민지의 등대처럼 나는 내 어둠을 빛힌다.”로 시작되는 서문을 실었다. ‘금강다방’은 한국 최초 추상파 화가 그룹인 ‘신사실파’(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의 아지트였으며,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이중섭의 ‘은지화’가 탄생한 공간이었다. 음악인들의 활동공간은 ‘문화장다방’과 ‘비원다방’이었다. ‘비원다방’에서 윤용하는 박화목이 준 시 「보리밭」에다 곡을 붙였다. 이렇게 임시수도 부산의 다방은 우리나라 예술문화의 중심을 이루어 전쟁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예술혼을 키웠다.(전시관 자료 참고)
순박한 국민에게 전쟁은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전쟁에도 ‘살아지면’ 살아나는 것이다. 굶주림, 절망,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숨을 받은 자의 임무이듯 산 자가 죽은 자를 디디며 생을 이어갔다. 피란민의 아픈 안식처인 비석마을은 문화마을이란 이름을 달았으나 빈집이 늘고 있다. 비석마을 아랫동네에 있는 1,023일 동안의 임시 경무대와 임시 중앙청의 슬픈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전쟁 1, 2세대의 피나는 노력으로 전쟁의 참화에서 재건과 부흥으로 화려한 빌딩을 비석마을 발치에 두었다. 지금도 무덤 위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바라볼까? 정부가 어떠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를 비석마을이 말해준다.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출처] 묘지 위의 집, 비석마을-피란 수도 부산 / 김덕남|작성자 시조21
- 《시조21》 202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