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영 교수의 공에 대한 중관과 유식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니
이것이 유식과 중관의 핵심적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용수는 非有와 非無의 중도로 空을 설정했음에 반하여,
유식에서는 空을 有의 반대 개념, 즉 無[非有]와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한다."
위의 글에서 보면 유식은 제 생각대로 공과 중도 연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없음"이라는 존재론적 사고(흑백논리)로써 공을 해석한 패착을 범했네요.
중관이후에 유식이 나오게 되는데 유식은 중관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중관에서 말하고 있는 중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창조적 오해" 같습니다.
결국 중관과 유식은 아함경의 12처설을 기준으로 두 갈래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12처설에 대해 아비달마는 6근 6경으로 분해해서 존재론적으로 해석해놨기에
유식은 그 아비달마의 존재론적 해석을 근거로 발전해나간 것 같습니다.
결국 아함에서의 12처설을 중도 연기라 이해한 것이 중관이고
그것을 6근 6경으로 분해해서 존재론적 해석으로 끌고간것이 아비달마이며
그 연속선상에 있는것이 유식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유식은 아비달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식에서 5위 100법이라는 개념이 나온것 같습니다.
저는 전에 의문이었던것이 모든 것이 마음이라 한다면 왜 굳이 다시 유위와 무위를 구분하여
5위 100법을 유식이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었거든요.
있다 없다라는 흑백논리의 존재론적 사고의 틀에서는
무엇이 여전히 있다고 해야 겠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있냐? 마음이 만들어내서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언어적 사고의 틀에 매여 있으므로
즉 언어로는 어떻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언어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기에 언어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말씀하신 것인데
유식은 여전히 그 언어를 끌어안고 극단적으로 가다보니
일체유심조라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인데
연기적 사고에서는 12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너희가 보는 세상(한계점을 지적)이니라고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것인데
그 착오를 여전히 답습하는 것이 유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에 공부가 진척이 되면 조금씩 정리해보겠습니다.
첫댓글 남수영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임다
고맙습니다. _()_
달라이라마께서도 존재를 설명하는 견해에 있어 유식을 비판적으로 말씀하신적이 있었는데.. 존재론적 사고가 문제 이군요.
명상수행에 있어서는 티벳불교에서 유식 방법을 적극 받아들입니다. 특히 "영상관법"은 유식불교의 수행법인데 부처님을 관상하는 수행이 그것입니다.
존재론적 사고를 타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법은 "소리"입니다. 소리라는 현상이 바로 연기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현상이니까요. 범패는 바로 그 "소리"를 중심삼아 연기에 대해 사유하게끔하는 체험적이고도 직접적인 수행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소리이기에 일반적인 소리와는 결이 다릅니다. 범패의 성음이 미묘하게 변하는 "겹성"이 있는데 바로 그 겹성이 범패의 연기적표현의 극치입니다.
티벳에 관상법이 있다면 한국에는 범패가 있습니다. 범패는 체험적으로 연기를 경험하게 하는 매우 훌륭한 수행입니다. 또한 범패 자체가 연기이기에 종교의식의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염불은 동시적 의미를 갖습니다. 부처님의 상을 영상관상법으로 떠올리는 것을 염불이라 할수도 있지만 소리를 통해서 부처님을 말씀을 구현하는 것 또한 염불이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소리가 더 강한 연기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영상관법은 혼침같은 장애를 불러 일으키지만 소리에는 그 혼침 바로 타파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를 제대로 알고 범패를 구현하면 범패는 엄청난 불교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도원 또한 범패는 부처님의 말씀속의 진리와 신앙이 결합된 형식입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종합선물세트입니다.
범패는 연기이기에 염불, 수행, 종교의식을 넘어 훌륭한 예술이기도 합니다.
저는 법성게를 창작범패로 구현할 계획이 있는데 청운스님께서도 동참해주셔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