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6. 22
“새로운 것이란, 잊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최초의 디자이너로 일컬어지는 로즈 베르탱이 한 말이다. 흔히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한다. 그처럼 새로움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을 재해석·재발견한 것이라는 뜻이다. 올해 KBO리그가 딱 이 말에 어울린다. 시즌 개막 이래 팀별로 62경기에서 64경기를 치른 현재(이하 성적 등은 6월15일 기준)까지 각 팀에서 새로운 얼굴들의 활약이 크게 눈에 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순수 신인도 있지만, 입단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올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선수가 KIA 임기영이다. 2012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전체 18순위)로 한화에 입단한 뒤, 2014년까지 3년간 41경기에 나와 2승 3패 1홀드, 평균자책점 5.34의 성적을 남기는 데 그쳤다. 상무 입대를 앞두고 FA 보상 선수로 KIA로 이적할 때만 해도 유망주 유출에 대한 지적은 있었지만, FA로 영입한 송은범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그런데 상무에서 2년간 뛰고 돌아온 그의 활약은 국내 선수 가운데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차례 출장해(선발 등판은 11차례) 2차례 완봉승을 포함해 7승 2패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자책점 1.82는 리그 전체 1위이며 kt 피어밴드와 함께 유이(唯二)한 1점대 평균자책점이기도 하다. 단순히 성적만 좋은 게 아니다. 투구 내용도 빼어나다. 선발 등판한 11경기 가운데 퀄리티 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을 3자책점 이하로 막는 것)를 9차례 달성했으며, 경기당 평균 이닝도 6.2이닝에 이른다. 또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도 1.09로, 피어밴드와 한현희에 이은 전체 3위. 이것은 공격적인 투구로 볼넷을 적게 주는 효율적인 투구를 해 온 것을 나타낸다(9이닝당 볼넷 수 1.33).
▲ 왼쪽부터 KIA임기영,넥센 최원태, SK김동엽 / ⓒ 사진=연합뉴스
최원태·문승원·임현준·정용운 주목할 선수
그가 괄목상대한 모습을 보인 것은 여러 요인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2년간 상무에서 여유를 갖고 체력 향상에 힘쓴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도 지금의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송은범이 한화로 이적한 뒤 거둔 승수는 4승. 반면 임기영은 이미 이를 뛰어넘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만큼 한화 구단은 물론, 팬도 아쉬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성적에 목을 매면 그것이 부메랑이 돼 장래가 어두워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임기영만큼은 아니지만 마운드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는 새로운 얼굴로는 넥센 최원태도 빼놓을 수 없다. 2015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그는 지난해 1군에 데뷔해 17경기에 나와 2승 3패 평균자책점 7.23에 그쳤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와 구종이 단조로워 선발투수로는 한계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13경기에 나와 6승 6패, 평균자책점 5.38을 거두고 있다. 경기 초반에 크게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 평균자책점 등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퀄리티 스타트 7차례를 비롯해 완투에 버금가는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올해 좋은 투구 내용을 보이는 데는 투심 패스트볼을 주로 던진 것에 있다. 투심(two seam)은 포심 패스트볼(흔히들 말하는 직구)과 달리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휘거나 떨어진다. 즉, 공 끝 변화가 심해 타자가 정확하게 맞히기 어려운 구종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기본 구종 가운데 하나지만, KBO리그에서는 외국인 투수를 제외하곤 그렇게 던지는 투수가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희소성도 있어 타자를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 다만 투심의 위력이 경기에 따라 편차가 심한 것은 개선해 나갈 부분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구종이 단조롭다”며 “투심만이 아닌 포심도 섞어 던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만, 투심만 던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국외 투수 가운데는 투심만 던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제는 얼마만큼 수준 높은 투심을 고르게 던지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투심은 포심보다 구속이 느린 공이다. 그러므로 공 끝 변화가 없으면 포심보다 느린 공, 말하자면 ‘배팅볼’이 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투심의 위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지켜볼 부분이며 이에 따라 그의 성장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타석에선 ‘3김’ 맹활약
여기에 SK 문승원과 삼성 임현준, KIA 정용운 등도 주목할 선수다. 문승원은 2012년 1라운드(전체 8순위)로 입단한 뒤, 지난해 4승 4패 평균자책점 6.64에 그쳤다. 올해는 13경기에 나와 2승 5패 평균자책점 4.73을 기록 중이다. 눈에 띌 만한 성적은 아니지만, 5월 중순을 기준으로 투구 내용이 확연히 달라졌다. 5월16일까지는 제구가 흔들리며 평균자책점 6.64에 그쳤지만, 이후 5경기에서는 평균자책점 1.91을 기록하고 있다. 여전히 불안한 점은 있지만 시즌 중에 한두 단계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왼손 불펜투수인 임현준은 독특한 투구폼이 눈에 띈다. 이른바 ‘좌완 사이드암’이다. 다른 왼손 투수보다 팔이 낮은 만큼, 속구와 커브의 각이 달라 상대 타자들이 공략에 애를 먹고 있다. 2011년 입단해 지난해까지 통산 성적은 2승 무패 2홀드 평균자책점 6.57에 그쳤다. 올해는 4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하며 왼손 타자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왼손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믿을맨’ 자리를 노리고 있다.
왼손 투수 정용운은 ‘인간 승리의 주역’이다. 2009년에 입단해 부상 등으로 제대로 공을 던진 적이 드물었다. 지난해 평균자책점은 7.89. 여기에 그때까지 통산 성적도 26경기에 나와 승리 없이 2패 평균자책점 7.91에 그쳤다. 그런 그가 올해는 10경기에 나와 2승 무패 평균자책점 1.93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최근 2경기에서는 선발로 나와 잇달아 승리를 거두는 대활약을 펼쳤다. 야구 전문가 사이에서는 임기영과 함께 KIA의 ‘히트상품’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는 마운드뿐만이 아니라 타석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3김’이다. SK 김동엽, 삼성 김헌곤과 김정혁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교를 졸업한 뒤 미국 마이너리그에 갔다가 돌아온 김동엽은 지난해 타율 0.336, 6홈런, 23타점 등을 올렸다. 기대 이상의 타격 정확성을 보였지만, 변화구 등에 약점이 있고 포지션이 모호해 주전 자리를 꿰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김동엽은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힐만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좌익수로 주로 출장해 홈런 13개를 때려내며 ‘신흥 대포’로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상대의 집중 견제로 타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리그 최고라고 평가되는 ‘파워’가 건재해 장타력은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헌곤은 2011년에 입단해 삼성의 두터운 외야진을 뚫지 못한 채 가끔 1군에 올라와 대타나 대수비로 출장하는 선수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올해는 외야 한 자리를 꿰차며 타율 0.281, 4홈런, 32타점, 7도루 등을 기록하며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의 활약은 공격뿐만이 아니다. 수비에서도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허슬 플레이를 펼치며 여러 차례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팀 동료인 김정혁도 오랜 무명 생활을 끝내고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자주 받고 있다. 2011년에 입단해 지난해까지 모두 68경기에 나와 타율 0.214에 그쳤다. 그렇다고 수비가 좋지도, 발이 빠른 선수도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퓨처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선수였다. 그런 그가 주전 3루수인 이원석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자, 배트를 뜨겁게 휘두르고 있다. 14경기에 출장해 타율은 3할대(0.333)를 기록 중이다. 특히 득점권 타율이 높은 게(0.667) 눈에 띈다. 우리 나이로 33살. 내일도 유니폼을 입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다. 그 절실함이 한 타석 한 타석마다 묻어나고,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KBO리그를 더더욱 풍성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새로운 얼굴은 잊고 있던 선수들이 재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새로운 얼굴은 누가 있을까? 즉, 신인왕 후보들을 한 번 살펴보자. KBO리그에서 신인왕 자격은 ‘입단 5년 이내 선수 가운데 60타석 이하에 들어선 타자나 투구 이닝 30이닝 이하로 던진 투수’에게 주어진다. 2008년 이후 신인왕은 ‘중고 신인’이 독차지해 왔다. 그렇지만 올해는 다르다. 현재 성적으로 올해 신인왕을 예상하라고 하면 누구나 넥센 이정후를 꼽을 것이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아들이라 ‘바람의 손자’로 불리는 그는 현재까지 타율 0.317을 올리는 등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군계일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신인왕 ‘0’순위로 꼽히는 이정후(넥센) / ⓒ 사진=연합뉴스
‘바람의 손자’ 이정후 신인왕 경쟁 ‘군계일학’
그러나 시즌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한 야구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가장 큰 변수는 여름이다. 순수 신인이니만큼 체력적인 부분은 분명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여기에 상대의 철저한 분석을 이겨낼지도 지켜봐야 한다.” 즉, 아직 지각변동이 일어날 여지는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6월 들어 이정후의 타격감은 수은주와 반비례해 뚝 떨어지고 있다. 5월까지는 타율 0.343을 기록했지만, 6월 이후로는 0.217에 그치고 있다. 타격에는 사이클이 있는 만큼 더 지켜봐야 하지만 기세가 꺾인 것은 분명하다.
이정후를 위협할 후보로는 누가 있을까? 우선 같은 팀의 허정협이 있다. 2015년에 입단한 중고 신인으로, 현재 타율 0.269, 7홈런, 27타점 등을 기록 중이다. 5월 한 달 동안 타율 0.195로 부진했지만, 6월 들어 타율 0.273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4월29일 이후로 홈런이 나오지 않는 게 아쉬운 부분이다. “장타력만 살아난다면 이정후와 비교해도 뒤질 게 없다”는 평가도 들린다. 여기에 SK 조용호도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2014년 육성 선수로 입단한 뒤 한때는 야구를 그만두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올해 1군 무대에 데뷔해 타율 0.296을 올리며 리드오프로 활약하고 있다. 그의 장점은 출루 능력. 출루율 0.380을 기록 중이다. 타석당 투구 수는 4.12개로 끈질기게 투수를 괴롭히는 유형의 타자다. 또 야구판의 미생인 그가 쓰는 드라마는 전설의 아들 이정후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투수 가운데는 삼성 최충연이 눈에 띈다. 현재 평균자책점은 7.82. 제구 불안으로 몰매를 맞은 선발 때 성적이 포함됐다. 그는 6월 들어 불펜으로 전환해 6경기에 출장해 2승 1패 평균자책점 1.69를 거두고 있다. 이 성적을 계속 유지한다면 신인왕 후보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결국 신인왕 경쟁은 여름이 끝나봐야 어느 정도 답이 보일 듯하다. 결정이 난 듯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손윤 / 야구 칼럼니스트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