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렇게 마지막으로 불러본 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 버렸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부르고 보니 눈물이 고여 앞을 가릴 듯 하여 겨우 수습하고 이글을 씁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하직하신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70도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이르러 늙어 버린 딸이 이렇게 어머니 생각을 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언제 보아도 변 함 없는 큰 산처럼 무던하고 인심이 후덕하시여 언제나 기대고 싶어지는 분이셨습니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더 이상 진학을 못하고 한 동안 휴학을 한 후 겨우 복학하게 되었던 저의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경기도 광주에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오는 코스였는데 그 당시 아버지 월급으로는 나에게 그 비용을 주기는 힘든 형편이었나 보아요.
그 시절에는 공무원 월급은 아주 박봉이라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이웃집에서 제법 큰돈을 빌려다가 제 손에 들려 주셨어요.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 돈을 돌려주고 결국 그 여행에 가지를 못했지요. 빌려서까지 가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었어요. 그 후로 지금까지도 친구들 사이에서 그때 여행담이 오가면 마음이 항상 위축이 되고 마음이 언짢았지만 어머니가 보여 주신 그 따뜻함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위안을 받고는 했어요.
고3이 되었는데 맏딸인 나는 바로 밑 남동생들 학비 때문에 대학엘 못 가게 됐지요. 6.25직후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려운 때였지요. 너나없이 살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다행이 고등학교 졸업 무렵 학교에서 추천을 해 주어서 공채로 어려운 시험을 치루고 한국은행에 취직을 했었지요. 월급을 타면 봉투도 뜯어보지도 않은 채 몽땅 부모님께 갖다 드렸지요. 월급날이면 남대문 시장에서 설탕 세탁비누에 과자류를 한보따리 사가지고 가서 식구들을 즐겁게 해 드렸지요.
그때에는 어찌도 보너스를 자주 주었던지 직장 중에 최고의 직장이라 일컬었지요. 직장에 몇 년을 다니고 난후 때늦게 야간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아주 기뻤어요. 그 후 직장에서 신랑감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번 돈을 모두 부모님께 갖다 드렸음에도 불고하고 제가 결혼을 할 때 준비해 주신 혼수 이외에는 어떤 것도 더 해달라고 조르지를 않았지요. 부엌 혼수는 사무경연대회에서 탄 상품으로 대신했어요.
그때 만들어 주신 솜이불 두 채가 솜이 어찌 두꺼운지 나중에 세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 솜 한 채는 갈라내서 작은 이불을 만들어도 충분하리만치 두툼했어요. 할머니는 무슨 이불을 그리 무식하게 솜을 두껍게 놓느냐며 말리셨지요. 그래도 예전에 어머니가 결혼을 하실 때 친정 올케 밑에서 눈치 보며 만들어 준 혼수 이불솜이 너무 얇아서 고생을 하셨다며 어머니의 원을 푼다며 그리 만들어 주셨어요.
결혼 후 '네가 그때 돈을 벌어 모두 가져 다 주어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며 '딸이지만 너무 고맙다' 고 치하를 하셨지요. 나는 그때에 비로써 부모님께 조금은 효도를 했었구나 하며 마음속으로 기뻤어요. 제가 신랑과 함께 가정을 일구고 세 아이들을 잘 키워서 이렇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모두 지하에 계신 어머니의 보살핌 덕인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젊은 한때 경춘선으로 기차를 타고 무거운 쌀을 싣고 오가며 쌀장사를 하며 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 짐꾼이 쌀부대를 객차걸상 밑에 실어 넣어주고 춘천에 도착하면 다시 짐꾼이 쌀 푸대를 내려 실어가곤 했다지만 그 고생이 여간 하셨겠어요. 더구나 늦게 난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다니시면서 하신 그때 고생으로 해서 몸이 아프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오랜 동안 편찮으신 중에 생애에 마지막인가 싶은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집,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사는 외갓집 동리로 다니러 가셨던 것이지요.
충남 대전 가까운 시골 한 우물(大井里). 태어나서 시집오기 전까지 뛰어 놀며 자란 어린 시절 고향집이지요. 외조부모님은 벌써 돌아 가셔서 계시지 않지만 친정 조카들이 살고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그곳 고향산천이 그리우셨던 모양이지요?
그 곳에는 며칠 간 유하셨습니다. 그 친정 조카는 맨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공부를 할 때에 우리 집에 한 동안 데리고 있던 적이 있었지요. 그곳에 머무를 동안 아버지는 그 처조카네 고장 난 부엌 연탄아궁이도 고쳐 주고 집안 이곳저곳 손질을 해 주면서 지나셨다 하셨어요. 아버지도 옛날 처갓집이란 생각에 그리하신 모입니다. 평생 공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평소 그런 낯선 일을 하신 적은 없으셨지요.
한편 그 당시 어머니의 사위는 그 근방 대전 지점근무를 하고 있었지요. 그때 나는 서 대전 근처 친척 집에 무슨 혼사 일이 있었던지 다니러 갔던 것 같아요. 어머니 아버지와 저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역에서 뜻밖의 해후를 해서 같은 기차를 타게 됐었지요. 삽 십여 년이 지난 일이라 지금 생각하면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서대전역에서 완행열차를 탔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서 건너 편 빈자리에 앉으셨어요. 어머니와 나는 같은자리에 마주 보고 앉게 되었어요. 차가 떠났어요. 그 때 마침 기차간을 돌아다니며 간식을 파는 홍익판매원이 지나갔어요. 어머니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옆 사람과 담소를 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여보”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부르셨어요. 나는 어디가 더 편찮으신가? 왜 아버지를 부르실까? 하고 생각을 했었지요. 아버지가
"왜 그래요? 어디 더 아파요?”하고 황급히 달려 오셨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가리키며 얘, 사이다하고 무어 맛있는 것 좀 사 먹여요.”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어요. 그때 나는 사십을 넘어 아이들을 셋이나 낳아서 한참 키우고 있었거든요. 나대로는 어른이었지요.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나를 아직도 품안에 놀던 어린 딸로 여기셨던 모양이어요. 내가 사드려야 될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주신 사이다를 마시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었던지...
그런 게 부모님의 마음이란 것을 한참 후 깨닫게 되었어요.
그게 어머니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내가 친정에 다니러 가면서 소고기나 무얼 사들고 가면 돌아 갈 때 꼭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눈울 꿈적 하시며 '너도 어려운데 가져가거라.' 하고 꼭 돈을 손에 쥐어 주셨어요.
그 사랑이 어찌도 마음속 깊이 박혔는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가없어요. 그래서 저도 아이들이 다니러 오면 꼭 차 기름 값을 쥐어 주지요. 매번 그때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요.
어머니가 두 살 연상이셨던 두 분은 유난히 부부간의 금술이 좋으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몇 년간 홀로 남아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젊었던 저는 아버지의 그 외로움을 미쳐 깨닫지 못 했었어요.
이제 제가 바로 그 나이에 이르렀어요.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해가 갈수록 부모님의 그 따뜻하고 크신 사랑에 마음속으로 눈물겨워 짐을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 이렇게 나이를 먹고는 너무 늙어서 묘지에도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를 짓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부디 지하에서 편안한 영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2011년 3월 불초 여식 용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