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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에 가서 강의하다
세계일보 오피니언 [삶과문화]
벽 안에서 글 쓰는 사람들과의 만남
이승하
교도소서 詩 가르친 게 인연 /
수용자 문예지 심사만 8년째 /
가슴 아픈 사연 석달마다 접해 /
그때마다 힘이 돼야지 다짐도
머리를 깎고 사는 사람들, 청색과 갈색 두 가지 색깔의 옷만 입고 사는 사람들,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고 사는 사람들, 어느 시대인데 고무신을 신고 사는 사람들…. 이런 이들을 가리켜 전에는 재소자라고 불렀는데 법무부에서 요즘엔 수용자라고 부른다.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이란 뜻이리라.
10년 좀 더 된 것 같다. 안양교도소를 시발로 수도권에 있는 교도소와 구치소, 소년원 10여 군데에 가서 시란 이런 것이고 이렇게 쓰면 된다고 가르쳐 왔다. ‘시 치료 프로그램 지도교수’란 타이틀을 갖고 수용자들을 만난 세월이 10년이 넘었다.
요청을 받고 응하긴 했지만 사실 두려운 일이었다. 연쇄살인범 아무개가 나를 째려본다면? 대학교수면 완전히 금수저네. 우리한테 시작법을 가르친다고? 우리한테 시시껄렁한 소리 늘어놓으면 엉뚱한 질문을 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거의 못 자고 첫 번째 날을 맞았다.
2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었다. 방송을 미리 해 이 프로그램을 듣고자 하는 사람만 추려서 모여 있다고 교위인지 교사인지 직급을 갖고 있는 교도관이 설명을 해주었다.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연쇄살인범은 없겠구나. 교도관은 내게 주의를 주었다. 죄명은 결코 질문하지 마십시오. 여기 오기 전에 뭘 하셨습니까? 같은 질문도 하면 안 됩니다. 형기도 묻지 마십시오.
20대부터 60대까지의 수용자들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 넥타이를 매지 말고 올 것을. 양복을 빼입고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막급이었지만 정신을 수습해 시 쓰기의 기초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시 쓰기에 겁을 먹지 마시라고, 내 마음을 잘 전달하면 된다고. 준비해 간 윤동주의 시를 나눠주었고, 이 땅의 짧고 쉬운 서정시들을 소개하였다. 숙제를 내주었다. 시를 써 오십시오. 다음 시간부터는 여러분의 시를 갖고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얼굴에 근심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거의 전원이 숙제를 해온 것이었다. 그때부터 울며 웃으며 수업이 진행되었다. 내 이야기도 좀 했다. 고등학교 때 퇴학을 당했다, 서울ㆍ부산ㆍ대구가 다 나의 가출지다. 정신병원에 20년 넘게 면회를 다니고 있는데 그런 곳에 비하면 여기는 완전히 천국이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여러 번 만나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여기 계시면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 김밥, 라면, 자장면, 짬뽕, 생맥주 한 잔……. 바깥세상에서는 나무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그들은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오시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은 떡을 사 오시는데…. 교수양반 월급도 많이 받을 텐데……. 그이는 소보루빵을 먹고 싶다고 해서 크림이 든 것, 팥이 든 것까지 한 보따리 사서 풀었다. 갖고 간 음료병 반입이 안 된다고 해서 놀랐다. 흉기로 사용될 수 있다니, 역시 살벌한 곳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 주소를 가르쳐주며 시를 계속 쓰시라, 얼마든지 첨삭지도를 해드리겠다고 약속한다. 편지가 너덧 번 오지만 시 쓰기가 멈춰지면서 그들의 편지도 끊기고 만다. 하지만 시를 읽다가 엉엉 운 기억, 시를 잘 썼다고 칭찬을 받은 기억, 시 한 편을 읽으니 동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준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2012년부터 수용자 문예지 『새길』의 심사를 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읽은 가슴 아픈 사연은 20대 수용자가 쓴 수필이다. 친구가 면회를 왔다. 조심스레 꺼낸 말은 어머니의 부고였다. 면회를 마치고 감방으로 돌아간 그 젊은이가 꺼이꺼이 우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5세 젊은 나이에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죽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수용자의 글도 가슴을 아프게 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때문에 숨어서 술을 마시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3개월에 한 번씩 접하면서 나는 다짐한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지.
(2020.5.22)
대산문화재단, 이승하 시인과 함께한 ‘사랑과 치유의 시학’ 공감행사 성료
[뉴스페이퍼 = 이민우 기자]
대산문화재단과 교보문고, 서울시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수요낭독공감은 시인과 시민이 서점에서 만나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낭송하는 문학행사다. 지난 25일 진행된 10월의 마지막 수요낭독공감에서는 한국문예창작학회 주관으로 재소자와 소년원 아이들이 쓴 시를 낭송하는 ‘사랑과 치유의 시학’이 진행됐다.
행사장에는 중앙대학교 교수이자 소년원을 다니며 치유를 쓴 시를 쓴 이승하 시인과 손옥자, 허전, 서경숙, 이지호 시인 등이 참여하여 자리를 빛냈다. 이들은 모두 교도소, 소년원 등을 다니며 시를 가르치거나 시를 심사하고 시 치료를 행하는 등 시를 통해 마음이 아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해오고 있다.
이승하 시인이 교도소 안에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행사에 앞서 이승하 시인은 성인 교도소 시설과 소년원을 다니며 재소자 및 청소년들에게 시를 가르치며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했다. 성인 교도소 시설에 있는 이들에게는 처음에는 큰 단절감을 느끼지만 어머니의 생애, 인생 스토리 등을 이야기하면 딴전을 피우던 재소자들의 시선이 맞춰지더라는 것이다. 반면 소년원을 방문했을 때에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표현하였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보고싶어 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느껴보지 못하는 아이들이구나.”라고 생각했다며 “바로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하며 가르침을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손옥자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 이민우 기자
시인이자 2008년부터 교도소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하고 있는 손옥자 씨는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며 시 창작을 해오며 겪은 사건과 느낀 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많은 재소자들이 “마음의 팔짱을 끼고 빗장을 안 열고 ‘그래 한번 해봐.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식으로 나온다.”고 말한 손옥자 씨는 “이때 우리도 당신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시는 열어야 나오는 것이며, 우리 일의 목적은 그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열고 분노를 가라앉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가장 먼저 그들을 존대하며 교육을 시작한다고 말한 손옥자 씨는 “맨날 번호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이름과 선생님을 붙이고 절대 하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니 어떤 분은 ‘우리도 사람이었다’라는 제목의 시를 낸 적이 있다.”며 그 시를 통해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허전 시인은 교도소에서 시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의 이름이 “나를 가두고 나서야 세상이 넓게 보인다”였다며 이런 이름이 정해지게 경위와 교도소에서 시를 가르치며 느꼈던 것 등을 이야기했으며 시를 낭송했다.
서경숙 시인이 자신의 경험과 치료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를 통해 심리치료를 하는 서경숙 시인은 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심리학을 박사까지 수료한 시 치료 박사 1호이기도 하다. 서경숙 시인은 “시 치료란 글쓰기 작업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하고 감정을 표현하게 해 자신의 삶을 변화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라며 안양교도소에서 시를 통해 마음을 치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방송 자료를 통해 이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각각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심리가 어떠한 억압을 받았는지 설명하고 그 억압이 어떻게 해소되며 자기 상처를 치료하게 됐는지를 설명한 서경숙 시인은 “분노하고 좌절하던 이들이 시 치료를 통해 용서를 구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걸 깨닫는다.”고 이야기했다.
이지호 시인은 이승하 시인과 함께 2012년부터 재소자들의 종합문예지 『새길』의 투고작품을 심사하고 있다. 5만여 명의 재소자들이 보내온 작품 중 서간문, 독후감, 감상문 등을 심사하고 심사평을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지호 시인은 심사를 하며 느꼈던 감상을 이야기했다.
행사 말미에 소년원 아이들이 쓴 시를 가져와 김효숙 문학평론가 등과 시를 낭송한 이승하 시인은 “시적인 요소들이 부족하지만 진솔하다고 할까, 울림과 떨림이 있는 시를 아이들이 쓰고 있다.”며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든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시를 쓰기 전과 후가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시를 교육하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이야기했다. 짤막한 몇 줄의 언어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재소자들은 시를 우리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쓰는 게 아니다. 책상 없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볼펜으로 쓴다. 자투리 시간을 내 무릎 꿇은 자세로 웅크리고 작품을 쓴다.”며 이들을 반면교사로 치열하게 시를 써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갇혀 있는 자들은 자신의 사연, 사정, 억눌림을 표현만 할 수 있어도 감격을 하고 크게 깨닫는다.”며 “자작시를 낭송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봉사하는 기쁨이 클 따름”이라고 향후에도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끝으로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인들은 “시를 씀으로써 영혼의 자유를 누리도록 인도해주는 이들 선생님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취지의 소감을 밝혔다.
한편 행사가 끝난 이후에는 이승하 시인의 수필집 『시가 있는 편지』에 대한 사인회가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문학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어떠한 답이 되는 자리였다. 이 행사에는 이승하 시인의 제자들을 비롯해 시를 통해 어떻게 상처받은 이들을 구원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다.
(2017.11.1)
한국문협 강북지부 문학강연 개최!
이승하 시인, ‘재소자와 소년원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다’
응달에 있는 이들에게도 빛을 전해줄 수 있어야
지난 8일 한 카페에서 한국문인협회 강북지부가 주최하는 문학강연이 개최됐다. 사회를 맡은 국중홍 시인은 “문우들에게서 이승하 선생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모시게 되어 감사하다.”며 이승하 시인의 이름으로 삼행시 노래를 선보이며 즐거운 시작을 알렸다.
강연을 진행한 이승하 시인은 약 10년간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에 시 창작 수업을 이어온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10년 전, 안양교도소 소장님의 부탁을 받아 처음으로 교도소 내 시 창작 교육을 하게 됐다. 이승하 시인은 당시를 떠올리며 “방문 전날 했던 우려와 달라 이웃집 아저씨, 총각 같은 외모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강연 중인 이승하 시인
첫날 시인이 교도소 안에 들어서야 대부분 재소자는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고 한다. 시인은 “멀끔하게 입고 온 나를 보며 ‘우리랑은 살아온 모든 게 다른 너는 우리의 입장과 처지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시를 쓰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난감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시인과 그의 어머니가 살아온 험난한 생애를 이야기하자 금세 달라졌다.
‘여러분 저는 고등학교를 퇴학당했습니다. 집의 돈을 훔쳐 가출한 후 서울 구경을 처음 해보았습니다. 광화문 독서실에서 웅크려 자며 가출 청소년으로 10대 후반을 보냈습니다. 대한민국의 큰 도시 대부분이 제 가출 장소였습니다.’
그제야 재소자들의 눈빛이 이승하 시인을 향했다. 그는 자신의 내밀한 삶을 전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갔다. 시인은 명석한 머리로 경성여자사범학교에 진학하지만 한국전쟁 시기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납북으로 소녀 가장이 된 어머니의 이야기부터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에 관한 내용까지를 모두 풀어냈다.
“여러분, 형사나 경찰 싫어하시죠? 제 아버지가 20년 넘게 재직한 경찰관입니다. 제 형은 여섯 살 때 신문을 읽을 정도로 수재였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도 손쉽게 들어가서 대학교 2학년 때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죠. 이 무렵 아버지는 경찰관을 그만두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아버지는 직업이 없고,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와 가게를 꾸렸습니다. 그러던 중, 형이 폭탄선언을 합니다. ‘나는 법조계로 가지 않겠다.’ 큰 병에 걸린 것이죠. 이른바 ‘문학병’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형 대신 아버지의 화와 매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쯤 집을 나왔어요.”
시인의 진솔한 이야기에 재소자들은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승하 시인은 윤동주의 시편을 소개하며 시가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윤동주 시집에 실린 동시처럼 ‘소박한 아이의 생각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그는 재소자들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써볼 것을 주문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기뻤던 일’, ‘어머니와의 기억’ 등 가깝게 연상할 수 있는 주제를 내주었다.
다음 수업 때, 놀랍게도 수업을 듣는 재소자 전원이 숙제를 해왔다. 몇몇 재소자는 낭독 중간에 눈물이 북받쳐 동료 재소자가 대신 읽기도 했다. 이승하 시인은 “한 주 한 주 변해가는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시가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를 실감했다. 대학 강단에서도 못 느꼈던 감정을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
재소자들과 있었던 소소한 일화도 소개됐다. 하루는 무슨 이야길 해줄까 하고 갔는데 60대 후반의 재소자가 원망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 저희 가르치러 오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은 떡을 잘 해오시는데 교수님은 월급도 많으면서 어떻게 한 번도 뭐를 안 사 오세요?’ 말을 들은 시인은 ‘잘못했나 보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를 물었다. ‘어릴 때 먹었던 소보로빵’이 먹고 싶다는 대답에 이승하 시인은 빵을 한 아름 짊어지고 가는가 하면, 유명 프랜차이즈의 빵을 궁금해하는 재소자들의 주문을 받아 다시 전달하기도 했다.
시인은 “장기수들의 경우 그들의 집과 방은 교도소 안이다.”라며 “가슴 아픈 사연부터 사소한 이야기까지, 몇 주 몇 달을 지내다 보면 정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출소해도 갈 곳이 없다고 한다
기다리고 있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 한다
아주 큰 집인 여기
철커덩
철문 닫히는 소리
일곱 개가 닫혀야
방에 갈 수 있다 나올 수 있다
내 집, 나의 방
ㅡ이승하 시인의 「집」 전문
시 창작 수업이 끝나는 날 시인은 “지금까지 시를 열심히 써오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써서 보여주세요. 제가 나간다고 중단하지 말고 보내주세요. 첨삭지도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주소를 적었다. 수강생 20명 가운데 대여섯 명은 한동안 열심히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중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해진 한 재소자는 제법 시를 잘 써 시인이 열심히 첨삭을 지도했다. 그러나 실력이 주춤하던 어느 날 시인이 건넨 충고 이후로 답장이 오지 않는다. 강연에서 이승하 시인은 편지 건너편에 있을 재소자의 상황을 헤아렸다.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시를 쓰는 재소자의 사정을 이해한 것이다.
문학 강연 현장
이승하 시인은 춘천소년원에서의 경험도 이야기했다. 어머니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던 성인 교도소와는 달리 소년원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이승하 시인이 ‘엄마랑 있었던 일 중 기억 나는 일’을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 엄마 새 아빠랑 잘살고 있을걸요? 여기 한 번도 면회도 안 왔어요. 외국에 가셨는데, 전 잊어버렸어요.’
시인은 현재 우리나라 소년원 재소자 중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서도 전과자가 된다는 점을 언급하며 “부모의 따뜻한 손길이나 품을 겪지 못한 아이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것이 어른들의 몫”임을 주지했다. 그는 이어 “소년원에서 개최된 백일장에서 상을 탄 아이들의 대부분은 상은커녕 칭찬조차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라며 “면회 온 엄마에게 자랑할 것이 생기고 표정이 밝아지기도 했다. 한 편의 시로 그 아이와 가족의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사회가 밝아지려면 응달의 아이들에게도 빛이 가야 한다는 것이 이승하 시인의 생각이다.
내 아이 열일곱 그중 7년을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은 나
집에 안 들어가고 방황을 하던 나
훔치고 때리고 빼앗을 때마다
부모님 가슴에 하나하나 박히던 못
이제 나의 꿈은
그 못을 하나하나 빼는 것이다
ㅡ소년원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은 「꿈」전문
10여 년의 시간 동안 수백 명의 재소자를 만난 이승하 시인은 강연 말미 “벽 속의 사람들이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수용자 종합 문예지 『새길』과 소년원 재소자들의 시 모음집 『꿈을 향하여 날아오르다』을 들어 보였다. 『꿈을 향하여 날아오르다』의 경우 발간비를 후원하던 삼성꿈장학재단의 지원이 끊긴 관계로 단 두 권의 책만이 출간되었다.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새길』은 1948년 4월 1일 창간호를 냈으며 최근 통권 450호를 발간했다.
2012년부터 『새길』의 심사를 보고 있는 시인은 “새길은 오로지 재소자들과 교도소 안에서 생활하는 교도관들, 법무부의 몇몇 인사만이 볼 수 있는 계간지다. 계절마다 전국의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의 사람들이 쓴 테마 수필과 용서의 글 100편 정도가 모인다.”며 곳곳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연을 접한 경험을 전했다.
그는 이어 시상이 떠오르면 깊숙이 몰두하는 자신의 버릇과 이로 인해 면허를 따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며 “운전을 하다 시상이 떠올랐다면 나 역시 교도소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누구든 한순간의 잘못으로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직시한 부분이다.
이승하 시인은 “우리는 어떠한 이유들로 교도소에 다녀온 사람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지며 “그들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다독여주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시인은 끝으로 소외된 이들을 대하는 문학인들의 자세를 나누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여러분은 이 지역의 소중한 문학인들입니다. 창간호 『강북 문학』과 함께 앞으로 이 문학회가 큰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글을 읽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가 되면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소외된 이들이 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