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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서술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그래서 반성(réflextion)으로서 철학에 대한 물음, 철학이 나아갈 방식, 철학이 제기한 물음, 그리고 심리학의 실험과 다른 반성의 경험에서 얻어진 실증에 대한 반성으로서 학문 규정 등을 통하여 철학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라슐리에(J. Lachelier 1832-1918)가 "철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서, "나는 모른다"고 대답한 그의 첫 강의를 한 사례로서 들면서 시작한다. 이 대답은 플라톤(Platon BC 428-348)이 제시하듯이, '철학의 시작이 놀람에서 시작한다'는 것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철학은 알려는 노력이다. 즉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철학하는(philolopher) 것이다. 알려는 것, 그것은 철학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좀더 설명하면 철학은 수학의 증명도 논리학의 논증도 제반 과학의 방법론으로서 인식론도 아니다. 또한 철학은 하나의 체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체계 또는 상이한 위상의 여러 체계가 있을 수 있다. 마치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8-1274)의 철학 체계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철학체계는 상반되며, 스피노자의 철학체계는 근세철학의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와는 다른 위상에 있으며, 들뢰즈(Deleuze)의 체계처럼 의미에 따른 위상체계를 세울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철학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그 무엇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탐구는 기존 내용에 대한 끊임없는 새로운 문제제기이다. 결국, 철학자는 올바른 진리를 찾아 나선 진리의 순례자이며 진리를 갈망하는 구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의 구도자와 다르다.
철학이 무엇을 탐구한다고 할 때, 철학은 이미 주어진 지식에 대한 반성을 뜻한다. 말하자면 어떤 주어진 자료들(les données)이 있고, 그 자료에 대한 반성이다. 이 자료는 우선 기술되고 전승되는 문헌자료와 실험자료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인간의 실천을 통한 구체적으로 얻어진 경험이다. 대부분 탐구와 반성의 시작에서 문헌과 실험자료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배우는 자가 인류의 역사과정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반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접경험인 이차적 자료일지라도 인류가 일차적 경험과 실행에서 얻어진 것을 전수하기 위하여 개념화 한 것이다. 철학은 일차적이건 이차적이건 경험적 자료들에서부터 출발한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메논 편에서 메논과 덕에 관한 대화를 한다. 메논이 덕에 관한 구체적 행위의 예를 제시하며, '덕이란 명령(지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그 예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나아가 메논이 덕에 대한 추상적이며 개념화된 지식을 제시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지식(체계)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하는 반어법(ironie)을 사용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지식을 전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논이 '지식'을 낳도록, 즉 지식을 스스로 생산하도록 돕는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식을 산파술(maieutique)이라 부른다. 이처럼 철학의 탐구는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힘(puissance)', 곧 능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결국 '덕'이란 어떤 행위가 총체적으로 잘 발휘된 경우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은 이런 의미를 잘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에서 배운다는 것은 명령(지시)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노력의 실현은 철학적 지혜보다 기술이 더 많은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햐면 한편으로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지혜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순응하며 인간의 운명(숙명)의 불가피함에 대해 체념의 미덕을 가르쳤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라고 했고,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제3부에서 임시적 도덕을 말하면서 기존도덕을 따르라고 했고 [스피노자의 철학은 숙명론의 철학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정복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상을 심었다. 르네상스와 16세기이후 지리상의 발견, 17세기에 데카르트의 다른 측면으로 『방법서설』 제6장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18세기에 디드로는 생산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보았다. 19세기에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20세기의 현대과학은 인간을 힘을 극대화 시켰다. 그러나 이런 기술의 발전(핵무기와 유전자 조작)이 인간의 생존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런 기술의 발전에 대한 반성에서 과학과 기술은 인간 행위의 방향과 목표에 대해 침묵하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환상을 남발한다. 그래서 철학은 인간행위의 미래(지향)예측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가치의 문제, 인간의 행복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실천이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천철학에는 사회철학, 법철학, 문화철학, 윤리학 등을 포함시킬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있다하더라도 이 발전의 근원에서 원인 제공은 인간(노동, 노력)이다. '인간'에 대한 반성은 철학의 또 다른 주요한 과제이다. 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지식의 축적과 활용적인 측면에서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생활 환경(삶의 양식)에서 개별적 행위 양태로서 실천적으로 등을 여기서 세부적인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칸트가 제시한 물음,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순수이성비판, 이 책에서 3권을 중심으로: 개별 과학론, 인식론을 중심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천이성비판, 이 책에서 4권을 중심으로; 실천론, 도덕론)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판단력 비판, 이 책에서의 제1권에서, 문화론, 상부구조론, 종교[구원]론), 그래서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2권을 중심으로, 인간론, 행복론)를 묻게된다, 철학자는 존재 인식 실천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탈레스가 천문을 보고 걷다가 발 밑의 도랑을 보지 못하여 실수한 것을 하녀가 비웃듯이, 일반인들은 철학자가 현실을 모른다고들 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폴리테이아편』제7권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밝은 이데아 세계를 보고 온 철학자가 어두운 동굴의 죄수 곁으로 왔을 때 어둠에 익숙하지 않아서 조롱당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철학자도 곧 어두운 동굴에 익숙하여 밝은 세계의 삶을 죄수에게 보다 잘 설명하려 할 것이다. [* 이 우화에는 여러 비유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로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라는 이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면, 두 세계란 상반된 두 체계의 의미로 드러난다. 또 다른 하나로는 이데아세계를 인간의 환상의 산물로 비유하면서, 이 어둠의 깊숙한 부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기괴한 괴물로 여기는 것을 프로이트처럼 우리의 본성의 내면의식(무의식)으로 바꾸어 친숙한 옛 향수(과거에 실수로 저지른 사랑의 추억에 대한 향수처럼)로 바꾸어 탐구하거나, 들뢰즈가 말하듯이 끊임없이 변장하는 괴물과 같은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비밀스런 자아로서 인간 영혼의 끊임없는 활동이라 볼 수 있다.]
여럿이지만 대비되고 상반된 두 세계라는 의미는 인간의식에서 형성되고, 이런 경우는 인간의 삶의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좌파의 삶과 우파의 삶은 체계의 상반성을 넘어서, 삶의 태도에서도 의식에서도 다르다. 생활세계에 차이는 의식의 차이이며, 심리학의 실제적 과제와 문제제기의 차이이다. 1960년대 이후에 개체의 의식 사태의 발생 지점을 두뇌의 각 부위에서 그리고 유전자의 해명의 발달로 유전자에서 기억의 현상을 각 부분에 대응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심리학이 행한 실험과 관찰에 의한 실증은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이 문제삼는 한 인간의 (이상한)독특한 경험이 다른 경험자의 삶과 달리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에 심리학에 대한 반성은 아직도 계속된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은 무의식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무의식은 기억과 직접관련이 있으며, 인간이 지나온 과정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철학은 인간의 전생의 업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의 경우에도 개별과학으로서의 실험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이 무의식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전해준 징후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면,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에 대한 반성으로서 철학은 무의식의 세계가 표출하는 다양한 공상(fantasme)의 이야기(시나리오)가 의미 있다는 것을 다룬다. [들뢰즈의 의미논리는 인지와 실험에 대한 논리가 아니라, 시나리오 에 대한 논리이다.] 철학은 이 시나리오가 왜 현상 또는 모습으로 표현될 때, 표현하는 것(내적세계)의 의미와 표현된 것(외적인 세계)의 의미가 다른가? [이런 것은 언어학에서 기의와 기표의 차이 이상으로 다르다.] 말하자면 가능한 시나리오 또는 가능한 생활 세계가 여럿 있는데, 왜 인도 생활세계라는 가능 시나리오, 중국의 생활 세계의 가능, 회교권의 생활세계의 가능, 미국세계의 가능, 유럽세계의 가능 등의 시나리오로 표출되는가에 대한 답은 없듯이, 참신한 아침의 나라(조선)의 가능세계의 시나리오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그 지정학적 위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밀스런 괴물에 친숙할 때 분명하게 그 시나리오가 표출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현대철학에서 내재적 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계보는 프로이트보다 먼저 내재적 의식의 문제를 질료 형이상학적(경험적으로 실증적으로)제시하고 프로이트의 작업 의의를 일찍 눈치채고 평가한 베르그송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재 의식과 신체 표면과 만남을 지각으로 다룬 메를로-퐁티 거쳐서, 프로이트의 수용하면서도 재해석하며 외부로 실현하려는 양태의 문제에로 확장한 라깡의 길을 가거나, 스피노자와 니체의 사상을 받아들여 인간 경험을 통한 내재의식의 발현을 설명하려는 들뢰즈로 나아갈 것이다.
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계속된다는 것은 원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햐면, 철학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이고, 또한 그 답들에 대한 반성 중이며,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을 '하나의 학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학문들 모두를 섭렵하면서 그들을 반성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너무나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철학이란 학문도 수학들(mathematiques)처럼 "철학들(les philosphies)"이라고 복수를 써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과학의 한 분과에 대한 반성과 검토는 분과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면 철학이 설 위치가 있는가? 철학이 각 분과 학문의 반성(메타)으로서 학문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라나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직접적 관련에서이다. 어쩌면 앞선 한 세대가 세계관이라고 말했듯이, 이제는 인생관에 대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한 태도는 한 인간의 삶을 통털어 보아야 이해된다. 이런 인간에 대한 통찰은 인생과정의 전반적 성찰을 요구한다. 한 인생에서 시대와 역사가 부여 해주는 바와 다른 모습으로 비치는 경우도 무수히 많이 있다. 이런 상반된 모습을 보듯이, 한 사회와 역사에도 상반된 모습이 있어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어느 쪽만이 보이도록 서술되고 정리되며, 심지어는 사례에서도 그들의 것들만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거의 허무에 가까운 사례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하찮은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듯이, 역사 속에도 마찬가지로 주목받지 못한 사례가 다음시대의 주요 문제로 부각되는 경우를 보면서 지나온 역사과정에서 제기 되었으나 묻혀 버린 것을 다시 찾는 반성도 한다. 마치 민주화에서 불가사의한 죽음(소위 의문사)으로 사라진 자를 다시 복원시키듯이, 반성으로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다. 그러한 것이 무엇일까? 우선 인간이 '자기를 소중히 여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애가 보존되기 위해 인간들 사이의 '인간애'가 필수적이라는 반성에서 이 '그 무엇'에 대한 대답도 찾아야 할 것이다. 반성 없이는 인류가 없을 것이고 철학도 무용지물 일 것이다.
철학에서 인생과 역사는 주요 반성의 대상이다. 과거(역사)의 문제에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그 시대의 위상과 문제 해결책을 말해주듯이, 우리 시대에도 지정학적 위상에 따른 새로운 문제제기를 통하여 철학적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인생과 역사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새롭게 문제제기를 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춘다는 것이 삶의 자세이자 철학적 태도일 것이다. - 소위 말하는 개인상담과 같은 개똥철학도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을 반성하고 시대적 위상을 규명해 본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철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