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의 유래
대금은 신라시대의 대표적 악기인 삼현(三鉉)거문고, 가야금, 향비파과 삼죽(三竹)대금, 중금, 소금중의 하나로서 대나무로 만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악기 중의 하나이다. 대금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은 삼국사 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악지,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에 여러가지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서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전한다. 신라 제 31대 신문대왕은 개요원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여 선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 였다. 그 이듬해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 한 가운데에 작은 산이 떠서, 물결을 따라 감은사(感恩寺)를 행해 떠 온다는 보고를 하였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일관(日官)인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쳐보도록 하였는데 점을 친 결과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나라를 보호하시고 문무왕과 김유신 두 성군이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 주시려하니, 만일 왕께서 해변에 가시면 반드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시리라는 풀이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에 행차하여 사람을 보내고 그 작은 산을 살펴보게 하니, 산의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를 닮았고 또 산위에 대나무가 하나 있는데 낮에는 둘이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아뢰었다. 왕은 그날밤 감은사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 대나무가 합하여 지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불고 비가오며, 암흑의 날이 7일간이나 계속되다가 그달 16일에 가서야 비로소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고 와서 받치는지라, 왕이 용을 영접하여 같이 앉아서
물어 가로되 '이 산의 대나무는 나누어지기도하고 합하여지기도하는데 그 연유가 무엇이오' 라고 물으니, 용이 대답하기를 '한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않고, 두손으로 손뼉을 쳐야 소리가 나는것처럼 이 대란
물건도 합한 연후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하며,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 대나무를 베어 저[笛]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다.' '지금 왕의 선친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왕(聖王)께서 마음을 같이하여 이 큰 보물을 주시어 나로하여금 갖다 바치게 한 것이라' 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금채(錦彩)와 금과 옥을 주고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서 나오매 산과 용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이때 태자인 효소대왕은 궁궐을 지키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왕에게 하례를 드리면서 서서히 살펴보고 아뢰기를 '이 옥대(玉帶)의 여러쪽이 다 진짜 용이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를 아는가'하고 물으니 태자가 대답하기를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소서' 하였다. 이에 왼편 둘째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하였다.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 로 저[笛]를 만들어 월성(月星)에 있는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는데, 이 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오면 개이며,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도 평온하여 졌다. 그래서 이 저를 이름하여 만파식적이라하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때 이르러화랑(花 郞)인 부례랑(夫禮郞)이 기적적으로 살아오게 되니 이러한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을 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보인다. 이와같은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잠재우게 한다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짓고 국보급의 신기(神器)로써 취급했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를 근거로 해서 대금의 기원을 신라시대로 삼는이도 있으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펴져서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하는데 표준악기로 삼아왔다.
◆ 대금의종류
대금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 두 종류가 있다. 정악대금은 [풍류대금]이라고도 부르고, 산조대금은 [시나위 젓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원래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대금은 정악 대금 한 가지였다. 따라서 그냥 대금으로 불리던 이 악기는 후대에 산조 대금이 개량되어 만들어 지면서 구분의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전에 있던 대금은 정악 대금이라고 부르고 새로 개량된 대금은 산조 대금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시나위와 같은 민속음악의 연주에도 정악 대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악은 정악에 비해 악곡의 전체 음정이 보통 단3도 정도 높은데, 이러한 민속악의 연주에 적합하도록 악기를 개량한 것이 산조대금이다.
18세기말 주로 남도(南道)지방을 중심으로 한 무속(巫俗)음악에 기원을 둔 시나위와 판소리가 점차 발달되면서 산조음악이 탄생되는데, 산조대금이 정악대금을 모방하여 만든것이 분명하나 누구에 의해서
언제부터 불리워졌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종기(朴鐘基:1879~1939)시대는 정악대금을 그대로 사용하여 산조나 시나위 등을 연주하였다. 그 이후 한주환(韓周煥:1904~1963) 시대에 와서는 산조음악이 완성되고 악기도 현재와 같이 짧아진다. 산조대금은 정악 대금에 비해서 악기의 길이가 짧고, 지공의 간격이 좁으며 취구와 청공이 크다. 따라서 전체적인 음정은 정악대금에 비해 장2도~단3도 가량 높다. 지금은 새로운 음악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조[Key]를 연주할 수 있도록 관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제작한 대금이 사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