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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 소돔 고모라
네 안녕하십니까 예 제가 최 원장님 강의를 열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듣는 거는 마지막 강의를 방금 전에 들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방송으로 들어야겠죠 제가 열 번을 듣고 난 다음에 그 느낀 거는 제가 크게 깨달은 건 두 가지를 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제 기회에 이제 그 원장님의 강의를 거의 진짜 하나도 안 빼고 열심히 제가 들었는데 첫 번째 하나 들은 것은 믿음으로말미암는의는 그 받아서 행하는 것이다는 게 제 머릿속에 탁 박힌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용서도 받아야 되고 생명도 받아야 되고 말씀도 받아야 되고 성령도 받아야 되고 은혜도 받아야 되는거 근데 만약에 받지 않고 우리가 행하면 뭐다
우리가 타락한 육신으로 행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망치는 것이구나.
이게 첫 번째 저희한테 주어진 큰 깨달음이었고 또 하나는 안식일 진의를 통해서 이번에 깨달은 건 뭐냐 그러면 안식일은 내가 멈추는 걸
내가 죽는 거 이 자아 포기라는 게 안식일 진리에 담겨 있구나.
내가 멈추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행하시는 거예요.
내가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이 못탱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내 육신대로 사는 거죠.
그래서 이 안식일 진리 속에서 단병이는 이거 내가 멈추고 내가 굴복하고 내가 죽으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실 때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펼쳐지는구나 이게 안식의 진리 속에 담겨 있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서
이번에 다시 한 번 내가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또 말씀대로 가르키고 있는지 그래서 크게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계속 들으면서 정리하시고 이 전체의 기별 속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깨달으시면 그 기별들이 여러분 속에 담겨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고 또 여러분을 성장시키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제 오늘 두 번을 더 말씀을 드리면 이제 제가 할 분량은 끝납니다.
한편으로는 행복합니다.
성경은 종말적인 기별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잖아요.
죄로 인해 망쳐졌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고통 속에 탄식하면서 이것이 회복되어져서 다시 새롭게 될 그날을 소망하는 그런 기대를 담고 있어요.
성경책 속에 그 날이 언제인가 하면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는 날이에요.
예 주님이 통치하시는 거죠 그죠? 그 메시아이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시 주인 되셔서 통치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성경책 중에서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종말적인 책이 저는 창세기라고 봅니다.
이 창세기 속에는 모든 종말적인 계명이 다 담겨 있어요.
예 삼장 십오 절도 두무리로 심판되어진다는 것 그 두 무리가 그 가인과 아벨로 나타나고 가인의 후예와 셋의 우선으로 나누어지고 결국에는 노아 홍수를 통해 종말이에요.
예 그리고 소동과 고무라의 그 기별 거기 담겨있는 교훈들
그 다음에 오늘 제가 마지막 시간에 다룰 야곱의 환란 야곱이 하나라도 돌아가는 거 전부 다 다 종말적인 기별이에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 전부 다 다시 원래 가야 될 곳으로 돌아가는 종말적인 기회를 담고 있는 책이 성경이고 그 중에 창세기는 가장 종말적인 기회를 담고 있는 책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 하나인 제가 소돔과 고모라를 연구하면서 제가 깨달은 이 진리를 좀 여러분들에게 좀 나눠 드리려고 하는데
오늘 최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별하고 또 저하고도 또 합쳐집니다.
제가 참 들으면서 되게 많이 감동을 받았고 또 새롭게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세기 십구 장 소돔의 멸망의 시작은 창세기 십팔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네 여호와께서 만물의 상수리 스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두 천사와 함께 뭐처럼 나타났죠?
에 나그네처럼 나타납니다. 이렇게 나타나신 목적은 뭔가 하면 하나님이 신성을 다 가리고 아주 초라 나은 애라고 하면 뭐냐 그러면 그냥 지나가는 가방 메고 깨끗하게 옷 입고 가는 게 아니라 완전 초라한 사람이에요.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나그네처럼 쭉 지나가는 거예요.
이방인이 이방인으로 그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근데 이렇게 나타나신 목적은 뭔가 하면 아브라함의 속에 담겨 있는 게 무엇인지 그 믿음을 하나님은 아시지만 온 우주 앞에 드러내기 위해서 조사하기 위해 나타나신 거예요.
근데 아브라함이 이 나은 애들을 어떻게 했는가 하면 그 이야기들을 다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그렇죠? 어떻게 했죠?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대하듯 이 나그네를 가장 불쌍한 이 사람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담아 담겨 있는 그 하나님 같은 형상이 담겨 있음을 딱 증명합니다.
이 나그네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근데 이때가 언젠가 하면 이삭이 태어나기 일 년도 채 안 남았을 때에요.
그죠? 십칠 장에 이제 그 할레의 언약을 통해서 일 년 후에 이삭이 태어난다는 얘기를 하고 그 과정에 한 번 시험이 치고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창세기 십이장에 믿음으로때와 우리를 떠나서 계속 믿음으로 살아갈 때 복음으로 살아갈 때 넘어지고 실패하고 쓰러지지만 그때마다 또다시 계속 회개하고 말씀 앞에 자아를 굴복하고 나아갈 때
계속 친이를 경험할 때 계속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에 맞춰서 내 삶을 조정해 나갈 때 끊임없이 성화되어지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온 우주 앞에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십일장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언약의 성취인 이삭이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해요.
근데 동시에 십팔장 이십절 이십일절에 보면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증명한 후에 이 하나님과 이 두 천사들은 이제 반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조약이 하늘에 닿았다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어떻게 해야겠다.
본문에 보면 정말로 그러한지 조사하러 내려가신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 하시는데 조사하는 거예요. 왜 조사하는가? 온 우주 앞에 이 도시가 멸망당해야 될 곳이라는 것을 공의롭게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집행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말은 뭐 하러 간다는 거예요? 조사하고 심판하러 간다고 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항상 멸망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일을 하는가 하면 정말 중요해요.
당신의 백성을 찾는 작업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여리고성이 멸망하기 전에 그 안에 하나님 백성이 있었잖아요.
누구죠? 기생 납을 먼저 찾는 일을 해요.
정탄꾼을 보내서 그래서 구워 났잖아요.
그래서 여리고성이 다 초토화되고 다 무너져도 하나님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 지키세요.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도 어떻게 해야죠? 하나님 백성을 찾아요 조사하고 심판하는 그 일을 해요.
그게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노의 가족이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는 거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확증을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소돔성이 멸망하기 직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조사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민노라고 공언하는 로세 식구들의 믿음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조사하고 하나님 백성임을 확증해야겠죠 누가? 다 로세 식구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그 안에 진짜 믿음이 있는지 복음이 있는지 하나님의 오늘 최 원장님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의 의가 있는지 조사하는 거예요.
예 이 과정 속에서 참 재미난 이야기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
이걸 저는 이렇게 봤어요. 아브라함이 중복이도 하죠.
소동과 고문화를 멸망시키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딱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서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라 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뭐라는가 하면 의인들을 구해달라고 당신 백성 구해달라고 중보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모습은 마치 제가 볼 때는 지금 누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죠?
예수님께서 이제 멸망이 확정된 지구 도성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한 중보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막 보입니다.
그러면서 거기 의인 오십 명이 있어요.
하나님 백성들 소돔 식구들이 소돔과 소돔성에 그 로세 식구들이 한 오십 명 정도는 그래도 자기 생각할 때는 그 정도는 믿음이 있을 것 같애.
그 가신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갔어도 사위와 딸과 자식들과 한 오십 명은 될 것 같애.
그 사람들이 롯을 통해서 얼마나 복음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기억해 달라고 하는 데 하나님 그거 없다 그럼 사십오 명이에요 그거 없다 사십 명 삼십 명 그 다음에 열 명까지 쭉 내려가는 이야기를 볼 수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의인이란 또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요 창세기 3장 15절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들은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복음의 능력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복종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죠 그 사람들은 절에 멸망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근데 실제로 창세기 19장 이십구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을 명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이제 소동성이 다 멸망이 됐어요.
도시에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 하나님이 누구를 생각하사 아브라함의 무엇을 생각했죠? 중보기도 했잖아요.
예 중보기도를 생각하자.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 내보내셨음이라는 내용이 나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중보기도가 응답되어진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죠.
비록 연약하고 소 롯이 막 흔들리고 있었지만 계속 기도하면서 더 강력하게 로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이게 이제
이 마지막 롯이 구출되어지는 장면에 보면요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거는 여러분들이 나중에 좀 공부를 하셔야 될 거예요.
계속 인자를 넣어서 인자를 넣어서 하는 그런 내용들이 나와요.
구원받을 수 거의 없는 지경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끝없이 끝없이 그를 이끄는 거예요.
예 우리가 막 곁길로 나갈 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를 계속 드라이브해서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계속해서 구원의 그 위치에 가도록 소개하는 장면들이 다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제 소돔성이 멸망되어지는 장면이 19장부터 나오는데 그 내용은 먼저 이 로세의 가족 중에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로슨 정말 복음을 잃어버린 사람인지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시험하는 내용이 먼저 창세기 십구장의 시작에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 백성들을 먼저 심판해요.
먼저 조사 심판을 확인하는 거예요. 구원하기 위해서 멸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구출하는 거예요.
먼저 인을 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창세기 십구장은 제가 볼 때는 교사 심판 즉 지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지금 교사되어지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곳이 바로 창세기 십구장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걸 보면 어떻게 우리가 지금 조사 심판을 우리가 조사되어지고 있는지 다 보여집니다.
이렇게 이렇게 지금 되고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왜냐 그러면 하나님은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여기선 이렇게 일하시고 저기 저렇게 일하시지 않아요.
창세기 십구장 일절을 보면 저녁 때 이제 정오에 아브라함을 만났거든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기도 이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 천사는 내려가요.
소돔으로 가요. 저녁이에요. 그러니까 정오 저녁 이렇게 시간이 계속 같이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같은 이야기에요.
근데 저녁에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이 천사가 십팔장에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동일한 천사들인데 똑같이 이 두 천사들은 천사처럼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변장해서 변장했다기 보다는 그냥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소돔성으로 들어갑니다.
근데 부조화 선지자를 보면 화원역에 두 낯선 사람들이 성분 가까이 이르렀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소돔에서 밤을 세우러 온 여행자들처럼 보였다.
이거는요 여행자들은 우리 때로 생각하면 안 돼요.
굉장히 예쁜 옷 입고 가방 메고 가는 게 아니라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돼요.
예 당시의 나그네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에요.
근데 아무도 이 부조한 자에 보면 이 초라한 행인들이 초라한 행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들이라는 것을 통찰할 수 없었다고 하느냐
이 초라한 행인들이 뭐다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들이 천사들이라고 하는 걸 알지 못했다는 거예요.
들뜨고 경솔한 군중들은 이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하늘은 이들이 그 다음에 내용이 중요해요.
이 하늘의 사자들을 취급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 눈엔 사람처럼 보이는 거예요.
다 천사데도 하늘의 사자들을 취급하는 일을 통하여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서
자신들이 바로 그 밤에 그 도시를 멸망하게 하는 죄악의 잔을 채워 이제 그 한계를 채우는 절정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오늘 우리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지, 복음이 있는지,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하신다 조사하고 심판한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중요한 기별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어떤 사람이 가장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에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두 나그네는 다시 말하자면 이 소돔성의 사람들이 이 하늘의 사자들을 취급하는 그 일을 통해서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하나님은 온 우주 앞에 공개하며 심판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동시에 이 불쌍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멸망이 확정되어진 이 소돔성에서 그분이 구원해야 할 당신의 백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찾으신다고 하는 거예요.
예 똑같아요. 지금 이거는. 왜냐 그러면 하나님은 똑같은 방식으로 일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선 이렇게 하고 저긴 저렇게 한다면 이거 공부할 필요 없어요.
우리 시대의 기회를 따로 들어야 돼.
근데 그렇지 않고 우리 계속 최 원장님이 반복하는 거죠.
현대의 진리를 찾아야 된다. 여기서 오늘 우리 시대에 그래서 부조한 숫자를 보면 이 멸망 직전에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어제와 똑같은 한우를 보내고 참으로 평안하게 그 마지막 밤을 맞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와 똑같다. 역사는 반복된다.
노아의 때나 소돔의 마지막 밤이나 지금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밤도 비슷하게 지나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하늘과 우주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슴 가슴 졸이는 마음으로 이 마지막 밤 이 소돔을 심판하러 들어간 이 두 천사를 이 소돔성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거예요.
왜냐 그러면 여기서 운명이 다 결정되어지니까.
근데 십구장 일절에 보면 당시에 롯은 성문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해질녘에 낯선 나은 애들이 소돔 성 안으로 들어오는 거를 탁 포착했어요.
문 앞에 앉아 있다가 근데 언뜻 보기에는 소돔에서 밤을 새로 온 여행자들처럼 보였다고 구조하는 지에 적혀있어요.
그런데 로시 이들을 보자. 어떻게 했을까요? 아이고 저 사람들 클났네.
여기서 밤을 지새우면 안 되는데 하고 먼 사이 지켜본 게 아니라 얼른 일어나서
그 다음에 쫓아가요. 쫓아가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하죠? 영접해요.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좀 이상해요.
제가 볼 때 오늘날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저를 해요. 그러면 이르되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 주여라고 해요.
지금 이 로이라고 하는 사람은 엄청난 부자예요.
어마어마한 부자예요. 당신 이 소돔에서 엄청나게 재물을 모은 사람이에요.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서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 갈 길을 가서도 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 같지 않습니까? 어디서 봤죠? 네 창세기 18장 1절부터 4절에 보면 아브라함도 눈을 들어 본 적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똑같은 모습으로 온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보여주는 거예요.
계속 아브라함과 옷이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눈을 들어본 즉 세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들을 보자 장막분 앞에서 막 달려나가요.
어우 저기 있으면 안 뜨거운데 쫓아나가서 영접하고 몸을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죽게 은혜를 입어 사오면 워낙 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
똑같은 얘기를 하는 다시 말해서 불쌍한 이 나그네를 마주한 후 나타내는 이 로세의 행동과 아브라함의 행동이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나그네가 이 로세 초청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나 안 가 거기 안가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세우리라 라고 말하면 이 초청을 거절합니다.
이 당시에 이제 문헌들을 보면요 여행자들이 종종 밤에 야외에서 보냈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왜냐 그러면 그 지역의 기후가 저도 가보지 않았는데 아열대 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나은 애들이 밖에서 경애하는 것이 그렇게 불편한 것이 아니었대요.
그런데 소돔성에서는 절대 밖에서 잠을 자면 안 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나은 애들은 뭘 모르고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아.
이 로이 생각할 때는
당시 치안이 거의 안 되는 환경에다가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워낙에 다 정욕적이고 죄에 중독돼 있어서 음란하고 폭력적이어서 소동이 노화 홍수 때 당시와 거의 비슷해요.
사람들의 지금 인성이 멸망 직전이니까 나은 애들이 밖에서 자는 것은 어떨 수 있다 생명을 거의 잃을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조 같은 자에 보니까 이 롯은 이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이 의무라고 하는 건 뭐예요?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것을 해야 되는데 난 일을 해야 돼.
이런 어떤 하나님의 사랑이 막 마음에서 강권해서 의무처럼 하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즉시로 쫓아가는 거야 저기 뒀다가는 큰 나와 하면서 근데 이들이 계속 사용하며 주저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양한 이유도 있겠죠 왜 사양했을까요? 왜 사양했을까요? 찾아봐야 돼요.
부조 같은 자에 보면 다 나와요. 그들이 이렇게 행하는 데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로세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초대가 단지 거칠에 불과한 형식인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종교적 형식적 행위를 할 수 있어요.
아 나 그리스도인이니까 난 이 정도 한 번만 할 수 있어.
이렇게
형식적 신앙인지 아니면 그 심령의 열망인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고 다시 말하면 이건 뭐예요? 우리 안에 진짜 복음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거죠.
예수님이 계시는지를 조사하는 거예요.
조사 심판하고 있는 거예요. 한 번 거절하는 거요 이렇게.
두 번째는 마치 그들이 밤에 거리에 경여하여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자신이 이방인임을 드러내서 그 다음에 소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소돔 사람들의 품성을 시험하기 위하는 거라 이 이중의 어떤 시험을 목적으로 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근데 롯은 이 나은 애들이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이 위험한 곳에서 그냥 자겠다고 하니까 더욱 막 조바심이 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쌍한 나은 애들이 그 탐욕스러운 폭도들에 의해서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서 끝까지 막 강건하고 해서 막 질질 끌다시피 해갖고 막 집으로 끌고 가는
거기 있으면 죽어요. 빨리 오세요 하는데 싫어 안가 하니까 막 난리가 났겠죠 막 소동이라 삼절에 보니까 로시 간청암에 그제야 돌이켜서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나고 왔어요.
그냥 조용히 왔으면 안전하게 들어갈 텐데 소동이 나니까 사람들이 다 주목하는 거야.
어 저기 이상한 이방인이 저 로세 집으로 들어간다 하면서 그래서 이 관청을 통해서 중요한 겁니다.
이 관청을 통해서 로세의 진실성이 입증되어지고 그리고 여기서 로세 문명이
결정되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1차적으로 정말 중요한 거예요.
근데 누가 복음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정체를 숨기죠.
한참을 예수님과 이 두 제자가 동행하다가 예수님이 그냥 집을 지나쳐 다 왔어.
이제 가려고 하는데 이 두 제자가 어떻게 하죠? 갈려고 해요.
그냥
간청에서 집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간청에 못 이겨 그 집 예수님이 그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죠. 여러분 그래서 항상 하늘에서 온 천사들은 언제나 어떻게 보면 억지로 관청하지 않으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진실한 마음으로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이 사람이 진짜 원할까? 항상 이거를 보는 거예요.
기도 응답도 하나님이 네가 진짜 원하니
너가 정말 복음 받기를 원해 정말로 나를 내가 필요해 계속 시험하시는 그러한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도 어떻게 해야 된다? 간청해야 되는 거예요.
간절히 주님 제가 정말 그걸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하신다 아비가 그 자식이 떡을 달라 하는데 어떻게 뱀을 주고 전가를 주고 돈을 주고 할 수 있냐 가장 좋은 곳을 주시려고 준비하는데 이 사람이 진짜 진심으로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
못 주실 수가 있어요. 그게 항상 시험 내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죠 그래서 주님은 항상 억지로가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곳, 진정으로 그분과 함께 있기를 소망하는 그곳에만 머물기를 머물기 때문에 항상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근데 본문에 보면 결국 로세에게 보여진 이 두 나그네를 구하고자 하는 이런 간절하고 진실한 행동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 천사들이 로세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하면 롯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 소돔성이 멸망받을 때 그는 구원을 받게 돼요.
그러니까 중요한 게 이거예요. 이게 참 재미있는 건데 옷은 지금 누구를 구하려고 하죠? 자신이 아니라 이 연약하고 불쌍한 나그네를 구원했는데 도리어 그가 구원한 이들을 통해서
그것이 구원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게 진짜 중요한 원리에요.
우리가 남을 구원하려고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 행위가 나중에 보면 나의 품성을 변화시키고 나의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게 해서 결국 나의 구원을 이루어내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다.
그래요. 희대 소망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자기 희생의 법칙은 무슨 법칙이다?
자기 보존의 법칙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독교의 법칙은 끝없이 지금 열 번째 강의까지 계속 계속 최 원장님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될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뭐냐 그러면 내가 죽어야 사는 거예요.
내가 희생되어져야지만 어떻게 된다? 나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정신이 우리 안에 심어지지 않으면 복음은 이거를 모음이 담겨지면 이런 정신으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 로세의 모습을 성경 베드로후서 2장 7절에서는
여기 보면 롯을 뭐라고 한다? 의로운 롯이라고 하는 이건 뭐예요? 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산다? 이거를 봐야 돼요.
의라는 거를 그냥 추상적으로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이게 무엇인지에 대한 스토리가 창세기 십구 장에 담겨 있는 거예요.
의가 담긴 사람은 어떻게 산다 탁 보여지는 거예요.
어쨌든 삼절에 보면 로세 안청으로 이제 나은 애들이 집으로 들어오자 롯이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식탁을 쫙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서 그들을 먹입니다.
근데 사절에 보면 이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사람,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그러니까 노소라는 건 뭐예요? 늙은 사람이나 어린 젊은 사람이 다 몰려오는 거예요.
원근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가까운 사람뿐 아니라 몬데에 있는 사람까지 다 몰려와요.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집을 에워싸요.
그러면서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내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라고 말한다.
이 롯이 원래는 얘기하는 것처럼 이 음란한 폭도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이 나은 애들이 막 주저하고 지체하는 바람에 이 이 나은 애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목격이 되어집니다.
삽시간에 이방인들이
이 로세 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소동성에 다 소문이 나요.
재미있는 쇼를 볼 수 있어 그러면서 계속 소문을 내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을 볼 수 있어 하면서 사람들을 다 불러모으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지금 몰려오는 거예요.
본문에 보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 다 모여서 로세 집을 에워싸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몰려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부조와 손자를 보면 정확하게 기록되어져 있어요.
비열한 정욕에 불타는 젊은이와 늙은이로 된 큰 무리였다고 하는 거예요.
성경 재림교회 성경 주석에 보면 이들은 아마도 모든 사회 계층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중을 의미하는 듯하다고 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오는 거 왜냐 그러면 이건 심판되어져야 돼요.
그 사회를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 그 사회의 모든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다 오는 거예요.
젊은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지금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 이 사람들이 다 드러나야 돼.
이제
다 몰려오는 거예요. 예 이때 로세 집의 분위기는 어떤 분위기였는가 하면 이제 밥을 다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조와 한자를 보니까 로색의 이 그 이 나은 애들이 이 도시의 성격에 대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도대체 어떤 도시에요? 저 잘 모르겠어요 하면서 아직까지 천사라는 걸 드러내지 않는 거예요.
옷이 절대 집에 문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밖에 소리가 나더라도 안에 있어야 돼요.
하면서 신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도시가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라요.
벌써 며칠 전에 여기저기서 살인 사건이 나고 다 죽어 나갔어요.
그것도 너무너무 잔인하게요. 제발 계셔야 돼요.
이 얘기를 했겠죠 그런데 그때 이 폭도들의 야유 소리와 조롱 소리가 들리면서 나은 애들을 자기에게 이끌어 내라고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근데 오 절에 보면 왜 이끌어내는가 하면 우리가 그들과 뭐 하기 위해서 상관하기 위해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소돔성에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로세의 집에 몰려왔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동성연애자는 아니겠죠 그렇죠?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음란하고 끔찍한 일을 뭐 하기 위해서? 구경하기 위해서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이 폭도들이
공개적으로 동성연애자들을 끌어내고 대리시켜갖고 이 나은 애들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성폭행을 하고 동성연애를 하고 그리고 소돔성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두 낯선 나은 애들이 악한 폭도에게 어떻게 희생되어지는지를 어떻게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어떻게 하려고 즐기려고 몰려온 거예요.
굉장히 재미있는 쇼프로 하나 났다 해서 소문이 나니까 다 몰려오는 거예요.
나는 거기 그런 거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다 몰려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뭔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저는 이걸 보면서 이 마지막 시대가 왔구나 우리도 그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박사방 조주빈 라이브로 힘없는 여성을 노예처럼 성폭행하고 온갖 성적 학대를 하게 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주고 쾌하게 들뜨며 즐기는 것
이 모습이 똑같은 모습이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다? 소동성이 멸망해야 될 이유 심판의 증거였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이 증조들이 오늘 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펼쳐지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가 돼야 돼요.
재림의 징조로 들려져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이것이 멸망받아야 될 증거 이 세상이 끝나야 될 하나님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폭도들이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한 불쌍하고 힘없는 나그네를 성폭행하는데 그것을 눈으로 보면서 같이 즐기려고 온 소도 백성들이 온 거예요.
박수 치며 막 즐기려고 더 고통스럽게 해봐 막 이러는 거죠.
내가 더 내 쾌락이 더 올라가도록 그렇게 해봐 이러는 거 다 전부 다 전부 다 다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닌 거야.
악마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거예요.
짐승에 짐승의 표가 다 혀진 거죠. 사단에게 완전히 포로가 된 거죠.
예 이 장면은 그 당시 가난한 귀 죄악으로 가득한 가난한 인들 가운데 만연한 것이었고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로세 집 문 앞에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은 이런 악이 행해지는데도 누군가는 만류해야 되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도리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하는 것은 이 성읍의 멸망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온 우주 앞에 펼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이신가 이런 세상이면 더 가면 안 돼.
왜냐면 이 지옥이니까. 여기는요. 다시 말해 이것은 아브라함의 선한 행위가,
로세의 선한 행위가 복음을 받아들인 자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행위였던 것처럼 이 나그네를 막 보살피는 게 뭐예요? 이게 시험되어진다는 걸 몰라요 지금 자기가 천사를 영접한다는 걸 몰라요 이렇게 약하고 그 불쌍한 사람을 케어하고 돌보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처럼 소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악행도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나은 애를 내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빨리 나와야 돼 그래야지 우리가 즐길 수 있어.
내보내라고 하는 쾌락에서 자기를 멈추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때 로세의 또 다시 시험이 닥쳐옵니다.
확정되어 주는데 이 구원을 어떻게 해야 돼? 지켜야 돼요.
이 천사를 내어주면 안 돼요.
이때 지 집 안에 들어온 천사를 이 어려운 때에 지켜낼 수 있는가가 시험되어지는 거야.
이것은 마치 이 시험회 때 우리도 마지막 환란의 때,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기 어려운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다시 하면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 이 믿음으로 지켜낼 수 있는가가 시험되어지는 때가 있나요? 세천사의 기별에 보면
성도들의 무엇이 인내가 여기에 있다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어떻게 아는 자다.
지키는 자요. 우리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를 지켜야 돼.
어떻게든 지켜야 돼. 싸워서 지켜야 돼요.
이때 이제 육절에 보면 로시 두 나은애를 숨겨요.
이 큰일났다.
이제 내가 목숨을 걸고 이게 목숨을 걸고 나가는 거예요.
왜냐면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돌아설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왜냐 그러면 이 앞에 선다는 건 자기가 죽을 수도 있어요.
두 나건네를 먼저 숨기고 7절에 보면 홀로 나갑니다.
그런데 먼저 롯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제발 이 사람들에게만 악을 행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진짜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이런 말할 수 없어요.
우리 진짜로 생각하면서 봐야 돼요. 이 로이 나중에 막 이렇게 타락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왜 구원 받았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사람은 복음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정욕에 눈이 먼 이들이 돌아설 수 없죠.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자 무슨 말로도 이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자.
로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 다음에 진짜 우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와요.
남자를 가까지 가까이 하지 아니한 내 딸이 있는데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아주 진짜 정결한 두 딸이 있다고 하는 근데 청하건데 이 딸들에게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좀 뜻밖의 말인데 주석을 보면서 내가 여러 주석을 다 봤거든요.
이걸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해석했을까?
근데 이것은 로이 이 나은 애들을 이 폭도들에게서 건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한 것이라고 그렇게 주석을 보면 이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낯선 이를 구하기 위해 로시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들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예 특별히 소돔 같은 성음에서 이 로시의 두 딸이 순결했다고 하는 것은 롯이 그들을 키울 때 극진하게 돌봤다는 증거이므로 이 같은 제안이 경솔하게 취해지지 않았음을 증명했다고 재림교회 성경 주석에 보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요. 어쨌든 이들에게 무모한 제안을 했다는 이제 좀 이렇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로시 당시에 이 악을 돌이키기 위해서 생각해 놓을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했다는 거예요.
다 어떤 방법을 해도 이 나그네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지킬 수가 없어.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 나그네를 지키려 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야 돼요.
근데 이 이야기가 돌이어 기름에 불을 붙는 기름에 그 불 불에 기름을 붓는 경우로 이들을 더 분노하게 해서 그거 가지고는 만족 못해.
우리는 정상적인 그런 그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막 진짜 악마처럼 로스에게 덤벼들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이놈이 우리 법관이 되려 한다고 하면서 무슨 니가 악을 악이고 뭐고 악을 행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해야 이 인간아 하면서 막 먼저 너부터 더 해야겠다고 하면서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해요.
롯이 이제 성폭행을 당하면 여기서 롯이 대신해서 먼저 같이 이제 공개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이들이 다 지금 머리가 정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 이때 누군가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롯은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이 개입하셔야겠죠
이 나그네들이 순식간에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옷을 집으로 쫙 끌고 들어가요.
그 수많은 사람들 무리 속에 막 따둥그러 있는 사람을 딱 나가서 그냥 딱 끌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문을 딱 닫고 그 많은 폭도들의 눈을 다 순식간에 다 어둡게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 나서 이 낙은 애들이 로시 갑자기 막 이 사람이 굉장히 막 큰 능력으로 역사하니까 도대체 당신들 누구예요? 그러니까
이 로세에겐 내가 천사라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는 얘기를 딱 합니다.
그러면서 로에 대한 시험이 끝이 나요.
그리고 그 다음 얘기는 다음에 여러분들이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시고 최 원장님이 이어가시든지 할 거예요.
근데 이 사건을 통해서 롯이 아브라함과 똑같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함과 동시에
롯이 이토록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악을 저지하려고 해도 이토록 잔인하게 악하게 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소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증명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정말 중요한 여기까지의 이제 교훈을 좀 찾아야 돼요.
이게 조사 심판이거든요. 그다음에는 구출하는 얘기가 나오는 거고요.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구조와 선지자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한글을 통해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좀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구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정말 중요합니다.
작은 일이 뭐를 시험한다? 이게 진짜 중요한 말이에요.
전 여기에 고쳤어요. 이거 하나를 가지고 설교도 하고 정말 많은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거든요.
작은 일이 품성을 시험한대요. 큰 일이 품성을 시험한다 생각하면 절대 안 돼요.
작은 일이 품성을 시험한 이걸 담고 가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즐거움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날마다의 꾸밈없는 극기의 행위이다.
꾸밈 없는 거 그러니까 꾸며서 하는 게 아니라 이거 복음이 들어와야지 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품음으로써만 우리의 생활을 복되게 할 수 있다.
하찮은 배려 곧 작고 단순한 예절은 생애의 행복에 크게 기여하며 이것들을 게을리 하게 될 때 적지 않은 불행을 현실에서도 초래하게 만든다고 하는거
여러분 정말 중요한 단어 바로 작은 일이 품성을 시험한다고 하는 이 일은 로세에게 작은 일이었어요.
그렇죠? 이 나은 애들을 데리고 와도 되고 안 데리고 와도 돼요.
정말 하찮은 일이에요. 근데 이 하는 일을 통해서 로의 운명이 바뀌어 결정돼 버린 거예요.
여러분 작은 일이 품성을 시험한다고 하는 것은 제가 이 요 한 코테이션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가 하면 종말에 재림 준비에 대한 네 가지 비유가 나와요.
마태복음 이십사장 이십오장에 보면 어떤 비유가 나오죠? 지혜로운 청지기의 비유 이사장에 25장에는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다음에 양과 염소의 비유 이 네 가지의 비유는 마지막 때 재림의 중조를 쫙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그런 즉 깨어있어라.
어느 날에 주에 그 재림이 임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 다음에 재림을 준비하는 내용으로 네 가지 비유가 이렇게 쭉 나오는 거예요.
근데 두 번째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의 결론이 뭔가 하면 이 재림 준비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칭찬받죠 재림의 때 칭찬 받는다고 하는 건 뭐예요? 내 백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다?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니가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진짜 너는 내 백성이 맞아. 정말 신실한 백성이 맞아.
너는 큰 일에 충성한 게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했다.
그 다음에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이 나와요.
적은 일에 충성했다. 달란트의 비유의 결론은 뭔가 하면 재림 준비는 하나로 딱 잡아야 돼요.
작은 일에 충성된 자로 살아가야겠구나.
작은 일에 근데 이 작은 일이라는 게 뭘까요? 작은 이제 생각을 해야겠죠 이 작은 일이 뭘까? 오늘 나에게 작은 일이 뭘까
살펴야 돼요. 그거를 충성되게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복음이 들어왔다.
그러면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되게 하는 거예요.
그쵸? 우리가 큰 일만 충성되게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님이 계신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 작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하면 큰 일이 뭔지를 생각해봐야 돼요.
큰일은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합니다.
왜냐 그러면 내 이익에 관계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큰일은 자신의 이가 이해가 크게 걸린 부분이나 또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 이런 건 큰일이에요.
드러나고 보여지는 거 큰일이에요. 이건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해서요.
왜냐 그러면 그 사람의 명예가 달린 것이나 또는 그 사람의 이익에 크게 관련된 부분 이런 부분들은 다 열심히 합니다.
왜냐 그러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인간적 본성으로 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인간적 본성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더라도 성실하게 또는 어떤 처세술이나 이런 것을 다 배워서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 그러면 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작은 일이란 어떤 일이다? 보이지 않는 일이에요.
이것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는 일이에요.
나그네를 데려와서 먹이고 입히고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아무런 게 없어요.
로세에게 아무런 이익이 안돼.
그래서 이 작은 일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일 이것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는 일 이 보이지 않는 일은 어떻게 보면 누구만 아는 일이에요? 우리의 양심과 하나님만 아는 일이에요.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복음이 담겨진 사람 예수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온 사람 언제나 고람되어 나는 하나님 앞에 산다고
그 삶이 날마다 예배인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한다? 작은 일에 충성되게 행하는 거야.
작은 일 큰 일 다 충성되게 행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보이지 않는 작은 일은 복음을 믿음으로 그 안에 예수가 담겨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 성실히 행할 수 없는 일이에요.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생색나지 않는 일 어떻게 보면 아무도 없는 교회에 떨어진 작은 휴지나 교회 탁자 위에 성경책을 정리하는 일이라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주먹과 칭찬이 뒤따르지 않을 것만 같은 일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줘 그냥 대충대충 하더라도 티가 안 나는 일 언제나 힘들고 불편하면 그만둘 수 있는 일 이거 전부 다 뭐냐 작은 일이에요.
예 여러분 마지막에 그 최 원장님께서 기도원과 삼백인을 얘기할 때 그 삼백 명이 이제 뭘 하죠? 늦은 비 성령을 받고
드디어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서 주님의 군대로 나가잖아요 십자만 사천으로 그들은 전부 다 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자일 거예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무엇을 지시하든지 다 해낼 수 있는 사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일은 항상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어요.
아 이거 바빠서 안되겠다. 아니면 뭐 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밀릴 수 있는 일들.
근데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그런 작은 일을 성실히 행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또 생각을 할게.
이거 작은 일을 어떻게 하면 성실히 하지? 하는 게 아니라 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어.
한두 번은 이런 설교 듣고 아 이제부터 작은 일 성실하게 해야 되겠지 하지만 이게 시간이 지나면 이 복음이 안 들어와 있으면 그다음에 또 안 돼요.
여러분 이 기별은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아주 중요한 기별입니다.
정말 중요한 기별이에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엉뚱한 일에 분주하고 열심을 내다가 정작 주님이 재림하는 날 주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게 달란트에 비유해 나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에요.
마태복음 7장 이십이절부터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이르되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다 큰일이에요 엄청나게 큰일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그 다음에 내용이 뭐예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정말 마지막 때 많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를 모르고 살아가다가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양심의 소리, 우리의 품성을 시험하는 작은 일들이에요.
전부 다 이 작은 선행의 기회들과 이런 일들을
전부 다 어떤 일이냐 하는 거 이건 전부 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될 의무들이에요.
그래서 이 로세에게는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이 일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처럼 그들이 행했다고 하는 거예요.
전부 우리의 품성을 시험하는 작은 일들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것들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대하며 오늘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가 바로 내일의 나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나은 애들이 이 나은 애들을 이 소동성 사람들이 함부로 대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함부로 대했죠?
그리고 이들을 이끌어 이끌어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사람들이 무슨 소돔성에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에요 그렇죠? 이유는 단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들은 자신들의 성적 쾌락과 즐거움을 위한 노력의 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끌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포동성에 있는 나그네를 보는 순간 무엇이 떠올랐는가 하면 지금 쾌락의 도구, 하나님의 형상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 두 개가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사람을 완전히 함부로 아는 거죠. 두 번째는 이들이 이방인과 나은애였기 때문이에요.
이게 정말 중요해요. 다시 말해 자신들이 함부로 알 수 있는 약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들을 해하더라도 이들이 자기를 지키고 보호할 어떤 힘도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소돔성 사람들이 아무리 타락했다 하더라도 더 힘이 센 사람이 들어왔으면 못 해요.
악을 못 저질러요. 예 왜냐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해.
그래서 지금 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것은 뭐냐 그러면 국가가 공인하는 공권력이라는 건 뭐예요? 공적인 폭력 이걸 사용해서 사람들을 범죄를 못 저지르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는 거지 이게 만약에 사라지게 되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로세계는 근데 이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이 그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천하보다 귀한 사람들로 보였다고 하는 거예요.
부주아 선지자에 있는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로시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그 나은 애들이 이제는 롯을 보호하며 이 악한 도시에서 그와 함께 피할 그의 가족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롯이 마지막 순간 이 불쌍한 나그네를 지키기 위해서 이 불쌍한 나그네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여러분 생각이 있어야 돼요.
무슨 성경절이 떠오르죠? 마지막 때 이 불쌍한 나그네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려까지 한 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로세의 구원을 확정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올라야 될 게 뭘까요? 마지막 시대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네 가지의 비유 중에 나오는 비유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이십오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잖아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이제 구분 지어요.
심판하는 거죠.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단의 백성을 이렇게 가르는 거예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을 그리고 다 구분한 다음에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은 양, 그 다음에 사단의 편에 선 사람은 염소를 이렇게 분류해 버렸어요.
그러면서 임금이 이제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자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면서 이제 얘기를 해.
이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이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내가 줄일 때에요.
내가 줄일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내가 나은에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나를 보았다.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어느 때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물어요.
그랬더니 사십절에 뭐라고 합니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 여기 보니까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은 달란트에 비유하면 뭐하고 비유되죠? 작은 일 작은 일과 지극히 작은 자가 두 가지의 비유에서 재림 준비를 위한 두 가지에 비유해서 똑같은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고 이게 소돔성의 마지막 조사 심판의 그것과 같이 연결 지어 보면 너무너무 중요한 빛을 주고 있어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얘기를 해요.
근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은 자리인가 하면 이 사람들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예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걸 연결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소돔성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였다?
하나님이었잖아요 천사들이여 친성을 가진 하나님을 대표해서 대신해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사람들은 이 두 천사를 못 알아봐요.
왜냐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모습이 너무나 지극히 작은 자로 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는 경우 누구를 영접하는 거였다? 하늘을 천사를 영접하는 거였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거였다고 하는 거예요.
이 재림 비유 중에 마지막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의 결론도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가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의 기준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달란트의 비유도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을 가르는 포인트가 무엇인가 하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되이 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시험되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무엇을 시험한다 일상을 시험한다고 하는 거 이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 특별한 때만 특별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시험한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꾸며낼 수 없는 모습 다시 말해 이 속에 있는 그 품성이 드러나게 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다음에 우주 앞에 다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 사람이 구원받아야 되고 왜 이 사람이 멸망 받아야 되는지 왜 이 사람이 복음이 없는 사람이고 왜 이 사람이 복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최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삼백인의 마지막 테스트가 개울에서 물을 먹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무슨 시험이었는가 하면
부조 선지자 왕이 보면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품성의 시험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일상의 모습을 통해서 이게 시험인지 몰랐어요.
그냥 하는 거예요. 근데 사람 그 속에 복음이 담긴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행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꾸며낼 수 없는 모습 그 속에 있는 품성이 드러나게 하신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특별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내 일상이 바뀌어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우리 육신으로는 안 돼요.
우리가 멈춰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야 돼요.
그래야지만 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양과 염소에 비유해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은 작은 일과 같은 의미라는 거 또 머릿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제가 정리를 하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 아마 최 원장님이 이번에 설교하실 것 같아요.
이사야 오십팔장 이야기를 통해서. 근데 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는 일이 참 신앙의 특징이라고 하는 성경절이 있나요? 자 야고보서 1장 이십칠절
세 잠시만
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은 참 신앙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그 안에 들어있는 복음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여기 보면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어떤 것인가 하면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보는 행동이 일상의 삶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가 생각해보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한번 보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경건이란 무엇이에요? 복음이 그 안에 담긴 자에게만 나타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게 의조 의 이게 하나님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고 근데 여기서 말하는 고아와 과부라는 어떤 존재인가 하면
이 똑같아요. 창세기 십구장에 소동과 고모라성에 들어간 그 나그네의 모습이에요.
당시 사회에서 그 당시 사회에서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그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보호나 돌봄도 받지 못하는 자들 가장 무력한 자들
당시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잘해줘도 돌아올 것이 별로 없는 자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잘못해도 손해 볼 것도 없고 큰 문제도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누군가 하면 고아와 과부에요.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이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니까 이런 자들은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 안에 복음이 안 들어오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마지막 날 박신의 백성들을 찾을 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서 너희들 안에 있는 그 믿음과 신앙을 어떻게 하겠다 확인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확인시키겠다고 하는 거 온 우주 앞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말씀하시는 대로 소동과 고무란을 이 이야기로 심판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작은 예수로 오신 이 지극히 작은 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시고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씨앗을 씨앗이 담겨 있는지 안 담겨 있는지를 확인시키겠다고 하는 거예요.
오래전에 제가 동작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 사택에 정기적으로 오시는 한 분이 계셨어요.
근데 얘기 들어보니까 요즘 또 오신다고 그러더라고 가끔씩
근데 이분이 금요일 저녁 혹은 주중에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걸 알고 이제 그 시간대에 맞춰서 한 번씩 오시는데 오실 때마다 저희들이 이제 뭘 드려요 매번 정기적으로 이제 오다가 조금 더 오는 게 자주 찾아오는 거예요.
오실 때마다 이 성주 엄마가 매번 안 시킬 날에도 오세요 하면서 이야기를 해요.
안 시킬 날도 오세요. 이 평일날만 오시지 마시오.
그랬더니 이분이 들은 채 만채예요.
근데 이분이 오시는 날이 잦아지면서 제가 이제는 이분에게 어떻게든 좀 방문을 좀 해서 아니면 관계를 좀 만들어서 성경을 좀 가르쳐 볼까 하면서 제가 이제 이분한테 친절하게 대하면서 집이 어디세요? 하고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분이 드런체 만체하다가 두 번 세 번 올 때마다 집이 어디세요? 라고 물어보니까 이분이 하시는 말이 아이 짜증나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왜 자꾸 물어보냐고 하는 거예요.
그 후부터는 아예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고요.
제가 인사를 다 안 받아요. 성주 이사 사모한테만 계속 가는 거예요.
그리고 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어떤 날은 와서 반찬과 음식을 들으면 오늘 난 반찬이 필요 없고 과일 없냐고 매번 과일 줬는데 과일 좀 달라 그러는 거예요.
주는 것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마치 우리 위에 사람이 이렇게 딱 우리 집에 와서 조공을 좀 바치라고 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 같이 그렇게 행세를 하시는 거예요.
어떤 날은 집사님들이 식사를 하면서 이제 밥을 드렸어요.
우리 같이 이제 교회에서 일하면서 같이 식사하시라고 그랬더니 이분이 반찬이 왜 이렇게 맛이 없냐고 막 타박을 하시면서 막 말을 하는데 교인들이 전부 다 다 이 분을 목사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모든 짓을 다 하고 있어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막 이러는 거예요.
그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다 바닥이 나고 있었어요.
근데 마지막 삼호가 그래도 끈질기게 이분을 웃으면서 막 대접을 하더라고요.
근데 어느 날 삼호도 지쳤는지 한 번은 그분이 우리 집에 문 노크도 안 하고 문을 함부로 탁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뭐 달라고 하면 우리도 없는 게 뭐 아이들이 있어 뒤에서 그 모습을 본 거예요.
집에까지 막 함부로 들어오니까
그러자 이 성주 엄마가 그날은 잠시 주님을 옆에 놓쳤는지 안색이 변하면서 이러시면 안 돼요 그러는 거예요.
근데 이분이 막 뭘 달라고 하는데 오늘은 좀 그냥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고 보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난 후에 계속 마음에 남는 것이 뭔가 하면 이런 일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뭐가 남죠? 저분이 혹시 여보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그 작은 예수가 아닐까?
이런 생각 계속 계속 대민 해내는 거야.
그러면서 또 우리가 회개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분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바로 내 곁에 있는 힘없고 불쌍하는 불쌍하고 우리가 막대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어요.
지극히 작은 자예요. 그래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지켜야 될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일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다 보시잖아요.
하나님이 안정하고 보낼까요? 그분을 그냥 막 우연하게 올까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예 정말 중요한 메시지에요. 전 여기서 정말 내가 집중해야 내 품성을 시험하고 내가 복음이 있는지 내 안에 의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계속 점검해야 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리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감남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큰 심판의 광경을 묘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판결이 원 포인트예요.
원포인트라고 해서 영문에 보면 원 포인트 한 가지 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고 뭐 하고 뭐하고 뭐 하고 뭐 하고 뭐 하고 모든 것들을 다 종합해낼 수 있는 한 가지 포인트가 있대요.
이것만 딱 보면 안 돼요.
민족들이 그리스도 앞에 모일 때 전부 다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다 얘기를 해요.
그때 오직 두 무리로만 나누어질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창세기 삼장 십오 절 복음을 받아들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두 무리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후손 손 다 나누어지는 거죠.
근데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도와주었느냐 또는 도와주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육백삼십칠 페이지에요. 왜 이렇게 판결을 받게 되는가 생각해야겠죠 오늘 우리 안에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돼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 또 물어봐야겠죠 그것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계속 이야기해요.
그 복음을 받아들인 증거가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 여러분 전 이 말씀을 하면서 또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여기에 또 빛을 모을 수 있는 게 있어요.
한 가지 한 가지 더 사건이 예수님 초림 당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태중에 누구를 모시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애가 곧 낳을 것 같아 절박한 상황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지극히 작은 자죠.
요셉과 마리아가 직업이 뭐에요? 목수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이고 돈도 없는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베들레 주변을 다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근데 당시 가난하고 초라한 부부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이 가난한 부부를 향한 뭐가 있어야 돼요? 동정과 사랑과 극율의 마음이 있어야지만 이 부부를 그 가정으로 영접할 수 있어요.
예
그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 어떻게 할까요? 지금 막 호정령이 발휘돼서 막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요.
여관 다 들어차요. 막 떼돈을 벌 수 있어요.
막 몇 배로 막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근데 어떻게 하는가? 도저히 용접할 수 없는 거죠.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복음이 없으면 절대 영접할 수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당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을 어떻게 왔다?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게 딱 연결이 되는 거예요.
예 이제 여기 요한복음 1장 십일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면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거 왜 영접지 아니하였는가? 그 이유는 수도 없이 시대의 소망을 보면 그분은 왕족이나 귀족으로 오시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힘없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듯 주님을 함부로 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재림은 뭐의 반복이다?
초림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난한 자로 오시는 그 예수를 영접할 만큼 충만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주변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우리 주변에 이 지극힌 자가 지극히 작은 자가 없는지
이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요.
어떻게 보면 나의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아내가 될 수도 있어요.
내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아무런 그게 없으면 그렇게 대할 수 있겠죠 그렇죠? 나의 가족 나의 성도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한 번 여러분 자신을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더하여서 오늘 우리가 우리 일상의 삶이 일상의 삶이에요.
교회에서만이 아니에요.
이 복음의 성취를 통해서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다시 나의 사랑 없음을 회개하고 다시금 어디로 가야 될까요? 복음으로 돌아가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리고 오늘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만 우리는 복음을 회복할 수 있고, 실제 우리 곁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무수히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달라고, 그 은혜를 달라고 그 은혜 없음을 먼저 고백하고요 주님 앞에 회개하는 심령으로 더 큰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이 시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하늘 아버지 오늘 창세기 십구장의 이야기를 통하여 마지막 날 복음을 가진 자와
복음을 갖지 못한 자가 어떤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참으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그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보게 하여 주시고
주님 오늘 우리의 마음이 주의 사랑이 없는 냉랭하고 메마른 그런 심령이라면 주님 더 깊이 주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가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비추어서 주님 더 큰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기도하며 구하게 하여 주셔서
참으로 복음이 담긴 사람으로, 참으로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점점 더 사랑이 메말라지고 더 삭막해져 가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 그러한 때에 주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다 우리 곁에 모일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이 계신 사람임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될 수 있도록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남은 기간도 계속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하시고, 개혁이 일어나게 하시고, 부흥이 일어나게 하여 주셔서 주님 이곳에서 다시금 복음의 씨앗을 담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이곳에 주의 치유의 손길을 갈망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주님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여 주시고 치료의 손길로 어루만져주셔서
치료가 급속히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