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뭇 생명체는 물론이고 사물들끼리 혹은 생명과 사물 사이의 각각 얽힌 관계 속에서도 인연은 작동한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작품이 문득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아다지오’를 만났을 때다. 어느 고요한 오후, 텅 빈 공간 어디선가 나지막이 흘러나온 선율에 넋이 나갔던 경험이 있다. 낭만적인 바이올린과 애잔한 클라리넷이 이끄는 첫 대목부터 그랬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가락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더니 뭉게구름처럼 서서히 서서히 부풀어 오르다 마침내 절정으로 내달려 눈부시게 산화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의 마음자락을 온전히 표현하기란 불가능이다. 다만 이런 비유는 가능하겠다. 번다한 속세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 웜홀을 통해 마치 머나먼 우주의 어딘가를 다녀온 기분? 소리 하나하나가 몸속 깊은 곳에 내려앉는 듯한 환각? 클래식 문외한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이 3악장의 주제 선율이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의 칸타빌레 주제에 버금가는 황홀한 매력으로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그 인연이 생의 언제쯤 일어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소리 한 자락이 온 우주를 품는다는 사실! 그리고 인연을 맺는다는 자체가 소중할 뿐.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최후의 낭만주의 음악가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작곡가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를 물으면 차이콥스키가 아니라 이 사람을 더 많이 꼽는다 한다. 라흐마니노프를 너무나 좋아한 미국 가수가 있었으니, 1970년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에릭 카먼Eric Carme이다. 이 3악장의 주제 선율을 차용해서 만든 곡이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이다. 그를 상징하는 그 유명한 ‘All by myself’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선율을 빌렸다. “이 황홀한 클래식의 멜로디를 대중에게 전달하지 않는 건 범죄라고 생각해요.” 그의 표현은 다소 과격하지만 동조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에는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과는 다른 유려하고 대중적인 감각이 스며 있다.
클래식과 팝송 두 버전은 처음엔 구별해 내기 쉽지 않다. 한쪽은 여러 악기들이 뒤섞인 장대한 교향곡이고, 다른 한쪽은 발랄한 템포의 단출한 팝 음악이니까. 하지만 계속 듣다 보면 입으로 흥얼거려지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게 바로 동일한 뿌리임을 알게 하는 증좌다.
에릭 카먼의 음악들을 10대 때부터 듣고 자랐으니, 인연은 이미 그때 싹텄던 듯하다. 그 선율이 무의식에 남아 수십 년 후를 준비했다고 여겨진다. 아름다움과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음악들이 고맙다. 이 곡들의 정취도, 첫 만남의 감흥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울적한 마음 쓰다듬어 줄 아름답고 따뜻한 음악이 간절하다고? 그렇다면 바로 이 음악이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아다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