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손이가 받은 성모님의 은총(동화)
^2018년.김동출 지음
길손이는 오늘도 등교하기 전에 언덕 위에 있는 성당에 들러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 저 길손이 오늘도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 의 인사말과 함께 넙죽 절한 뒤 성호를 긋고 뒤돌아서 성전을 나와 계단을 바쁘게 뛰어서 내려옵니다. 이번에는 성당 오른쪽 뒷마당 성모님 동산으로 가서 성모님께도 예수님께 드린 것과 같이 똑같이 “성모님! 길손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넙죽 절하며 바쁘게 성호를 긋습니다.
조선 후기 신나무골 천주교박해사건으로 피난 간 한티에서 1868년에 순교하신 옹기장의 후손인 길손이 아버지는 옹기장 일을 4대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본래 고향이 경북의 산간 오지였지만, 20여 년 전에 자신이 만든 옹기를 지고 이곳 장터를 지나다 질그릇 빚기에 적합한 ‘붉은 색의 흙’을 발견하고, 그 산 언덕 아래에다 초막과 가마를 짓고 질그릇을 빚게 되면서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농촌에 살지만 농토라고는 한 뙈기도 없을뿐더러, 농사짓는 법도 잘 모르며 본래 배운 일이 질그릇 빚는 옹기장이라 날마다 붉은 진흙으로 물레를 돌려 빚은 독에다 오짓물을 입혀 가마에 구운 옹기를 만들어 장마당에 내다 파는 생업을 이어오기에 살림살이가 가난하지만 한편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길손이는 7년 전의 봄에 우리고장 낙동강 주변의 주님군 예수면 성모일 장날 아침에 장터 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길에서 낳은 귀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길손’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길손이는 착하게 자라 마을 뒤쪽 언덕 위에 있는 하얀 벽돌성당(신자들이고 비신자들이고 간에 이곳 마을 사람들은 하얀 백돌로 지은 성당이라고 하여 ‘벽돌성당’이라고 부름) 성모유치원에 다니면서 ‘원장수녀님을 어머님’처럼 생각하고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바르게 자라났습니다.
길손이의 부모님이 장마당을 돌며 옹기그릇을 파는 옹기장인 것을 잘 아는 신자들은 하는 짓이 너무 순박하고 어진지라, 간혹 잔치 떡이나 성당 행사를 치르고 남은 음식이나 간식꺼리가 생기면 길손이 먹이라고 원장수녀님께 전해 주는 등 벽돌성당 모든 신자들이 관심을 쏟아 주기에 평소 길손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길손이 부모님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길손이는 이제 겨우 8살 코흘리개에 불과한 나이지만, 이미 5살 때 ‘야고보’란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아 매주 토요일 오후의 초.중.고등부 학생 미사 때 형들과 함께 복사 역할을 야무지게 해 내고 있으며, 금년 2월에는 이곳 벽돌성당 부설 성모유치원을 졸업하고 금년 3월에 금빛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지난 5월 어느 월요일, 길손이의 대모님이신 원장수녀님께서는 한 장의 초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1학년 길손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2018학년도 교육과정 설명회>와 함께 ‘수업공개’가 있으니, 부모님께서는 바쁘신 중이라도 꼭 참석하셔서 열심히 공부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이었습니다. 당연히 길손이 부모님께서 받아야 할 초대장이었지만 길손이가 원장수녀님께 보여 드린 것은 그날이 마침 고성의 1,6일 장날이라 제 부모님께서 오지그릇을 이고지고 장터로 나가야 했기에 ‘그날 하루 만 원장수녀님께서 엄마가 되어 참석해 달라’ 는 길손이의 간절한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길손이는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성당에 들여 예수님께 아침 등교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 길손이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참 예수님! 오늘은 우리 학교에서 ‘교육과정 설명회와 학부모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날’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 성당 원장수녀님을 우리 학교로 꼭 보내 주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하고 인사와 부탁의 말씀을 드린 후 다시 성모동산의 성모님께도 아까와 똑 같은 인사를 드린 후 달음발질 쳐 교실에 닿았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학부모님 앞에 인사를 드리는 날이라 그런지 선생님께서도 오늘은 보통날과 다른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화사하게 화장도 하고 멋쟁이처럼 옷도 예쁘게 차려 입고 교탁에 앉아 컴퓨터와 TV를 켜서 학부모님께 공개할 수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길손이도 짝지 한별이와 함께 1교시 국어시간 수업을 준비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도통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윽고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화장실을 다녀와 예수님과 성모님께 ‘화살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제발 우리 원장수녀님을 지금 학교로 빨리 좀 보내 주이소!” 하고 기도드린 후 눈을 뜨자 거짓말처럼 하얀 수도복을 입으신 원장수녀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조금 전 <교육과정 설명회>가 열리는 강당에 가 보았을 때에는 없었던 원장수녀님이 갑자기 교실에 나타나니 너무도 기뻤습니다. 길손이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장수녀님께서는 신부님을 도와 성당행사 준비를 해야 할 바쁜 때였지만 한참 망설이다 하느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으신 후 공개수업시간에 맞추어 길손이의 교실을 찾았습니다.
1학년 신입생이 모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소규모 농촌학교라 이날 참석한 어머님은 모두 7,8 명에 불과하였는데 그 중 할머니가 두 분, 그리고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도 몇 분 보였습니다. 한편 올해 교육대학을 졸업하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선배 선생님들께 ‘학부모에 대한 예절교육’을 바르게 받았는지 수업준비를 끝내고 이날 참석하신 부모님 한 분 한 분을 아이들에게 소개 하였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평소 원장수녀님과 길손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듯 자연스럽게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성당의 대모님이신 원장수녀님께서 길손이의 어머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고 소개하니 길손이의 얼굴에 금방 웃음꽃이 피어나고 어깨가 으쓱해 졌습니다.
시작종과 함께 40분 동안의 바른생활 수업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칠판에 ‘공부할 문제’를 제시하고 ‘공부할 차례와 방법’도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어서 성취동기를 주기 위해 몇 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앞으로 불러내어 「너의 꿈이 무엇이냐? 왜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느냐?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자세히 물어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참 좋은 생각이다. 앞으로 기대가 되네」 하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일일이 반응해 주니 수업이 참 재미있고 신이 났습니다.
마침내 길손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나의 장래 희망은 신부님입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과 원장수녀님이 엄마, 아빠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해주시고, 나에게 친절하며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도 열심히 공부하여 꼭 신부님이 되는 꿈을 이루어 우리 신부님처럼 성당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도 많이 주시고 선물도 많이 사주겠습니다. 이상입니다. ” 더듬거리지 않고 또렷또렷 발표하니 모두 “잘했어, 잘했어” 하고 칭찬하며 큰 박수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날 공개수업은 성공적이었는지 수업을 마친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더 밝아 보였습니다. 잠깐 수업을 보고 가신 교장 선생님께서도 우리 담임 선생님을 향해 “엄지 척! 하며 나가셨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어머님들께서 우리들에게 ‘참 잘했다’ 칭찬하며 맛있는 딸기와 찐빵을 간식으로 주셨습니다.
공개 수업을 마친 그 다음날부터 길손이는 열이 펄펄 나면서 온 몸에 빨간 점이 솟아오르고 팔다리가 쑤시고 아파서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길손이 부모님께서는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자 그만 헛소리를 해대며 증세가 심해져, 며칠 동안 심하게 앓게 되었습니다. 혼자 걷기 힘들 정도로 온 몸이 아프고 힘이 빠져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아파 본 것은 태어나 처음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예수님과 성모마리아님께 인사도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른들 신자들이 ‘성체조배’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뵙듯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성당을 드나들던 길손이의 발길이 어느 날부터 뚝 끊겨 이상하게 생각한 신부님과 원장수녀님은 ‘길손이가 많이 아프다’는 나쁜 소식을 전해 듣고 길손이의 쾌유를 위해 예수님과 성모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바쳤습니다.
어느 날 볼일이 있어 면사무소에 들린 길에 신부님께서는 면사무소 보건지소 공중 보건 의사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려 의사 선생님을 차에 태워 직접 모시고 오셨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길손이의 몸을 이리 저리 살펴보시고는 ‘수두’라고 진단하시면서 ‘다행히 수두 예방접종주사를 맞았으니 한 열흘 정도만 고생하면 낫겠다’ 하시며 ‘물집에 생긴 딱지를 떼면 나중에 흉터가 생기니 절대로 만지지 말라’ 는 주의와 함께 주사를 놔 주고 가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놔 주신 주사가 무엇인지 길손이는 그 시간부터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얼마를 잤는지 모를 정도의 깊은 잠에 든 길손이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 아침 잠길에 누가 와서 길손이를 흔들어 깨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길손아! 길손아 우리 야보고 길손아 아직도 잠자고 있느냐? 이제 다 나았으니 그만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라.” 하는 처음 들어보는 거룩한 목소리 이었습니다. 이 소리에 놀란 길손이가 눈을 번쩍 떠 보니 길손이의 방문을 이제 막 나서는 낯익은 뒷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길손이가 본 것은 헛것이 아니라 길손이가 걱정되어 찾아오신 성모님의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바친 길손이의 정성에 감동하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길손이에게 내려 주신 보답의 선물이요 은총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는 빈 방에, 삼베 밥보자기에 덮인 개다리 밥상이 길손이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을 보니 갑자기 배속에서 ‘꼬르륵’ 하며 배고픈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른 밥보자기를 들어 올리니 큼직한 글이 적힌 쪽지 한 장이 툭 떨어졌습니다. 아픈 길손이를 혼자 두고 장터로 나가면서 어머니가 쓴 쪽지 편지였습니다. 헌 공책쪼가리 쭉 찢어 연필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쓴 편지 속에는 길손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길손아, 엄마가 차려놓은 밥 먹고 어서 일어나라! 사랑한다. 엄마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어 본 길손이는 무척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편지를 써 놓으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 때문입니다.
길손이 아버지가 얼마 전에 통영장에서 사온 개다리소반에는 ‘꾹꾹 놀러 담은 꽁보리밥’과 ‘씨레기 된장국’, 그리고 길손이가 좋아하는 ‘자반고등어’ 한 마리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배가 엄청 고팠던 길손이는 얼른 식사 전 기도를 올리고 꽁보리밥에 짭조름한 자반고등어 살을 얹어 된장국과 함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낸 뒤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감나무 위에서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가 눈부신 햇살 속에 정겹게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성당에서 들려오는 아침 종소리가 ‘감나무골’ 마을에 은은하게 울려 퍼집니다. 길손이는 두 손을 모아 성당을 향해 원장수녀님께 배운 아침기도를 바칩니다.』
무슨 헛소리를 질려 대는 낌새를 느낀 어머니가 부엌에서 아침을 짓다 말고 방안으로 들어와 길손이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지금까지 세상모르고 얼마 동안 잤는지를 어머니가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벽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창틈으로 비쳐드는 밝은 햇살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언제 아팠나하듯 기운이 되살아났습니다. 겨드랑이와 몸통을 거울에 비추어 보니 빨간 반점은 흉터 한 점 없이 씻은 듯이 깨끗이 다 나아 있었습니다.
길손이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착한 우리 아들에게 큰 은총을 내려 주셨구나!” 하시며 두 손을 모아 “예수님, 성모님 우리 아들의 수두를 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중얼 그리듯 기도하며 성호를 그었습니다.
길손이는 그 다음날부터 다시 예전처럼 날마다 벽돌성당을 드나들며 학교를 오가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길손이 오늘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길손이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시소.“ 꾸벅...!
※ 위의 동화 속 주인공 길손이의 가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허구로 생전 처음 지어 본 동화인데 그만 어른 동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2021.3.23.김동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