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특집3 전원범 시인의 문학과 삶>
(평론3)
약도를 그려주는 시인- 우송 전원범선생님
-서연정
9월 16일, 완도 명사십리 해변은 한여름의 열기가 식어 한산하였다. 우송문학회 가족들은 그곳에서 연간집 출판기념회, 우송문학상 시상식을 가졌다.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사람, 뛰는 사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꽉 다문 입술이 고집스럽게 보이는데 이야기를 하는 중간 중간 싱긋 웃기도 한다. 서늘하면서도 해맑은 표정이다.
“모래무지가 팔뚝 만씩 해요. 뒷걸음질을 치면서 가면 Y자로 패인 모래 속으로 모래무지가 파고들지요. 그때 잡으면 돼요. 아주 쉬워요.”
산촌 태생인 나는 모래무지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 소년의 이야기에 정신을 홈빡 뺏긴다. 모래무지를 잡고 자란 이는 자신의 경험을 새겨보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붕어도 잡기가 쉬워요. 붕어는 본집과 잠깐 쉬는 집을 가지고 있어요. 잠깐 쉬는 집에 붕어가 있을 때 손을 넣어서 확, 잡으면 되지요.”
붕어란 참 재미있는 어종이구나 상상하는 새에, 흔들리는 수초 속으로 들어간 붕어가 까무잡잡하게 탄 소년의 손아귀에서 팔딱거린다. 나는 소년의 비상한 손놀림에 깜짝 놀라며 겨우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온다.
“가을철 벼가 익을 무렵이면 게들이 바다로 가려고 물 쪽으로 나옵니다. 개울가에 대발을 엇비슷하게 쳐요. 그리고 그 아래 양철통을 놓아 둡니다. 게들이 물에 떠서 오다가 대발에 걸리지요. 게들은 옆걸음으로 올라가는데, 그러다가 양철통에 빠지지요.”
소년의 이야기는 끝이 없게 이어질 기세다. 버드나무 위에서 쉬는 메기도 잡고 돌 밑에 살고 있는 자라도 잡는다. 둑방 아래 게구멍을 흙덩어리 피뿌리 뭉치로 막아 게를 잡는 대목은 가을철 대발 치고 잡는 게잡이 이야기와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이야기에 흥이 돌고 신이 나서,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즐거운 시간이다.
어떤 어려운 것도 대학생에겐 대학생 수준에 맞추어 유치원생에겐 유치원생 수준에 맞추어 적절한 눈높이의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이야기꾼, 전원범선생님이시다. 그의 이야기에는 재미와 교훈이 늘 함께한다. 재미만 있고 교훈이 없다면 허황할 것이고 재미는 없고 교훈만 있다면 답답해 숨이 막힐 것이다. 재미와 교훈이 있는 유익한 이야기로 좌중을 매료시키는 언변을 선생님 자신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노력하고 연마한 결과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본래 숫기도 없고 수줍은 아이였다며 타고난 달변가가 아니라는 그 말씀은 보통사람인 나에게 위로가 된다. 선생님이야말로 노력이 사람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될 테니 말이다.
선생님의 물고기잡이 이야기에는 체험이 아니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이 실려 있다. 이 현장감의 출처는, 김종 시인의 글 「전원범의 삶과 문학/ ‘세 살적 초여름’과 인천강 정신」(『한 줄기 강물이 되어』, 우송문학회 엮음, 2004)을 읽으면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지형과 수세가 손에 잡힐 듯 상당히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강물 하나 흐르고 있다. 이 강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흘러흘러 어디로 가는가. 강물은 처음에는 작은 한 줌의 생수받이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며 거슬러 나뭇가지처럼 작은 흐름이 점차 커져서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은 마침내는 저 너른 감탄사처럼 누워있는 바다로 간다. 강물은 흐르면서 때로 산의 밑뿌리도 적시고 마른 들녘도 적시고 이곳저곳에 둥지튼 사람들의 갈증도 적시고 지상에서 자라오른 갖가지 생명들 푸르고 아름답게 어우러지게 하면서 종국에 다다른 곳이 바다임에랴. 여기 한 시인이 있다. 시인은 전라도 고창땅 외진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 유학을 왔다. …… (중략) …… 전 시인이 태어난 곳은 새삼스럽지만 고창이며 아산면의 중앙 협곡을 따라 곰소만으로 흐름을 끌고 가는 인천강의 정서를 체질처럼 익히며 성장했다. 인천강은 인근에 비학산, 화실봉 등을 열고 그 사이를 느린 유속으로 길 가는 강이다. 이 지역은 주변이 200m 정도의 낮은 산지형이며 경수산, 필봉 등이 한 차례 기복을 이루지만 이 또한 안정된 균형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 지형에 조금 더 설명을 붙이자. 문수산과 고산 등지에서 시작된 인천강이 곰소만으로 흘러들기 위해 상류에서 고수천을 거치고 아산면의 중앙 협곡을 젖줄처럼 이어가고 있다. 대개의 경우 하천의 하류에 평야가 형성되는 것이 상식인데 인천강은 상류에 분지까지 관개하여 넓은 평야가 만들어졌고 이 강의 입구에서 십여 리 못 미쳐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면 호남의 내금강이라 칭송되는 선운산과 선운사의 절경이 계곡 깊숙이 무릉도원처럼 감추어져 있다. 전원범 시인이 이날까지 ‘서두르지 않고 마치 벽돌로 쌓아가듯 대기만성형을 자처하면서 진지하게 일을 해온 것’은 어쩌면 자신의 고향 풍광에서 형성된 것인지 모른다. …… (중략) …… 성실함과 집요함, 이것을 전 시인의 생애적 덕목으로 꼽는 것은 실지 이같은 자기훈련에서 그 많은 성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작은 흐름이던 샘물이 냇이 되고 강물이 되고 크고 늠렬한 대처인 바다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04년 4월 24일 광주무등파크 4층 크리스탈룸에서는 의미 깊은 한 행사가 치러졌다. 문학이 아니었다면 옷깃이나 스쳤을까 싶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은 평소보다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의전을 갖춘 행사장이지만 분위기는 경직되지 않아 나직한 말소리들이 오가도 흉허물이라 않을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전원범선생님 회갑기념문집 『한 줄기 강물이 되어』를 선생님께 헌정하고 수십 명의 문학 제자가 절을 올리는 광경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도 남았다. 이 책자는 총533쪽 두께의 양장본이다. 선생님의 총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엔 역부족이지만 〈축시〉 〈연보〉 〈전원범을 말한다〉 〈전원범의 삶과 문학〉 〈전원범 대표작〉 〈나의 스승 전원범〉 〈제자 작품〉 등에서 그의 성실하고 진솔한 일생을 다소나마 더듬어 볼 수가 있다. 친구가 보는 인간적인 모습, 자녀가 보는 아버지의 모습, 시와 시조, 동시 등 다양한 형태로 시를 창작해온 치열한 작가정신, 문학동인회를 지도하여 언어예술가로 키워낸 스승으로서의 면모 등을 오롯이 담아냈다.
이날 행사에 자그마한 힘을 담당한 우송문학회는 전원범 선생님으로부터 문학을 공부한 이들의 모임이다. 다엽과 금초, 명금과 은목 등의 문학동인회와 따로따로 문학적 사제 인연을 맺은 이들이 동참하여 2003년 11월 27일 발족하였다. 2006년 연간집 『아름다운 만남』을 창간호로 낸 이후 2017년에는 12호 『불빛으로 눈 뜨는 바다』를 냈다. 이 단체의 특징은 스승으로부터 매년 한두 명이 창작격려금을 받는다는 점이다. 전원범 선생님은 매년 연간집 수록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우송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주신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면서 수상자 수가 19명에 이른다.
나는 1992년 동인지 창간호 『가슴 속의 새 한 마리』부터 2011년 동인지 20호 『스물, 그 여정』을 낼 때까지 금초문학회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동인 초창기, 매월 작품 합평회를 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뇌리에 스친다. 선생님께서는 시어 한 글자부터 문맥의 큰 틀까지 잘못된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이처럼 시의적절하고 명쾌한 선생님의 진단과 해결에 대해 이성자 아동문학가는 “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끙끙댈 때, 교수님을 찾아가면 잘 정리된 자료를 꺼내주며 차근차근 설명해주곤 하셨다. 교수님은 언제라도 나의 목마른 지적 갈등을 해결해주시는 말하는 도서관이었다.”고 말한다. 오랜만에 오래 전에 쓴 작품 두 편을 펼쳐놓고 읽어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루처럼 깊은 눈매
맑은 별 찾아가는 약도를 그려주었다
마음의 징역살이를 훌훌 벗어 던지는 길
벌새도 알바트로스도 꿈을 물고 날아가
어둠이 잠가놓은 209호 지붕 위로
눈부신 생의 한때를 고이 덮는 눈 내린다
- 서연정, 「약도를 그리는 사람」 전문
오리무중 지도를 들고
연진관 작은 방을 찾아가면
생을 우려내는 듯
찻물이 끓어
서글픔도 막막함도 무연히 끓어
말씀 속에서 혹은 침묵 속에서
놓친 길들 서서히 걸어나왔네
길이 문득 안 보일 때
찾아가고 싶은 생각 간절해지는
선생님의 방
- 서연정, 「길이 문득 안 보일 때」 전문
위의 시조 「약도를 그리는 사람」과 시 「길이 문득 안 보일 때」는 선생님께 바치는 작품들이다. 나뭇잎이 더욱 깊게 물드는 늦가을이다. 광주교육대학교 연진관 209호 연구실에 가면 젊은 전원범 선생님께서 찻물을 끓이고 계시다가 어린 나를 맞이해주실 것만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