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성(받는 자와 전하는 자의 교제) / 마이클 호튼
사도성 받는 자와 전하는 자의 교제
교회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성은 기정사실(given)이 아니라 선물(gift)이며 복음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교회와 혼동하거나 그 둘을 분리시키는 양극단의 위험성을 살펴보았다. 역사적 제로로서의 교회와 모임 그 자체(사람들)를 통해 언제나 새로 구성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교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두 극단은 교회의 사도성을 고찰할 때도 분명히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이 속성을 역사적 직분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의 선물을 교회 그 자체에 대한 기정사실로 바꿀 위험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자신이 사도들의 믿음과 맞닿아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교회는 단지 사도들 자신과의 역사적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사도적이다(그리고 언제나 사도적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적 제도로서의 교회(교회의 사역과 직무)의 중요성을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릴 위험성이 있다.
I. 메시지와 수단
로마서 10장은 한 번 더 이 두 위험성을 피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하나님은 피조물적인 수단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교회의 외적인 사역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이 아니며 장애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달리 교회의 외적인 사역은 성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수단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임재하게' 하고 적절하고 실재하며 살아 있는 행위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심판과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마다 우리와 관련되신다.
바울 사도는 전달 방법의 필요성에 대해 고지식하지 않다. 바울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사역과도 관계없이 단순히 택함받은 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이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바울의 논증은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불변의 논리를 따른다. 구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속의 적용은 우리가 달성하는 목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선포되는 복음의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 결과 하나님은 보냄 받은 공인된 사신들을 사용하신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내지도 못한다. 메시지와 방법과 사역은 교회의 사명을 낳는다. 이 복음적인 논리에 부응할 때 교회는 사도적이다.
건전한 종말론('이미' / '아직')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사도성을 마치 우리가 성령께 의지하여 선포된 말씀을 통해 다시 선물로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건전한 종말론은 우리에게 교회는 내세의 능력에 직면할 때 현재의 이 악한 시대의 곤경에 빠져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는 어떤 교파나 사도적인 사역자들의 계승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신과 사도적 사역의 계승이다. 주권적인 말씀은 성직 제도의 보편성, 거룩함, 사도성에 대한 주장을 언제나 반박하며 심지어 무효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약적 좌표는 또한 우리에게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미래까지 지속되는 정경, 의식, 직분이 있는 역사적인 약속임을 상기시킨다. 교회의 사도성은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지만 가시적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다.
한편으로는 뉴비긴이 논평하듯이 개혁파 교회론은 교회의 공적인 사역을 통한 가시성을 긍정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이 언약 공동체의 역사적 연속성을 긍정한다.
한편으로 교회가 단순히 사도 시대부터 중단 없는 계승으로 계속된 어떤 공동체와도 동일시될 때는 성령이 아닌 육신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진리 속에 '성육신의 확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번에' 육신적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제물의 열매, 땅에 떨어진 하나의 밀알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부활한 생명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이들에게도 확대되는 것이다......가톨릭의 교회에 대한 교리가 빠지기 쉬운 근본적인 오류는.....종말론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에 종속시키는 오류다(강조는 첨가됨).1
교회는 말씀의 창조물임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가 그 교회의 교리와 무관하게 사도적인 교회로 간주될 수는 없다. 사도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교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맺고 있는 관계이지 사도들 각 사람이나 성직 수임의 계보와 맺고 있는 관계는 아니다.
천사나 사도도 사도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면(갈 1:18) 분명 지상의 어떤 목사도 사도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목회자들의 역사적 계승과의 연속성도, 오늘날의 소위 성령 충만한 사도와의 관계도 한 교회가 사도적인 교회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한 목사나 한 교파가 아니라 '한 믿음'-우리가 믿는 내용으로서의 믿음(fides quae credifur)-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기준이다. 창세기 3장 16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실타래는 바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유 3절)다.
II. 사도성과 사도직
여러 오순절 교파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사도성을 사도의 직분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성렬의 임재와 활동은 가시적으로 이 직분을 맡고 있는 이들과 동일시되며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그런 주장들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검증하기를 꺼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교회들은 성령의 임재와 사도성의 표지를 다시 한 번 올바로 선포된 말씀 및 바르게 시행된 성례와 동일시한다. 또 아래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루터파와 개혁파 전통에서는 이차적으로 사도의 직분이 신약 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 전통에서는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과 목사들의 일상적인 사역을 구별한다.
A. 다양한 해석들 ~생략~
1. 사도성과 공식적 직분의 결합 ~생략~ 2. 사도성과 공식적 사역의 분리 ~중략~
그리스도의 신성 불가침한 맹세를 바탕으로 사도적 진리로 양육되는 눈에 보이는 교회는 언제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교회나 교파가 사도적인 사역과는 별개로 언제나 이 사도적 교회에 속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교회가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때때로 안정된 교회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시는 성령은 또한 교회를 재편하시므로 교회는 언제나 지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세움은 공적이고 질서 정연하고 훈련받은 사역을 통해 세대를 막론하고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 영적인 은사를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될지 모르지만 교회에 덕을 세우지는 못한다고 바울은 경고한다(고전 14:15-17).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26, 33절).
청교도 회중의 유산보다 분리주의의 유산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오늘날의 독립 교회 개신교 전통은 종종 교회의 안녕을 어떤 외적인 질서 내지 형태와 동일시하는 것조차 꺼리는 듯 보인다. 사실 성령의 사역은 종종 교회 형태나 공적 의식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대조된다. 설교조차도 복음주의 진영에서 점점 더 중립적인 형태의 의사소통으로 간주된다. 다른 매체가 우리를 더 적절하게 가르치거나 덕을 세우거나 설득한다면 왜 우리는 이 전통적인 형식으로 인해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가? 사실 성령의 비상한 사역은 종종 어떤 사건이나 경험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피조물적인 작용을 회피하는 정도와 동일시된다. 침례교 신학자 데일 무디가 결론짓는대로 "제도적 조직에 대한 영적인 유기체의 우선성은 이 모든 위대한 신학적 흐름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이런 전통에서 교회는 주로 교제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수는 있지만 대체로 신실한 이들의 어머니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사실 종종 교회의 공적인 사역은 자발적으고 직접적이며 사적인 회심 체험에 종속된다(또는 심지어 그런 체험과 대조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교회에 가입하는 일과 대조되는 경우가 많다.
루터파와 개혁파 전통에 있어서는 사도성이 교회의 말과 행동의 규범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도적 설교와 동일시된다. 교회가 사도적인 이유는 그 직무 담당자의 임직의 기원이 사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교회가 지속적인 계시와 예언의 은사적 사역을 향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지상 사역 중에 임명하신 이 질적으로 유일무이한 일단의 사신들(즉, 사도들 - 역주)에게서 들은 바를 후대에 전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인 공동체로서 언제나 그 사도성에 관한 의문의 검증 대상이 되며 늘 새롭게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사도성을 얻어야 한다. 교회는 언약적 공동체로서 역사적으로 대대로 지속된다. 사도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과 내적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대립시키기를 거부한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하시지만 결코 거기에 동화되시지는 않는다.
B. 언약적 관점에서의 사도성
나는 개혁주의 교회론이 역사적 기관으로서의 교회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교회,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을 사용하는 공식적인 사역으로서의 교회와 성령에 의존하는 신자들의 비공식적인 사역으로서의 교회 사이에 잘못된 양자택일을 거부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관점은 또한 가톨릭의 교황에 대한 주장이나 자칭 선지자들의 은사주의적인 사역과 관련해서 서도성을 지속적인 사도직의 직무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1. 사도적 복음과 동일시 되는 사도성: 한 시대의 종말
사도들이 살아 있었을 때도 성도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위해 매주 모였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 사역을 통해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47절). 말씀의 중심성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적 사명을 볼 때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성장이 발생하는 곳마다 그 원인은 말씀에 돌려진다(행 6:7, 12:24, 19:20). 불신앙을 압도하는 것은 곧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시면서 선물들,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를 나누어 주셨다고 덧붙인다. 그들의 사역을 통해 성도들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더 이상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질 것이다(엡 4:11-14).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시는 사도적 말씀 선포는 최초의 창조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발하시는 성부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교회를 창조했다. 바울 사도는 육신적인 분파주의에 맞서 고린도 교회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을 주장했다(고전 4:6).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은 단순히 말씀 선포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의 선포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선포를 통해 전진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따라서 최소한 눈에 보이는 참 교회는 이러한 사도적 선포와의 연속성을 통해 인지된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집단이 이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거나 왜곡하고 반박한다면 그런 집단은 정당한 가시적 교회로 간주될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도들과 교제하는 교회조차도 거짓 교회가 될 수 있다면(갈 1:6-9, 3:1-10, 4:11, 20; 계 2-3장) 사도들의 사역상의 계승자들과 교제하는 교회들에서 그 촛대가 옮겨지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교회는 자신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도 자기 밖에서, 교회를 낳으며 교회의 통일성, 보편성, 거룩함, 사도성을 끊임없이 정의하고 보양하며 세우는 복음 안에서 받는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과 재세례파를 사도적 직분은 지금도 열려 있으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계시도 열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광신주의' 임을 입증하는 무리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신약 성경은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과 목사와 장로의 일상적인 사역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딤전 6:20; 딤후 1:13-14).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고, 바울 또한 자신이 사도직을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적으로 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했지만(갈 1:11-23), 장로들의 도움을 받는 일반적인 목사들은 부지런히 가르치고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논박해야 한다(딤전 1:10-11). 이 차이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다. 사도들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의 말씀 선포와 그들이 쓴 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 반면(딤후 3:16),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을 통해, 목사와 교사의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
사도 시대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받는 이들에게 구속력이 있었던 전승도 분명 있었지만,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 전체에 대해 규범이 되는 모든 전승은 정경에 수용되었다. 더 나아가 비상한 사도적 사역에서 디모데가 나타내는 일상적인 사역으로의 이행기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침을 주고 있는 직분은 목사/감독(포이멘/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 뷔테로스) 및 집사(디아코노스)의 직분이다.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를 주셨고(엡 4:11) 사도 시대의 비상한 사역 속에 신유와 방언과 예언의 은사도 나타났지만 이들 편지에는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사도들의 직분으로 안수받았다는 어떤 가르침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정경을 영감을 통해 전달하셔서 새언약 공동체를 구성하셨다. 성령은 목사의 일상적 사역을 통해 교회가 그와 같은 조직을 통해 형성되고 규제되어 갈 때 조명하심으로 교회를 인도하신다. 사도들이 증언한 사건이 유일무이하고 반복할 수 없으며 완결된 사건인 것처럼 사도들의 직분도 교회 역사에서 비범하며 유일무이하다.2 바울은 자신을 교회 역사에서 터를 닦는 사건의 일부로 묘사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나는 이 말을 지금 다른 터를 닦지 말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터는 닦을 수 없다는 직설법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영적 은사의 다양성: 사도성과 일반적 직분
사도성은 특히 목사와 교사라는 특별한 직분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통해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을 다양한 귀한 옷으로 입히신다. 어떤 신자들은 특별한 직분에 대한 책임을 받지만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일반적인 직분은 모두가 받는다. 신약 성경에는 영적인 은사들에 대한 다른 언급들도 있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 세 개의 주요 본문이 발견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본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관계에 대해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하는 주요 본문이기도 하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성부가 성자 안에서 하신 말씀의 효과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창조 사역에서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실 거처로 마른 땅을 창조하기 위해 분리된 물을 위로 운행하신다. 이러한 물들의 분리는 출애굽에서도 반복되며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세례에 대한 근거로 언급된다.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호흡으로 묘사되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셨다(요 20:22). 출애굽기 3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친히 브살렐을 불러 성막을 짓는 과정에서 명인들과 장인들을 감도하도록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더 많이 불평할수록 모세도 하나님께 더 많이 불평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1-15).
하나님은 모세의 불평을 받아들이셔서 모세에게 모세의 사역을 도울 장로들을 임명하라고 명하셨다.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모세의 예언 사역은 지속적이었지만 장로들은 이 유일한 경우에만-그것도 그들의 '보좌하는' 직분이 백성들 앞에서 정당성을 입증받기에 충분할 정도의 시간 동안만-예언했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두 장로가 장막 주위에서 나머지 70명과 함께 예언하지 않고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다고 고발하자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이 사건은 분명 백성들로 인한 부담을 덜어 주었을 것이다.
몇 백 년 뒤 요엘은 메시아 시대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청중에게 이 예언이 그들 앞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방문객의 무리가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자신의 지상 사역 기간에 자신에게 임했던 바로 그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셨다. 모세와 달리 그리스도는 더 엄청난 반대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오로지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는 사명을 감당하시기에 충분했다. 모세와 달리 그리스도는 자신의 짐에 대해 결코 불평하시지 않았다. 모세와 달리 그리스도는 범죄자들을 위해 중보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대신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들이 받을 심판을 담당하셨다. 그리스도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신 것이 아니라 환영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참된 약속의 땅으로 드러가셨고 하늘과 땅에서 모든 이름 위에 높아지시고 높임을 받으셨다. 이제 마침내 옛 언약에서 특별한 직분을 담당한 이들을 위해 남겨졌던 선지자, 제사장, 왕의 모형론적인 직분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그리스도의 온몸 안에서 실현되었다. 새 창조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것의 핵심인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 회복되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말한다(벧전 2:9).
에베소서 4장 7-16절에서 바울 사도는 목사, 교사, 복음 전도자뿐만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의 직분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는 바른 교리로 자신의 몸을 세우신다. 모든 신자는 그들의 일반적 직분에 있어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모든 신자는 함께 경건하게 살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믿음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한다(엡 5:15-21).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 목록을 확대한다. 말씀 사역과 관련된 은사들(예언, 가르침, 권면)뿐만 아니라 섬김과 손 대접의 은사, 치유, 도움, 다스림,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베푸는 은사와 자비의 은사도 있다. 이 가운데 몇몇 은사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특별한 직분 속에서 행해지지만 모든 은사는 온몸에 의해 일반적인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지자, 제사장, 왕의 공적인 사역을 각각 목사, 집사, 장로라는 특별한 직분을 통해 행하시지만 이런 은사들은 이 직분자들을 넘어 다양한 정도로 더 큰 몸에 분배된다.
교회에서 이런 은사들 중에 어느 것이든 중지된 것이 있는가라는 뜨거운 쟁점이 된 질문이 제기된다. 특히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여파로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을(신유, 예언, 방언의 은사는 중단되었다고 믿는) 은사 중지론자와 은사 비중지론자의 두 진영으로 분열시켰다. 비중지론자들은 영속성의 관점에서 이런 은사들과 직분들 가운데 일부를 다른 것들과 구별해야 할 어떤 해석학적인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사 중지론자들은 신약 성경 자체가 사도들의 터를 닦는 시기와 그들의 완성된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시기(고전 3:10-11)를 구별하고 있다고 믿는다. 신약 성경은 목사/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은 확증하지만 영속적인 선지자나 사도의 직분을 그에 수반하는 표적의 은사와 함께 확증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문제가 되는 각 은사를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예언(프로페테이아)을 설교로 취급하며 설교는 비록 성령의 조명을 받기는 하지만 (성경과는 달리)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검증되어야 한다(고전 12:29, 14:29-32; 살전 5:19-21). 오순절 방언의 은사는 배운 적이 없는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었다.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한 다양한 무리들은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라고 물었다(행 2:8).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자연적인 언어와 동의어로 이해해야 하며 어떤 이들은 초자연적으로 이런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를 받고 어떤 이들은 이를 해석하는 은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국이 밝아 왔다는 표징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땅 끝으로 퍼뜨리는 실제적인 방법의 역할도 했다. 이 가운데 어떤 은사도 오직 신자들의 개인적인 교화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와 그 말씀 안에서의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 주어졌다.
이와 비슷하게 신유의 은사도 말세의 충만한 완성을 미리 보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표적은 언제나 성경에서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모세 시대에 있었던 장로들의 일시적인 예언과 마찬가지로 표적과 기사의 비상한 은사들은 인간 사신들의 신성한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주어진다. 일단 그 사역의 정당성이 입증되면 더 이상 추가적인 확증은 필요하지 않다.3 따라서 선지자와 사도의 은사는 (기적, 예언, 방언의 은사와 더불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터를 닦는 기능을 완수한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가 평범한 사역자였던 것처럼 우리는 디모데의 사역에 비상한 표적과 기사가 수반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
웨인 그루뎀 같은 일부 신학자들은 사도의 직분은 중단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영적인 은사의 중단이라는 "이 문제가 성경을 통해 결정될 수 있는지 확신이 없다."4 나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과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 8-13절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그루뎀의 견해에 동의한다.5 바울은 아마도 믿음과 소망이 전혀 필요하지 않고 영원까지 지속될 것은 사랑밖에 없을 완성의 때를 언급했을 것이다(고전 13:13).
그러나 나는 지속되는 예언을 옹호하는 그루뎀의 주장을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루뎀은 오늘날의 예언을 성경의 신성한 신탁을 전달한 예언과 분명히 구별한다. 이는 그루뎀의 입장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그루뎀은 교회에서 지속되는 종류의 예언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연발생적인 '계시'이므로 설교 및 가르침과 구별된다고 믿는다.6 "그러므로 그 차이는 꽤 분명하다. 만일 어떤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삶에 대한 적용을 담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의 용어로) 가르침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메시지가 하나님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게 하시는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다."7
내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사도적 교회에서의 예언의 실천과 일치하지 않는 예언에 대한 정의를 도입하고 있다. 예언은 그 어디서도 그 자연발생적인 특성으로 인해 구별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런 예언을 성경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대한 그루뎀의 건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석은 여전히 성령이 성경 속에서 이미 전달되지 않은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예언이 단지 성령께서 주신 성경에 대한 통찰을 선포하는 일로 정의된다면 이는 설교와 동의어가 아닌가?
오늘날 성령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세우신 표적과 기사인 설교와 성례를 통해 이 일상적인 복음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하신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일을 터를 닦는 비상한 사역으로, 자신들의 초자연적인 표적을 그 사역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11, 14, 강조는 첨가됨).
산 돌들이 계속해서 성전에 더해지고 있는 동안 건물 그 자체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엡 2:20). 머리의 인격 및 사역이 그 지체의 인격 및 사역과 구별되듯이 사도들의 터를 닦는 사역은 사도들의 계승자들의 '세우는' 사역과 다르다.
사도들의 설교는 성경이 된 반면, 우리의 선포와 믿음과 실천은 그 기준에 일치하는 만큼 사도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의 배경 속에서 성경을 정경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성경이 증언하는 구속 사역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내용을 더하거나 뺌으로써 성경을 수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신 4:2; 계 22:18-19). 해석은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정경은 단번에 주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정경은 예수님이 자신의 자기희생으로 인증하신 언약이다. 교회는 이 정경과 교회의 규정된 의식의 실천에 호소하면서 언약의 주가 아닌 종으로서 천상의 실재에 참여한다. 예수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역사와 질적으로 다르듯이 사도적 정경은 그것을 해석하는 그 이후의 전통과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와 후자는 주종 관계에 있다. 교회는 구속 사역을 확대하거나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처럼 계시도 확대하거나 완성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는 구속 역사의 새로운 장들을 기록하는 시대가 아니다.8 오히려 이 시대는-새 언약의 정경과 더불어 일상적인 사역의 시대의 한가운데서-성령이 우리를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 사이의 선교를 위해 준비시키는 시기다. 교회는 성육신을 확장하거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을 반복하거나 사도들의 비상한 사역을 연장할 수도 없지만 그 대신 두 시대 사이의 이 시대에 교회의 일상적인 사역을 위해 바로 이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
3. 일상적인 사역에서의 교회 직분의 중요성
나는 사도적 직분 그 자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관점을 거부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는 사도적인 믿음과 실천을 계속할 때 사도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에 제정하신 비사도적 직분의 중요성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늘날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 건물로서의 교회와 사람들로서의 교회를 종종 구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 종말론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교회의 통일성과 복수성에 대한 잘못된 분리와 비슷하다. 사실 성령은 바로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라는 몸 안에서의 성도들의 역할을 위해 모든 성도에게 선물을 주신다.
대럴 구더는 '교회의 표지'에 대한 종교개혁의 강조가 사람들로서의 교회('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들')가 아닌 장소로서의 교회('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교회의 선교적 소명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9 그러나 이는 선교의 원천 자체, 즉 우리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일의 우선성을 훼손하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교회가 '어떤 일들[즉, 설교와 성례]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사역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사역보다 우선한다. 교회는 단지 또 다른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가들의 집단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하시는 곳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이 악한 시대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에 속하는 한 백성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증언 행위와 행동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선물을 이웃과 공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섬길 수 있기 전에 먼저 섬김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행동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성소로 지어져 가는 살아 있는 돌들이다. 그러나 모든 언약 백성이 다 사역자는 아니다. (바울이 고전 11장과 12장에서 특별히 주장하듯이) 모두가 양이지만 모두가 목자장 아래 있는 목자는 아니다. 한 몸 안에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부르심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지만(딤전 2:5)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셔서 자신의 몸을 세우게 하셨다(엡 4:5-16). 이런 다양한 은사들은 사역과 감독의 특별한 직분들을 낳는다. 그러나 그런 은사들은 사역자들이 존재론적으로 평신도보다 더 높아지도록 사역자들에게 성례적으로 주입된 특성(또는 로마 가톨릭의 용어대로 하면 지워지지 않는 '성질')이 아니다. 단지 몸의 나머지 부분을 섬기기 위해 주어진 특정한 직분을 위한 은사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약속하셨듯이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말씀 사역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재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단언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특별히 대부분의 현대 성경 번역본들이 (과거의 번역본들과 대조적으로) 에베소서 4장 11-1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기 때문이다. "그가 주신 선물은 성도에게 봉사의 일을 할 능력을 갖추어 주시기 위해 어떤 이는 사도가 되고, 어떤 이는 선지자, 어떤 이는 복음 전도자, 어떤 이는 목사와 교사가 되게 하시는 것이었다"(NRSV, ESV를 포함한 다른 현대 번역본들에서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구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의 번역본(예컨대 흠정역[KJV])을 선호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흠정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그리고 그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
과거의 번역본들은 헬라어의 실제 구문을 반영하여 주어진 직분에서 새로운 번역본들이 애매하게 번역한 3행의 목적절을 끌어낸다. 성도들을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바로 그 직분자들이 또한 봉사의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도 주어진 것이다.10 이런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진리 안에서 온몸에 통일됨과 성숙함과 온전함을 가져다 주는 말씀 사역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신 것이다. 이는 그 몸이 오직 이런 직분들을 통해서만 온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곳(특별히 롬 12장과 고전 12장)에서 언급된 다른 은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초점은 건전한 교리를 통해 그 몸에 통일성과 성숙함을 가져다주는 사역에 국한되어 있다.
엔드루 링컨은 에베소서 4장에 대한 이런 해석을 선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모든 신자에 해당하는 적극적인 역할은 7절, 16절에 의해 안전하게 확보되지만 여기 12절에서 일차적인 맥락은 모든 성도의 기능과 역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특정한 선물, 즉 사역자의 기능과 역할이다. '카타르티스몬'에 대한 '온전하게 하다'라는 번역에는 추가적인 표현으로 보충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의미가 있으며 '디아코니아'(봉사)는 방금 거론한 사역자들의 사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성직자주의를 피하고 교회의 '민주적인' 모델을 지지하기 위한 동기에서 다른 관점을 선택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의구심을 피하기가 어렵다."11
로마서 12장 3-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4-28절에서 언급된 은사들이 손 대접, 베푸는 일, 행정 및 그 밖의 다른 봉사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 에베소서 4장은 건전한 교리로 온몸을 성숙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에 주신 직분자들이라는 선물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요점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실 때 말씀 사역을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점이다. 이는 사역자들이 아닌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은사와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내용은 나중에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부터 5장 전체에 걸쳐 나온다. 그들은 섬기기 전에 먼저 섬김을 받는다. 이 사실은 자기 백성을 먼저 받는 자로 만드시고 그 결과로 적극적인 주는 자로 만드시고자 하는 교회의 승리하신 머리이신 주님의 놀라운 관대함을 또다시 부각시킨다.
몸이 온전히 돌아가려면 모든 지체와 모든 은사가 필요하지만 그 몸의 생명 자체는 밀씀 및 성례 사역의 신실한 유지에 의존한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행 6:2-7) 몸의 모든 지체가 오로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없지만 (특히 모든 지체는 사역자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양들은 꼴을 먹지 못할 것이고 몸은 그리스도께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사도들이 집사 임명을 통해 집사의 일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 해졌다고 말한다(행 6:7). 베드로도 이 일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면 분명 보통 사역자들은 세속적인 일과 심지어 교회 행정의 필요하고 중요한 세세한 일에서도 가능한 한 벗어나야 한다.
이 사역을 통해 우리는 모두 믿음의 통일성,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을 받아 누리는 이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함께 소유한 것(한 아버지 하나님, 한 성령,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을 그리스도는 대대로 보존하신다. 이 사신들이라는 선물을 바탕으로 몸의 나머지 지체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않고(엡 4:17) 세상 속에서 자신의 부르심대로 살아가도록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받는다(18-24절). 그들은 심지어 수납자로서만이 아니라 행위자로서 봉사에 참여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그들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한다.(5:15-21).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공식적인 말씀 사역은 필수적이다.
몸은 공동체로서만이 아니라 교회로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끈으로 그 머리에 연결된다. 예컨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의 왕과 머리이신 주 예수는 교회 정치를 위정자가 아닌 교회 직분자들의 손에 맡기셨다. 이 교직자들에게는 천국 열쇠가 맡겨졌고 이로 인해 그들에게는 각각 죄를 그대로 둘 권세와 사면할 권세, 즉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씀과 권징으로 천국을 닫을 권세,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복음 사역을 통해,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권징에서 해벌함을 통해 천국을 열 권세가 있다.12
지역 교회 외에도 더 큰 범위의 교회 회의가 있으며 그 회의의 결론은 "경외함과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그 결정이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결정을 내리는 권세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해진 하나님의 규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신학]中 '사도성'에서 발췌(873-888p)
- Lesslie Newbigin, Household of God, p. 82. [본문으로]
- 특히 리처드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김귀탁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을 보라. [본문으로]
- '이 주제를 탁월하게 다룬 책을 보려면 리처드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강림]을 보라. 고전 12:28과 엡 4:11에서의 [본문으로]
-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e Doctrine(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906-912, 1031; 참조. [본문으로]
-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잘 변호한 글을 보려면 다음 책을 보라. Robert Reymond, 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the Presbyterian Church Today(phillipsburg, N.J.;p&R. 1977), pp. 32-35. 다음 책도 함께 보라.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II.: InterVarsity Press, 1995), pp. 237-268. [본문으로]
- Grudem, Systematic Theology, p. 1058. [본문으로]
- 앞에 책. [본문으로]
- '이 논증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N. T. Wright, [본문으로]
- Darrell Guder, The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Grand Rapids: Eerdmans, 1998), pp. 79-81. [본문으로]
- 우리의 해석은 대체로 12절 상반절의 '카타르티스몬'과 '에이스'를 '능력을 갖추게 하다'와 '온전하게 하다'(훈련시키다) 둘 중에 어느 쪽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온전하게 함'이 성숙함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몸의 비유가 나오는 이 논증의 논리에 더 잘 부홥된다. 이와 같은 일은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라는 그리스도의 선물을 통해 발생한다. 더 나아가 이 선물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12-15절). [본문으로]
- Andrew T. Lincoln, Ephesians(WBC; Dallas: Word, 1990), p. 253; 이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o the Galatians and Ephesians[trans. William Pringle; Grand Rapids: Baker, 1996], pp. 277-286)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칼빈은 최근 번역본 같은 번역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칼빈은 새로운 번역을 따르는 많은 주석가들보다 더 부드럽게 이 본문의 논증의 흐름을 파악한 듯 보인다. [본문으로]
-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n Book of Confessions(Louisville: PCUSA General Assembly, 1991), 32, 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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