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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본 자료는 2023년 8월 21일 나주시에서 주최한 한국-프랑스 외교사 재조명 국제포럼에서 당시 (1851년) 나주목사 겸 남평현감이신 휘 정현(諱 正鉉 32世, 동부승지공파)의 행적에 대하여 제1발제자인 피에르 엠마뉘엘 후 파리 7대학 교수의 발표문을 발제자의 허락을 얻어 연재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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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의 고래와 샴페인:
한국과 프랑스의 또 다른 첫 만남 (1)
들어가는 말
1851년(철종2년 4월2일 전라도 연안의 비금도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Narval)가 좌초되었다. 주(駐)상하이 프랑스영사 몽티니 (Charles de Montigny)는 동포를 구하려고 조선으로 건너갔고 마침내 5월1일 비금도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날, 몽티니가 나주 겸임 남평 현감 이정현과 함께 프랑스 샴페인과 여러 종류의 술을 즐겁게 마셨다. 그리고 5월4일 몽티니 영사는 조난한 포경선원들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왔다.
본인은 한국과 프랑스의 이 역사적인 사건을 17년 전 발견하여 한불초기 관계를 연구하여 발표했다. 그 뒤로도 프랑스어 저서1)와 학술논문, 대중잡지에 나르발호 사건을 소개했다.
한국에서도 수차례 초기한불 관계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지만 나르발호를 중심으로 한 강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본인은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 소장 된 몽티니 영사의 포경선 구조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나르발호 사건을 알게 되었다. 몽티니 영사가 당시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이 보고서에는 나르발호 사건이 상세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나르발호에 대한 유일한 자료는 아니다. 흥미롭게도 1851년 영국신문에 나르발호 사건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더 노스 차이나 헤럴드(The North-China Herald)'라는 영문 주간 신문이었다. 몽티니 영사와 함께 배를 타고 비금도에 간 영국 상인 맥도날드(James Mac Donald)가 당시 상황을 상세히 연재했다. 그리고 조선측의 「일성록(日省錄)」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관찬(官纂) 자료, 즉 공식 문서에서도 나르발호에 관한 여러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종합해 보면, 나르발호 사건과 관련된 기록은 프랑스 외교문서, 영국 신문기사, 조선의 공식문서에 다양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자료 말고도 파리 교외에 위치한 세브르 국립 도자기 박물관 (Muséenational de la Céramique de Sèvres)에 비금도 사건의 유물인 옹기병 3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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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상기 자료를 종합 분석해 나르발호의 비금도 사건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한불 초기 관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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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이란?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천주교의 전파와 탄압으로 시작된 병인양요를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를 살펴보면 그 전에도 여러 번의 첫 만남이 있었다. 대표적인 첫 만남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는 13~14세기 고려왕국에 대한 프랑스인의 기록을 통해 처음으로 한반도와 만났다.
● 18세기 조선 연행사 즉 조선시대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과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의 교류를 통해 조선 사람과 프랑스 사람은 중국 북경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 1787년 라페루즈(La Pérouse) 해군 장교가 처음으로 조선 앞바다를 탐사했다.
● 1836년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이 조선에 밀입국했다.
●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는 한불 양국의 첫 무장 충돌이었다.
● 1886년 한불 양국이 처음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위에 언급된 사건들은 프랑스와 한국의 첫 만남을 이해하는데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첫 만남 이전에도 프랑스와 한국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첫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851년 비금도에서 발생한 나르발호 사건 역시 한불 양국의 다양한 첫 만남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19세기의 서양 포경 산업
나르발호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서양 포경 산업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19세기 포경 산업은 미국인이 주도했다. 미국 다음으로 프랑스, 러시아, 프러시아, 영국이 뒤를 따랐다. 당시 고래는 조명 연료, 화장품, 우산 재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18세기 대서양에서 포경활동이 대폭 확장되었고, 계속적인 남획으로 고래 개체수가 감소했다.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남반구로 포경산업 어장을 확대해 갔으며 인도양과 남태평양 연안 등이 새로운 어장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마침내 한국 동해를 포함한 북태평양 지역까지 포경산업 어장을 확대하게 된다. 이 시기가 서양 포경산업의 전성기였다. 당시 약 300척의 포경선이 조선과 일본, 그리고 류큐 앞바다에서 활동했다. 다수 포경선은 조류, 태풍, 지역의 몰이해, 그리고 물자 부족 등으로 각국의 연안에 출몰하고 마침내 표류하거나 좌초하기도 했다. 당연히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 포경산업의 황금기는 1830-1844년 사이였다. 이 기간에는 뉴질랜드 근처의 남태평양이 주된 어장이었으며 북태평양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1845년부터 프랑스의 포경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0년대 초반, 프랑스 포경선이 북태평양과 조선 연안을 떠난 이후 1868년에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포경선들은 전부 프랑스 서북부 항구인 르아브르(Le Havre)에서 출항했다. 당시 한번 고래잡이 출항을 하면 3년간 전 세계를 돌고 귀항하곤 했다.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양에서 중국, 한반도, 일본, 오오츠크해를 지나 태평양 건너 하와이, 남미 칠레를 지난 뒤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섬 hots Liancourt)'이라고 이름을 붙인 리앙쿠르호도 프랑스 포경선이었다. 리앙쿠르호는 1847년에 르아브르에서 출항해 3년 동안 세계를 돈 뒤 1850년에 다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 (다음호에 계속)
이상 출처: 용인이씨종보 제151호 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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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의 고래와 샴페인:
한국과 프랑스의 또 다른 첫 만남 (2)
나르발호가 왜 비금도에 좌초했을까
나르발호는 1833년 프랑스 서남쪽의 바욘(Bayonne)iti에서 건조된 495수의 포경선이었으며 선주는 르아브르 항구의 기형 제(Guillot frères)였다. 1840년대말의 선장은 리바람(Rivalan)이라는 프랑스인이었으며 선원은 29명이었다. 위험한 고래잡이와 장기간의 항해 때문에 나르발호도 다른 포경선과 마찬가지로 '떠다니는 지옥' 과 같은 형편이었다.
나르발호는 1850년3월20일 르아브르에서 출항했다. 일 년 동안 대서양,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포경 활동을 하다가 1851년 2월 24일, 마리아나 제도(Mariana)를 출발해 한반도의 동해를 목적지로 정했다.
그런데 그해 3월말, 나르발호는 조선 서해 고군산군도 연안에 갑자기 출몰하게 된다. 영광군수 김덕근(金德根)과 현지 첨사(僉使) 이명서(李命瑞)가 두 차례 그 이양선2)을 문정3)하려다가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 선장은 조선 관료에게 필답했는데 군수의 말로는 이국 글자가 '범어와 전자4)같다(如梵書如篆字)'라는 이유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로 나르발호가 다시 출발하여 4월 2~3일 밤에 전라도 비금도에 좌초하게 된다.
「일성록」에 따르면 나르발호의 표착지는 비금도 서쪽의 예미포(曳尾浦, 오늘날 이미해변) 였다. 선원들은 종선 세 척을 타고 멀지 않은 세항포(細項浦, 오늘날의 월포마을)에 상륙했다. 비금도 서면(西面)의 풍헌6) 양선규(梁善圭)가 표착지에 즉시 나와 선원들을 문정했다.
양측은 상대방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모래에 그림을 그리거나 손짓, 몸짓으로 이야기 했다.
양선규는 포경선원들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을 옆 마을인 율내촌(栗內村, 오늘날 내촌마을로 추정됨)으로 데려가 그 곳에 머물게 했다
또한 양선규는 바로 나주 겸임 남평 현감 이정현에게 문장(文狀)을 보내고 이국인의 표착 소식을 알렸다. 이정현은 그 소식을 전라 감사 이유원(李裕元)에게 전달했고 이유원은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 이국인을 보호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정현과 전라도의 수군우후8) 최홍현(崔洪賢)은 즉각 비금도로 달려갔다9).
한편 나르발호의 선원들은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선원들이 한 번에 종선을 타고 도망갈 수 없으니 먼저 섬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현지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비금도 사람들이 '티오상(Tio-sang)' 이라고 대답했다. 'Tio-sang' 은 '조선' (19세기 한국어 발음은 '됴션' 이라는 뜻이었다10).
4월 9일, 나르발호 선원들 중 9명이 선장도 모르게 종선을 타고 도망갔다. 그들은 황해를 건너 열흘 후 4월19일에 청나라 상하이의 항구 오송(吳淞)에 도착했다. 그들은 오송에서 접촉하게 된 영국인들 덕분에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몽티니 영사는 주저하지 않고 나머지 20명의 선원을 구조하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바로 다음날 배를 구하여 영사관 통역관 1명, 중국어에 능통한 영국 상인 1명, 상하이에 거주하던 포경 선원의 친척 1명, 나르발호 선원 5명, 중국인 20여 명 등 총 30명 정도를 태우고 선원들이 알려준 'Tio-sang'으로 향했다.
그들이 이용한 배는 '로차(lorcha)'라고 불리던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이 혼합된 배였다. 그 때 당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전선도 삼선도 없었기에 상하이 포도관(捕盜官, 일종의 경찰관) 리우치엔진(劉乾進)의 관용(官用) 로차를 빌리게 되었다.
몽티니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나침반 1개, 육분의(六分儀) 1개, 조선지도 1장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국 신문기사를 보면 사실 여러 지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몽티니 영사가 장관에게 자신의 용감함과 임시변통의 상황을 강조하려고 그렇게 썼을 것이다.
**註----------------------
1) 선원은 원래 30명이었으며 프랑스 사람 23명, 포르투갈 사람 5명, 칠레 사람 1명, 태평양 사람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금도에서 좌초하기 전에 한 명이 죽었다.
2) 異樣船(이양선),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으로 당시 서양의 배를 가리킴.
3) 고려와 조선시대 때 외국의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나 외국인이 표류하여 왔을 때 관리를 보내 그 사정을 알아보는 것.
4) 篆字(전자), 한자 글씨체의 하나.
5) 프랑스 옛 그랑빌 박물관((Musée du Vieux Granville) 소장.
6) 風憲(풍헌). 면(面)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7) 예미포, 세항포와 율내촌의 오늘날 이름은 신안군청, 세계유산과의 이재근 선생님께서 제공해 주셨다.
8)水軍虞候(수군우후),조선시대 각 도의 수영(營)에 두었던 정4품 무관 벼슬
9) 2023년 5월 이후 여러 신문 기사에서 '나주 목사 김재경(김재경(金在敬)과 몽티니 영사의 만남'을 언급한다. 비금도는 그때 당시 나주목에 속하였으며 당연히 나주목사가 나서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프랑스, 영국의 1차 자료에 따르면 김재경은 비금도에 간 적이 없으며 몽티니 영사를 만난 적이 없다. 비금도에 간 현지 관료는 바로 남평 현감 이정현이었다. 오해의 원인은 1851년의 조선 공식문서에서 이정현은 '나주 겸임 남평 현감(羅州兼任南平縣監)'으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1851년 5월10일(음력 4월10일) 암행어사 조운경(趙雲卿)이 김재경에게 죄 줄 것을 요청했다. 즉 김재경은 몽티니가 비금도에 도착하고 9일 만에 탄핵 당했다. 이 탄핵의 원인은 나르발호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정현이 왜 '나주 겸임 남평 현감'이었는지, 그리고 왜 김재경 대신에 비금도에 갔는지에 대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10) 조선시대 때는 외국선박이 조선 연안에 좌초했을 경우 현지 관료나 현지인들은 평상시 외국인들에게 '여기가 조선땅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코리아'를 알고 있었는데 '조선'이란 명칭을 모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많은 오해가 생겼다. 한 예로 19세기 중엽까지의 서양 기록과 지도에서는 부산은 'Chosanharbour (즉 조선 항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11) 지도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朝鮮全圖)」일 가능성이 크다. 몽티니 영사가 1854~1856년 프랑스에 임시로 돌아가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朝鮮全圖)」 두 장을 가지고 하나를 황실 도서관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에, 또 하나는 해무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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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용인이씨종보 제152호 2024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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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의 고래와 샴페인:
한국과 프랑스의 또 다른 첫 만남 (3)
몽티니 영사의 포경선원 구조
몽티니 영사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은 비금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난파된 배에서 돌아온 9명의 선원들이 비금도를 'Tio-sang 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몽티니 영사는 4월 25일 제주도 서남쪽 대정현 해안에 도착했다. 이 곳은 200년 전에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표류했던 지점과 거의 비슷하다. 이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근대에서는 중국의 강남이나 남쪽 지역에서 배를 타고 조선이 해류와 바람 때문에 제주도에 표류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몽티니 영사는 제주도에서 대정현 목사 이현공(李玄功)을 만나 필담을 통해 '티오상이 어딘 줄 아나? 난파한 프랑스 배를 보았는가? 라고 물었다. 이현공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몽티니 영사가 이현공에게 알게 된 정보는 자기가 도착한 섬이 제주도라는 것 뿐이었다. 한편 이현공은 이국인을 문정하면서 몽티니 영사와 배에 타고온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흥미롭게도 자랑과 거만이 가득한 몽티니 영사가 자기 나라를 '대법란서국(大法蘭西國)'으로 소개하였는데 이현공은 서양 지리도 서양 각국의 국명도 몰라 계속해서 '란서국(蘭西國)'으로 이해했다.
이현공이 문정을 마치고 몽티니에게 많은 물자를 기증하고 로차에 싣게 했다. 이현공 덕분에 몽티니 영사는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고 며칠 있다가 전라도 신안의 다도해에 도착했다. 몽티니 영사는 섬 하나하나를 뒤지면서 난파된 선원들을 보았느냐고 수소문하고 마침내 비금도에서 선원들을 발견했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지 12일만 이었다. 비금도가 큰 섬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이 찾아와 구경했다. 몽티니 영사는 5월 1일에 비금도에 도착하고, 5월 4일에 상하이로 돌아갔다. 사흘도 안되는 짧은 방문이었다.
몽티니의 구조인가? 조선 정부의 구조인가?
몽티니 영사는 비금도에 도착한 뒤 나르발호의 나머지 선원 20명을 만났다. 몽티니는 조선에 대한 지식이 빈약했으며 조선 정부의 천주교의 탄압 정책과 17세기의 널리 알려진 「하멜 표류기」에 반영된 조선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만 알고 있었다. 즉 서양인이 불운하게도 한반도에 난파하게 된다면 영원히 그 나라에 갇히거나 처형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몽티니 영사는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자기가 아주 용감하게 조선땅에 가서 '감금되고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선원'을 구조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것은 몽티니 영사의 일방적인 구조로 볼 수 있는가? 조선뿐만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각국에서 '표류민 송환 제도'가 있었다. 외국 표류민이 발견되면 잘 대접해서 보호한 뒤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도였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유원(柔遠)', 즉 '멀리서 온 사람을 화목하게 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도 해 마다 한반도 앞바다에는 중국이나 일본, 서양에서 온 배가 난파하거나 표류하는 사람이 많았고, 전라도 연안의 다도해에서 표류하는 외국 배가 상당수였다. 조선 정부는 대부분 표류민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도록 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배의 표류 빈도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서양인이 통상이나 선교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선 공식문서에서 그 때 당시 서양인들은 두 가지로 불렸다. 먼저 통상이나 선교를 하러 온 서양인을 '양적(洋賊) 또는 양추(洋醜)', 즉 서양 오랑캐라고 불렀다. 양적이나 양추는 무조건 입항을 거절했다. 그러나 포경선원을 비롯해 표류하는 서양인들은 그냥 '이양선을 타고 온 이국인(異國人)'이라고 불렀다. 이국인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 아니고 중성적인 표현이었다. 환언한다면 잘 대접해 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조선정부는 1851년 비금도에서 난파한 20명의 이국인을 구조하려고 했다. 전라감사 이유원은 나르발호의 선원들이 중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비변사에 알려주었다. 5월 1일(음력 4월 1일) 비변사에서는 '이국인들에게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비변사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날에 몽티니 형사가 비금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배를 마련하기 전에 몽티니 영사가 타고 온 배에 20명의 선원들을 태우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 오지 않았어도 나르발호의 선원들은 조선 정부의 도움으로 청나라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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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용인이씨종보 제153호 2024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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