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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멸망의 원인
김 영 문 명예교수(정치행정대학, 정치외교학과)
Ⅰ. 문제 제기
1910년 8월 22일 서울 거리 곳곳에 일본 헌병들이 감시하고 있는 가운데 창덕궁 흥복헌에서 조선 왕실의 숨통을 끊는, 비극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석했으며, 회의는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끝났다. 토론 없이 한일합병조약은 서명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단 두 구절이었다. 제1조, 대한제국 황제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는 이 양여를 수락하고 대한제국 전부를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 부른다. 조선의 왕과 왕족 그리고 대신들은 나라를 일본에 바쳤다. 어떻게 518년이나 유지된 나라가 자국의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평화적인 왕권교체나, 쿠데타나 혁명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한일합병조약이라는 문서 하나로 무너질 수 있었는지? 이 문서 하나로 인해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지키면서 살아온 한민족은 자유를 잃고 다른 나라의 종이 되며, 그 터전마저 하루아침에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미증유의 참변이 불 보듯 한데도 어떻게 선조 때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대규모 전쟁을 막아낸 조선이 총 한 방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하고 국권을 이양할 수 있었는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 "그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그토록 훌륭한 유산을 가진 한국이 그렇게 쉽게 멸망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라고 표현했다.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그러나 연구자의 사관에 따라 다양하게 분석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민족주의 사관은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동기에서 한민족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과장하였다. 한민족이 그토록 우월한 민족이라면 어떻게 만주벌판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대륙 국가에서 반만년이 지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반도 국가로 전락하였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 사관은 제국(帝國)으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대한제국의 출범을 비판하면, 이는 대한제국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패배주의적 역사의식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이 사관은 한민족의 혈통적 순수성 위에 우월성을 더하는 편협한 국수주의로 인해 조선의 멸망에 영향을 미친 내적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이 시간이 흐르면서 실천적 과제가 빠지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에 치우치며,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과학과 기술 정신과 부국강병의 꿈과 비전이 실종하고, 그 자리에 무사안일과 현상 유지라는 환경이 자리 잡지는 않았는지? 성리학의 종주국에 대한 사대·의존주의로 인해 자주·자립·자강의 정신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망국의 군주인 고종은 외세의 침탈에 희생된 영민한 군주인지 아니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암군 또는 혼군인지? 고종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대원군과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긴 조선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한 당파싸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의 대명사인 세도 정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실종된 조선의 양반과 관료 사회는 조선 멸망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지금까지 제기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올바로 얻으려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조선만이 가지는 특수성은 없는지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식민주의 사관은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발전을 위해 제국주의의 지배는 역사에서 필연이며 유익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역사학자들은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 즉 고종 때 왕실의 분열과 갈등, 당파싸움, 세도 정치를 확대 재생산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과 그 침탈 과정에서 조선을 병참기지, 노동력 시장확보, 원료공급지, 상품시장으로 착취하는 모습을 애써 감추는 한편 조선 근대화에 대한 기여도를 유달리 강조한다. 이처럼 이 사관은 조선 멸망의 내적 요인과 일제의 조선 근대화에 대한 기여도를 과장하고, 일제의 불법적 침탈과 수탈 과정, 식민지 백성들의 인권 유린과 고통을 외면하다 보니, 이 또한 과학적인 연구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해 정립된 유물론적 변증법 사관은 생산의 형태(the mode of production)에 따라 상이한 생산 수단(the means of production)을 소유한 계급과 그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노동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계급 사이에 대립과 마찰과 갈등으로 인류 역사가 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변증법에 따라 발전하였으며, 레닌은 마르크스의 발전단계 가운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품시장 확대와 값싼 원료공급과 값싼 노동력 확보가 긴요하며, 이를 위해 해외 식민지를 얻기 위한 제국주의가 등장했다는 제국주의론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 유물론 사관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봉건적 전제 왕조인 조선의 붕괴 요인을 계급투쟁과 제국주의의 침탈이라는 기계론적 틀에 맞추어 분석하고 있다. 이로 인해 518년의 조선사 가운데 400여 년 동안 조선왕조가 계급 갈등 없이 유지되었음을 생각하지 않고, 1800년 순조 이후부터 고종 때까지 양반들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억압에만 초점을 맞추어 홍경래 난, 진주민란, 동학란을 계급투쟁 차원에서 과장해서 분석하거나, 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문호를 개방하면서 밀려드는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에 대한 침탈만을 강조하다 보니, 조선왕조만이 가지는 통치 이념인 성리학, 당파싸움, 세도 정치와 사대·의존주의와 관련된 원인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사료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는 방법인 실증주의 사관에 따라 앞서 언급된 조선 멸망의 여러 원인 가운데 먼저,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이 변질하면서 조선 사회에 미친 폐해를 고찰한다. 다음으로, 국난을 앞에 두고 단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권력투쟁이나 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국가적 책무는 뒷전이고, 현재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부패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골몰한 조선의 지도자 즉 고종의 무능과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 당파싸움, 세도 정치, 매국 세력의 등장에 따라 살펴보는 한편 수탈 체제에 시달려 온 백성들의 반응을 자포자기형 무기력 증후군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끝으로, 강대국에 사대·의존하려는 조선의 외교 노선을 이용하여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침탈하는 다양한 행태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Ⅱ. 조선 멸망의 환경적 요인과 원인
1. 변질된 성리학의 폐해
일찍이 맹자(孟子)는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 스스로가 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자초한 '망할 짓'은 무엇이었기에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는 우주의 보편법칙으로서의 천리(天理), 인성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성리(性理), 윤리·도덕 규범으로서의 윤리(倫理), 사물 세계의 법칙성을 의미하는 물리(物理) 등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통해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을 연구하였다. 여기에서 리(理) 개념은 원리(原理)나 섭리(攝理)를 의미한다. 이렇게 주희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이 고려 후기 안향에 의해 전래되었다.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정치와 도덕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하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있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농업·상공업·해외 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이 필수적이다. 이 같은 부국강병을 지속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보다 한 걸음 앞질러 가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건강한 정신적 가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이 채택한 성리학적 통치 이념은 이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조선은 건국 초 태종에 의해 왕권의 안정을 이룩하자, 그 뒤를 이은 세종은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구현하려는 성리학의 실천적 과제를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세종은 군왕 혼자만의 즐거움을 버리고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가치를 실행에 옮겼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 말기 정조 때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이 대두되어 성리학의 실천적 과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지만,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에서 경험에 의한 실천적 과제가 빠지고 순수한 사유만으로 인식에 도달하는 관념론에 매몰되면서 공리공담과 허례허식에 치우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 조선의 지배계급인 사대부는 성리학을 신봉하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은커녕 권력을 장악하고자 학연·지연·혈연을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어 권력투쟁에 나서는 한편 정치적으로 상대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성리학을 이용하였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수용하여야 하지만 이들은 비판을 거부하고 교조적으로 성리학을 신봉하고, 다른 학문이나 사상, 심지어 유가의 다른 해석까지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내몰았다. 이것이 각종 피비린내 나는 환국, 사화, 사옥, 박해로 이어졌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 가운데 세종 재위 32년과 정조 재위 24년을 제외한 나머지 462년 가운데 대부분 조선의 성리학이 지닌 교조적인 성격에서 파생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에 기초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으며,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농업을 혁신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라면 반드시 바다로 진출하여 다른 나라와 무역하여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어야 하지만, 이런 경제 마인드는 없었고,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변의 강대국이 넘볼 수 없는 강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함에도, 우물 안 개구리식의 쇄국 정치와 소중화 사상에 사로잡혀 자주성을 잃고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치우치는가 하며, 안보마저도 자강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남에게 의존하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설을 확립한 이황과 주기설을 확립한 이이와 같은 걸출한 성리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은 그 내용에서 실천적인 과제가 빠지고 교조적이고 관념적인 학문으로 변질하였다. 어떤 학문이든 발전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비판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은 같이 성리학을 신봉하는 학자라도 해석에 차이를 보이면 사문난적으로 낙인찍고 여기에다 붕당이 다를 경우 예외 없이 신변의 안위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리학은 발전할 수 없었다. 17세기 남인 윤휴는 '세상의 이치를 주자(주희)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했다가 '사문난적'으로 찍혀 배척당하고, 그 후 붕당 간의 예송논쟁으로 사약을 받았다. 당시 윤휴는 주자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주자가 한 말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였지만, 대립 관계에 있던 서인 송시열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소론인 박세당도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지만, 그 또한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변록’은 불태워졌으며, 삭탈관직당했다.
당시 유가 사상 가운데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사변을 떠나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들어왔지만, 조선의 폐쇄적인 학문적 풍토로 인해 양명학은 이단으로 낙인찍어 배척당했다. 조선에서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정제두는 처음에는 성리학을 공부했으나, 성리학에 반기를 들고 20여 세 때부터 양명학(陽明學)에 심취하여 ‘존언(存言)’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였다.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현실 개혁을 부르짖는 실학을 강조하였다. 특히 정조 때 실학이라는 르네상스가 있었다. 당시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실학자는 소수 재야 연구자였으며, 이들 가운데 관직에 올라 어느 정도 고위직에 올랐갔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배제된 남인 학자들이었으므로 실학사상을 국정에 반영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실학은 현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용후생과 경세치용 차원에서 과학과 기술 도입론·중농적 제도 개편·중상론 등 실용적인 학문을 강조하였지만, 배타적인 성리학은 실학까지 소외하던 시대였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했으나, 거중기를 바탕으로 건축공학이나 기계공학에 확대 적용하려는 노력은 없었고, 그저 한 지식인의 특별한 호기심과 재능으로 간주할 뿐이었다. 여기에다 그는 남인이자 천주교도였기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둘째, 조선의 성리학이 공리공담, 허례허식으로 흐르면서 조선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윤택하게 하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 경영과 금융기법을 도입하여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 지식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의 고대 주나라를 이상 국가로 생각하는 과거지향적인 학문이고,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핵심 주제는 관념적인 이기론이므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을 추구하는 신지식인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다. 과학의 언어는 수학과 논리학인데 조선에서 수학은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도구나 선비의 취미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 과학적인 탐구와 사고,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를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신무기인 조총이나 홍이표가 들어오면 이것을 복제하거나 그대로 쓰는 것에 그쳤지, 이 무기의 성능을 연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더욱이 조선시대는 상업적 이윤추구를 죄악시하고, 공업을 천시하며, 사치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는 성리학적 윤리 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므로, 자본주의 발전의 전제가 되는 기업가 정신을 육성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인과 장인을 천시하였기 때문에 기업경영, 금융기법, 국부의 축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특히 조선의 신분제가 중기 이후 양천제에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발전하고, 적서, 남녀, 직업에 따라 신분 차별이 심화되면서 공업과 상업의 종사자들은 신분적 제약으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장인들은 가지고 있는 기술이 잡기로 취급되어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이들은 사회 하층민으로 이 기술을 통해서 자신의 신분 상승을 노리거나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저 시키는 일을 반복하거나, 외부에서 유입된 기술을 복제하는 것으로 그쳤다.
당시 14~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는 종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의 재발견이라는 르네상스의 물결이 넘실대고, 루터,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이 등장하였으며, 모든 시민의 자녀가 교육받을 수 있는 공교육 제도가 도입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관한 연구가 꽃을 피우며, 대항해시대가 열려 신대륙의 발견과 국제무역의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는 등 진취적이고 격동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귀족들과 백성들은 증대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길드를 조직하고, 자치권을 가지는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상공업과 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금융기법과 기업경영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었으며, 이런 반동의 중심에는 이처럼 변질한 성리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셋째,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지도자들은 안보와 외교에서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해서 사대하고 의존하는 이념에 갇혀 자주·자립·자강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를 빚었다. 원의 침략이 있기 이전 고려시대는 관제와 왕권, 그리고 호칭에서 증명되듯이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스스로 명의 신하로 자처하는 사대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의존형의 국가체제를 유지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가 만주에 있는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하였으며, 이가 곧 청 태조이다. 이후 1644년 중원에 새로운 왕조인 만주족의 청이 들어섰다. 그동안 조선은 흥기하는 만주족에 의해 인조 때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었다. 그런데도 소중화 사상에 사로잡힌 조선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을 기리는 사당인 만동묘를 만들어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외교적 오류를 저질렀다. 더 놀라운 사실은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여 서구제국주의의 준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세에 눈이 어두운 조선의 지도자들은 청에 의존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대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놀아났다.
청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자주와 자강 대신 의존과 사대에 젖은 조선 지도자들은 다른 강대국인 일본, 러시아, 때로는 미국에 의존하여 보호까지 요청하였다. 결국 조선은 강대국 의존 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일본으로 하여금 대한제국을 접수하도록 하는 비극을 선택하였다. 당시 조선 말엽 국제 안보 환경은 급변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8~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북미로 확산하였으며, 이후 이들 국가는 더 많은 국부를 얻기 위해 방위력 증강과 식민지 쟁탈전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강병을 위한 노력은커녕 잠자고 있었다. 성리학에 젖어 당쟁에 골몰하고 무반의 고위직을 문반이 점유하면서 군사력 증강을 위한 대응책은 건국 초기인 세종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방비 또는 무장해제 상태였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병자 호란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을 경험하였지만, 일시적으로 효종 때 북벌론을 제외하고는 조정의 대신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책이나 이념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법가나 병가에 대한 재조명은 전혀 없었고, 기존의 숭문천무(崇文賤武) 현상에 그대로 매몰되어 있었다. 심지어 조선은 존망의 위기에 처한 1894년 갑오경장 때에도 근대 국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강병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근대화된 무기로 무장하고 훈련한 일본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교조적이고 관념적인 성리학과 이 통치 이념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한 소 중화사상에 젖어 민족의 진취적이고, 상무(尙武)적인 대륙 정신이 사라지고, 선진과학과 기술의 도입을 백안시하였으며, 상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천시하였다. 한마디로 이런 성리학적 환경으로 인해 조선은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기회를 놓쳤으며, 그 결과는 36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일본은 16세기 중엽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혼노지의 변으로 비극적으로 죽은 오다 노부나가(1534~1582) 때부터 총의 위력을 파악하고 이에 관한 연구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영주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요잔(1751~1822)처럼 장사를 통해 돈벌이에 전념하고, 막부 말기에는 성리학 대신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적인 환경 위에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문물과 제도, 선진과학과 기술을 성공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2. 고종의 무능과 민비와 대원군 간의 권력투쟁
당시 조선의 지도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였다. 이를 위해 성리학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통치 이념을 과감하게 버리고, 개혁과 개방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제도, 과학과 기술을 신속히 도입하며,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신분제도, 과거 제도, 음서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백성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며. 전문인을 양성하기 위한 서구식 대학 제도를 도입하고, 권문세가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을 엄히 다스리며,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세제를 혁신하고, 농업의 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한 영농기술의 혁신과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는 한편 중세 길드 형 수공업과 보부상 차원의 상거래에서 벗어나 서구의 근대화된 과학과 기술을 응용한 공장제 기업과 서구의 첨단 금융기법과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이를 토대로 근대화된 군사력을 육성하여야만 제국주의의 침탈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나 고종이나 당시 세도 정치의 중심인 민비도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반동이나 수구적인 정치에 매몰되어 있었다.
대원군: 강화도령인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정조의 배다른 형제인 남연군의 손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이 11살의 나이로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아버지인 이하응이 섭정하는 대원군이 되어 10년 동안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먼저 대원군은 순조 이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 정치로 조선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만큼 이를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고, 당파싸움의 진원지인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하며, 지난날 당파싸움에서 소외되어 온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는 한편 국가재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양반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국가 재정수입의 3대 근간인 전정, 군정, 환곡으로 구성된 삼정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경복궁 중건에 백성을 무리하게 동원함으로써 이들의 생계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부족한 건축비를 마련하고자 발행한 당백전의 가치 하락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백성의 삶과 국가재정에 주름살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을 침탈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부국강병과 개혁·개방을 단행하기보다 천주교를 탄압하고, 시대에 뒤진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따라 외국과의 통상을 거절하는 반동적인 쇄국 정치를 시행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권좌에 있은 지 10년이 지나 재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대한 미련과 세도 정치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며느리인 민비와 권력투쟁에 나섰다. 지난날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에 억눌려 개처럼 살던 때를 기억하여 외척이 더 이상 발호하지 못하도록 집안이 미미한 민유중(숙종의 장인)의 5대손이자 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의 집안인 민치록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민비는 21살이 된 고종이 친정할 수 있도록 최익현 등을 앞세워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축출하고, 자신의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여흥민씨 세도 정치를 시작하자, 대원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권력을 되찾으려고 기회를 노렸다. 급기야 이 같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불화는 서로를 죽이려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1892년 봄 대원군을 폭살하고자 운현궁에 폭약을 설치하였지만 터지기 직전에 발견되었다. 이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대원군의 묵시적 동의하에 일본 낭인들을 보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싸움의 승자는 며느리도 시아버지도 아닌 일본이었다. 이처럼 대원군의 보수 반동적인 권력정치와 민비와 권력 암투는 조선의 멸망을 부채질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고종: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고, 친정에 나선 고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근대화라는 이 시대적 소명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급속하게 변모하고 있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대응할 안목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특히 근대화의 성공은 군신이 일치단결한 가운데 유능한 인재에 의한 정책 수립과 재정지원이 필요하였지만, 고종의 무절제한 낭비벽과 비자금 조성을 위한 매관매직과 이권 개입으로 근대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협정서(1904.8)에 따라 재정 고문으로 온 메카다슈따로(目賀田種太郞)가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를 평하기를 ‘완전히 고갈되어 문란이라는 글자로도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고종은 1897~1905년 8년 사이에 치른 3번의 국장 즉 왕비 민씨 국장(1895), 헌종 왕비 국장(1903), 황태자비 국장(1904)에 213만 6,000원을 지출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 총예산이 616만 2,796원임을 고려한다면 국가 예산의 3분의 1을 장례비에 지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홍릉에 묻힌 왕비 민씨의 묘터가 나쁘다는 무당의 말을 믿고, 1902년 금곡리 이장하였다가 11일 만에 다시 군장리로 바꾸는 소동에 무려 45만 원의 거액을 낭비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종은 1902년 즉위 40년과 51세 생일을 기념하는 2차례 궁중 잔치인 “임인진연”에 대한제국 1년 예산의 9%라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다.
나아가서 고종은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관매직과 이권 개입에 직접 나섰다. 당시 관찰사는 10~20만 냥, 일 등급 수령은 5만 냥이었다. 한 예로, 민영환의 장인을 광양 군수로 만드는데 그의 어머니가 5만 냥을 고종에게 헌납했다고 전한다. 외에도 고종은 광산개발권, 전기·전화·철도·전철 부설권, 토지 이용권, 회사 설립권 등 각종 이권과 홍삼 판매, 사금과 은 수출에도 개입하여 천문학적 비자금을 마련하였다. 고종은 이 비자금을 독일 공사를 통해 상해에 있는 독일 덕화 은행에 100만 마르크(현시가 500억 원)를 예치하고, 자신의 내탕금 관리자인 민영익, 이용익, 현상건을 통해 일본 제일은행, 러시아 로청 은행, 영국 HSBC에 140만 원(현 시가 700억 원)을 분산 예치한 것으로 전한다. 이 같은 비자금 조성은 190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1907년 이후 고종은 이 비자금으로 4번의 러시아 망명과 1번의 베이징 망명을 시도하였다. 일국의 황제라는 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국강병에 이 비자금을 사용하기보다 도망할 궁리를 하였다.
더욱이 고종은 수구적인 민씨 세도 정치라는 인의 장막에 갇혀 고종 주변에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인재가 없었으며, 그나마도 근대화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여도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성공이 어려운데도 수구와 개화 세력으로 지도부는 분열되었고, 개화하더라도 자주·자강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로 갈라져 싸우다, 근대화의 시늉만 내고는 주저앉고 말았다.
국가의 안보를 다지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 경제를 키우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에게 이런 노력은 전혀 없었다. 그 결과 조선의 군대는 자신의 영토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 무장투쟁 하나 제대로 진압하지 못해 외세에 의존하였고, 고종은 자기 아내인 민비의 생명 하나를 지키지 못해 일본 낭인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그 시신마저 휘발유를 끼얹어 소각되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당시 궁궐을 지키는 시위대는 1894년 청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최신식 라이플 3,000정, 야포가 8문, 기관총이 8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위의 무기들을 향원정 연못에 수장하였기 때문에 남아 있는 무기는 얼마 되지 않고 실탄마저 떨어져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는 일본 낭인과 함께 민비가 있는 건청궁에 난입하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후 고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무려 1년 14일이나 머물렀다. 이후 궁궐에서 자기 잠자리하나 지키지 못하고 외국 공사관으로 도망간 고종은 조정의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한마디로 고종은 근대화에 대한 개념도 몰랐고, 개혁과 개방, 부국강병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며, 오백 년을 견디어 온 사직과 남의 종이 될 백성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 단지 자신의 지위와 안전을 지키는 일에 골몰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며, 수구적인 군주였다. 결국 고종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실질적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단지 궁궐에 기거하며 자신의 생명이나 구걸하고, 일본이 주는 은사금으로 부끄러운 생계를 이어가다 1919년 1월 일본에 의해 독살되는 용렬하기 그지없는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민비: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이 없는 가난한 민치록의 15살 된 딸을 고종의 비로 1866년에 데려왔다. 그녀는 어렸을 때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훗날 그녀가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고종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의 조선 왕비와는 달랐다. 지아비인 고종과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조선에 온 외교관들은 고종보다 민비를 더 주목할 정도로 실세였다. 고종이 21세 되던 1873년 민비는 오래전부터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었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가와 노론 세력과 손잡고 실력을 비밀리에 키웠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반 대원군 세력을 동원하여 대원군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이후 1882년 임오군란 때에도 장호원으로 도망한 민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환궁하자, 청의 오장경으로 하여금 대원군을 중국의 톈진으로 압송하게 함으로써 재집권한 대원군을 33일 만에 축출하였다.
나아가서 민비를 중심으로 한 여흥민씨들은 22년 동안 세도 정치를 통해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나라의 기강은 완전히 무너졌다. 민비는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다음 해에 아들이 태어나자, 하루에만 천금의 비용을 들여 아들이 잘되기를 비는 제사를 팔도강산을 두루 다니면서 지냈으며, 이에 따라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국가재정을 모조리 탕진했다. 그 외에도 무속에 빠진 민비는 친정아버지 묘를 4번이나 이장하고, 임오군란 때 피난처에서 만난 무당을 진령군으로 봉하는가 하며, 무뢰배인 이유인을 귀신을 부릴 줄 안다는 진령군의 거짓말에 속아 양주목사로 보냈다. 이처럼 벼슬이 무당한테서 나온다는 소문으로 고관들이 진령군의 집을 문지방이 닳도록 찾았다는 일화가 있다. 더욱이 재정은 파탄되어 군인들의 9개월 동안 월급을 주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임오군란 4개월 전에 민비는 세자빈 민씨와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데 거액의 돈을 지출했다.
한편 민비의 잘못된 외교적 판단으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민비는 처음에 수구적인 성향으로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일본을 견제하는데 아편전쟁 이후 서구제국주의의 준 식민지로 무너져 내린 청을 끌어들이는 외교적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영토에 야심이 있는 이웃 강대국인 청, 일본, 러시아보다 영토에 야심이 없고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대국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외교의 상책이었지만, 민비는 한반도를 둘러싼 서구제국주의 세력 간의 힘의 균형상태를 완전히 오판한 나머지 그 시대의 유일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발흥하고 있는 미국을 마다하고 임오군란과 동학란 때는 청나라와 일본에 힘을 빌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이번에는 일본과 친일 급진개화파를 숙청하기 위해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끄는 친일 혁신 정부를 압박하여 갑오경장(1894)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이런 흐름을 끊기 위해서 대원군과 결탁하여 을미사변(1895)을 일으켰다. 결국 민비가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으며, 민비가 시해된 지 7년이 지나, 1902년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한 이익을 인정하게 된다.
3. 당파싸움
조선이 망한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당파싸움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든 생각, 견해,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뜻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공당과는 달리 조선의 붕당은 성리학이라는 이념을 함께 신봉하면서도 교조적인 학문의 성격으로 인해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학연, 지연과 혈연에 따라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들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 방해되는 세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였다. 이들은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단순히 차이점으로 보지 않고 악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이념적 견해 차이를 구실로 내세워 상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백 년에 걸쳐 참혹한 사화, 환국, 박해, 숙청으로 얼룩졌다.
당파싸움의 내용을 살펴보면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튼튼히 지키려는 부국강병의 정책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거나,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해서 무조건 사대하고 의존하려는 자세를 비판하고 자주·자립·자강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아니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새로운 과학과 기술,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면 조선 사회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려는 도전정신과 개척정신, 진취성과 창조 정신을 두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하찮은 이조전랑 등 보직·승진·징계 문제, 세조가 1455년에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중국 초나라 장수 항우가 초의 마지막 왕인 회왕 즉 의제를 죽이고 자신이 초패왕으로 등극한 것을 비유한 ‘조의제문’ 등 사초 문제, 복상 기간을 두고 벌린 예송논쟁, 영조처럼 왕이 사망하면 대두되는 왕위 계승 문제, 아니면 성리학을 비판하는 실학이나 서학인 천주교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처벌하는 문제를 두고 상대를 삭탈관직, 유배,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그 긴 세월을 허송하였다.
당파싸움의 기간 또한 조선사 가운데 세종을 포함한 건국 초기와 탕평책을 활용한 영조·정조 시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당쟁의 역사로 보는 소수의 학자가 있는가 하며, 다수의 학자는 선조 7년(1574)부터 기해박해가 일어난 헌종 5년(1839)까지 265년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건국 초기, 영조·정조 시대(재위 1724~1800)의 탕평 정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 정치 59년을 제외하고, 사림파가 등장하여 훈구파와 대립하던 세조(재위 1455~1468) 때로부터 여흥민씨 22년의 세도 정치 기간 중 여흥민씨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개화파 사이의 정쟁을 거쳐, 조선의 당쟁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잃은 1905년 을사늑약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320년 내외의 긴 조선의 당쟁사를 요약하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공을 세운 훈구세력이 권력을 상당 기간 독점하였지만, 세조 때 지방의 선비들이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있었다. 연산군 때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의 사초로 올리자, 훈구파가 사림파의 김일손 등을 처벌하는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
그 후 선조 7년(1574)에 이조전랑직을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 각각 서인과 동인이라는 붕당으로 발전하여 싸우다가 1589년 선조 22년 개혁과 개방적인 정여립의 대동계 모반사건으로 서인 정철이 동인 연루자 1,000여 명을 숙청하였다. 선조는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다. 이듬해인 1591년 봄에 귀국하여 서인이자 정사 황윤길은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동인이자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다”라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당시 왕과 신하들은 있는 현실은 외면하고 보고 싶은 허상을 현실로 믿고 싶어 하는 상황이므로 김성일의 보고를 더 믿었다. 그러나 정사 황윤길이 전쟁에 대한 가능성을 계속 주장하자 불안해진 조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지방 군기 검열을 맡겼다. 임란 발발 12일 전인 4월 1일에도 신립은 왜군이 쳐들어올 것에 대한 대비책을 묻는 류성룡의 질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처럼 부사 김성일의 보고에 힘을 실어준 결과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임진왜란(1592.4.13.)이 발생하자 전 국토는 유린당했다.
임란 전해인 선조 24년(1591) 서인의 지도자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 동인이 이 문제를 두고 정철을 징계할 것을 주청했으며, 그 징계 수위를 두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광해군 때 북인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북인은 홍여순 대사헌 천거 문제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다.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으로 폐위되자 당시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났던 서인이 재등장하여 소모적 붕당정치가 격화되었다.
이후에도 소현세자(효종의 형)와 강 빈의 자식을 적통으로 보는 정통성문제를 두고 남인과 서인의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있었으며, 효종 사망에 따른 대왕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1년 상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 상복을 주장하는 남인 사이에 정쟁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사화로 발전하여 남인 윤선도는 1년 상을 주장한 송시열을 역모로 제거하려다 자신이 유배당했다.
숙종 원년인 1674년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남인은 2차 갑인 예송 문제를 가지고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실각하면서 남인 윤휴는 사약을 받았다. 당시 서인 사이에 남인 처리 문제를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9년 뒤 1689년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으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사약 받은 윤휴와 송시열은 젊은 시절 절친 사이였다. 이처럼 조선의 당쟁은 붕당 간의 잦은 환국, 사화, 박해, 사옥으로 얼룩졌다.
한편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찬성한 노론 가운데 벽파와 사도세자를 옹호한 소론과 남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파의 대립이 있었지만, 조선이 부흥할 기회가 정조 때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한 소론과 남인 중심의 시파를 등용하였다. 이들은 진보적이고 집권 세력이 아닌 재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로서 실학파가 많았고 천주교를 선호했다. 시파 중에서도 신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신부들이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시파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정조 때 천주교도이자 남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자, 이들을 처형하는 신해 박해(1791)가 발생했다. 정조는 처음에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중용하였지만,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에 따라 남인조차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11살에 왕이 되었으므로 궁중에서 제일 어른이었던 정순왕후가 섭정했다. 그의 집안은 수구 보수 노론 벽파이었기에 정조 때 중용되었던 시파인 소론과 남인의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당한 이들의 상당수가 천주교인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유교 국가에서 이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였다. 반대파인 시파가 자연스럽게 숙청되었으며, 실학자들도 귀양을 가거나 처형되었다. 당시 일본은 양명학을 통해 근대화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있던 시기에, 실낱같은 조선 근대화의 희망이었던 실학은 1801년의 신유박해로 남인이 전멸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에도 천주교 교세는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집권 세력인 안동김씨 문중에 천주교인이 많아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이다. 1839년 헌종 5년 벽파(僻派)인 풍양조씨 가문은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 사교 근절을 명분 삼아 천주교도가 많았던 안동김씨 세력을 공격한 것이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포함하여 천주교도 118명이 순교하였다. 기해박해로 풍양조씨 5년간의 세도 정치가 있었지만, 1846년 조만영의 죽음 이후 1863년 철종 사망 시까지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부활하였다.
철종이 자식 없이 붕어하자 고종이 11살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섭정이 된 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근절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을 펴 외척의 발호를 막는 한편 당파싸움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1873년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민비 일족에 의한 세도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이로 인해 당파싸움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민씨 일족과 이항로의 수제자인 노론의 최익현 등과 연대한 수구파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라는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하게 된다. 이들 수구파는 성리학을 통한 위정척사와 청의 도움을 강조하고, 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개화파는 중체서용,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강조하는 온건개화파와 외세의 도움을 받아 전면적이고 신속한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개화파로 나뉘어졌다. 심지어 외세에 의존하여 근대화하려는 급진개화파 가운데서 친러파, 친일파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처럼 조선의 지도층은 분열하여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다투었으며, 자주성을 잃은 채 강대국에 의지하여 살길을 찾다 근대화의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4. 세도 정치
1800년 정조가 죽은 이후 조선은 왕의 외척이 나라를 다스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처럼 왕의 외척에게 국가권력이 집중되는 권력의 카르텔을 세도 정치라 부른다. 이들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는 서구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서세동점의 위기 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외면하였으며,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로 국가재정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이로 인해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다 못해 연해주와 간도 지방으로 도망가는 참담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순조·헌종·철종 시기인 1800년부터 1863년까지 63년 가운데 11살의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계비이자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서 4년간의 섭정과 기해박해로 등장한 풍양조씨의 5년간의 세도 정치를 제외한 안동김씨 54년의 세도 정치는 국가는 허울뿐이지 이들 일족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국가의 기강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김씨 왕조인지 착각할 정도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노론이 사도세자의 죽임에 찬성하고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벽파임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치의 문을 연 노론 김조순은 사도세자의 죽임을 반대하고 정조의 즉위를 지지한 시파였다. 따라서 그의 딸이 정조의 세자빈으로 간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순조가 15세가 되던 1804년에 친정을 허락하면서 김조순에게 순조를 보좌하도록 부탁하고 섭정을 끝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 측근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중요 관직에서 몰아내고 자기 집안인 안동김씨들을 모든 요직에 앉혔다. 이후 54년 동안 3명의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조선은 온통 안동김씨의 세상이었다. 이들은 부국강병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집안만 흥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관리들은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으면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본전에다 이익을 챙겨 치부했다. 백성들은 굶어 죽을 정도로 살기 어려워지자,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1811) 등이 그 예이다. 부처가 나타나서 잘살게 해준다는 미륵 사상이 등장하고, 계룡산에서 정 도령이 나타나 왕이 되어 선정을 베푼다는 정감록이 유행했다. 민족 신앙인 천도교가 출현하여 신분제도로 홀대받던 백성들에게 인간에 대한 존엄과 평등사상을 전했다.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듯이 이 천도교를 동학이라 불렀다.
순조는 세자빈으로 1819년 영돈령부사 조만영의 딸인 풍양조씨를 맞아들였으며, 1827년 안동김씨에게 집중된 국정의 주도권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세도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세자는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며,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대리청정을 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요절한 세자의 아들 헌종(재위 1834~1849)이 8살에 등극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당시 세자빈이었던 헌종의 어머니는 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안동김씨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7년이나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 정치는 계속되었다. 그 후 헌종이 친정을 하자 외할아버지인 조만영이 세도 정치를 하지만 5년 뒤 1846년에 사망함으로써 풍양조씨의 세도 정치는 짧은 기간으로 끝이 났다. 한편 조대비의 아들 헌종이 후사가 없이 1849년에 죽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김조순의 딸이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어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을 제25대 왕인 철종으로 즉위하도록 명하였다.
철종은 18살(1849)에 갑자기 즉위한 탓에 대왕대비가 3년 동안 수렴청정했고, 1852년부터 친정을 했다. 그러나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임으로써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 일족이 좌지우지했다. 삼정 문란은 더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1862년 진주민란을 시발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이 크게 성장하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라는 죄목으로 동학의 창시자 최재우를 처형했다. 그러나 철종은 재위 14년 만에 32세를 일기로 1863년에 사망했다.
한편 조선 말, 청·러·일 등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돌하는 역사적 시련기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재황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의 26대 고종이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해 시정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목숨을 부지했던 이하응은 조성하를 통해 궁중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와 은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의 묵계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1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평소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 자신의 야망을 가리고 은인자중하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이 최고 권력자인 대원군이 되어 10년 동안 섭정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3년 뒤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폐해를 절감해 온 터라 일부러 형세가 고단한 집안의 딸을 골라 며느리로 삼았지만, 민비는 대원군 못지않은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이후 대원군의 10년 통치가 지난 뒤 시아버지(대원군)와 며느리(민비)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민비는 친정 오빠인 민승호를 비롯해 민겸호, 민태호, 민규호, 민치구, 민치상 등 민씨 일족과 몰락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 가문과 최익현 등 노론 세력을 규합하여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이후 민비를 정점으로 22년간 여흥민씨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을미사변(1895)으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민씨 천하 속에서도 민영환처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이끌고 궁내에 들어가 조약 파기를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한 충신도 있었으나, 대부분 민씨 일족들은 시류에 영합하여 부와 권력을 탐하였다. 민영익은 1883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지만, 그는 개화파를 탄압했으며,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로 끝나고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등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1884년 정부의 친러반청 정책을 반대하여 이 사실을 원세개에 밀고했다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가 곤란해지자 홍콩으로 망명하는 등 세 차례나 망명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특히 임오군란 때 선혜청 당상관이자 병조판서이었던 민겸호는 민씨 일족이 저지른 수치의 대명사였다. 그는 1882년 6월 9일 무위(武威)·장어(壯禦) 양영 소속의 군졸들에게 밀린 13개월의 급료 중 겨우 1개월분을 지급하면서 그나마도 모래를 섞어주자, 이에 분개한 구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 등이 항의하는 도봉소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는 김춘영 등을 죽이려 하자, 군란이 일어났다. 이때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파괴하고, 강화부 유수 민태호 등 척신의 집을 습격하였다. 다음날 궁중에 난입한 군졸들에 의해 민겸호는 살해되었다. 반란군들은 민씨 세도 정치의 중심에 있는 민비를 제거하려고 찾았으나, 그녀는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대원군에게 정권을 주어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나, 민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여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함으로써 대원군 정권은 불과 한 달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군란이 수습된 이후에도 민씨들은 구태의연한 세도 정치를 계속하였으며, 모든 개혁은 중단되었다. 이처럼 민씨 일족 대다수는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근대화를 통해 개혁과 개방, 부국강병을 외면한 결과 사직의 붕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
5. 매국 세력의 등장
당시 조선의 왕족과 최고위층 관료는 잦은 민란과 외세의 침탈로 더 이상 조선왕조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조선왕조가 역성혁명에 의해 무너지면 과거 고려 왕족인 왕 씨와 신료들이 지위와 재산뿐만 아니라 일족의 생명까지도 위협받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본에 나라를 넘긴다면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 씨 왕족과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을사늑약부터 한일합병조약에 이르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조선의 지도층 가운데 극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자신의 안녕을 확보할 수 있다면 나라까지도 팔아넘길 만큼 썩은 매국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였다.
최근 발간된 친일 인명사전을 분석하면 매국 세력의 규모를 알 수 있다. 한일합병 직후에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사람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과 순종은 황제에서 망국의 군주로 격하되었지만, 일제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을 받고 궁궐에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된 점을 감안하면, 매국 세력의 첫 페이지에 가장 먼저 기록될 사람이다.
한편 고종과 순종을 열외로 하고, 일본은 한일합병에 공을 세운 왕공족인 고종의 아들 이강(의친왕)과 고종의 형인 이재면(흥친왕)에게 각 83만 원(현시가 415억 원), 후작 6명 가운데 윤택영(순종의 장인)에게 50만 4천 원, 이재완(흥선대원군의 조카)에게 33만 6천 원, 박영효(철종의 사위)에게 28만 원, 이재각(사도세자의 현손), 이해승(왕족), 이해창(왕족) 3명에게 각 16만 8천 원, 백작 3명 가운데 이완용에게 15만 원, 민영린(순명효황후의 남동생)에게 12만 원, 이지용(을사오적의 하나)에게 10만 원, 자작 22명을 선별하여 사람에 따라 3, 5, 10만 원 등 차등 지급하였으며, 전직 대신과 민씨 척족 가운데 남작 45명에게 일괄적으로 2만 5천 원을 주었지만,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에게 16만 8천 원이라는 거금을 주었다. 이들 가운데 이완용은 후에 후작으로 승작되었고,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의 12명 가운데 이완용은 겹치고, 송병준, 이지용 등은 백작으로 승작되었기에 일부 작위 숫자에 변동은 있었다. 일본은 이들 매국 세력에게 지급한 은사금은 총 600만 원으로 작위 내에서도 차등 지급하였다. 다만 이 은사금은 현금으로 지급한 것이 아니라 공채 지급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들 귀족에게 공채 금액의 일부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년 이자의 명목으로 지급했다.
일본으로부터 훈작과 은사금을 받은 왕족과 조선 고위 관료들 대부분은 일제 36년의 통치 동안 자신들이 희망한 대로 생명과 재산과 작위까지 유지하며 살았다. 일본은 조선 귀족을 후원하기 위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와 삼림 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와 불하를 받을 수 있는 여러 특권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78명의 매국 세력 가운데 일부는 패가망신한 예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지용은 도박이나 아편에 빠졌으며, 윤택영은 막대한 빚으로 몰락하거나, 이재극은 재산 관리를 못 하고 사기나 소송 등으로 알거지가 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 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고자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에 따라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까지 전개하였다. 이 와중에 이완용은 향락과 사치를 일삼던 다른 조선 귀족들과 달리 부동산 투기 등으로 성실히 부를 쌓아 합방 때보다 더 큰 부자가 됐다.
이처럼 조선의 멸망에는 총 한번 쏘지 않고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바친 왕실과 최고위 관료들로 구성된 매국 세력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나라의 안위와 미래보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나라까지 팔아먹은 대역죄를 범한 무리이다.
한편 이들 왕족과 대신을 중심으로 한 매국 세력 외에도 망국의 책임을 함께 져야 할 대상이지만 이 비판을 피해 간 집단이 있다. 그들은 조선의 양반과 지방관리이다. 당시 구한말 조선을 둘러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은 양반 계급을 “허가받은 흡혈귀”(licensed vampires)라고 표현했다. 양계초 또한 조선의 양반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했다. 이들 양반은 오늘 벼슬을 하여 권력이 생기면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나만 부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조선 관리들은 백성으로부터 거둔 세금의 3분의 1만 국고에 넣고 나머지는 착복하는 등 백성에게 세금과 병역과 부역을 법으로 정한 규정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하여 백성을 착취하였다.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탐관오리의 대표적 예이다. 이와 같은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못해 백성들은 국경선을 벗어나고자 야반도주하였고, 남은 백성들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서 오는 무력증에 빠져 있음을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이 처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지배계층인 양반과 관료들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실종된 무리였다. 이들은 유사(quasi) 매국 세력 또는 야합세력이 아닌지 앞으로 실증 사관에 따라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6. 수탈 체제에서 오는 백성의 자포자기형 무력증
대원군이 1863년 집권한 이후 적극적으로 개혁 정책을 펴면서 정치와 사회가 안정을 찾았지만,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여흥민씨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불안한 기운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라는 정치적 격변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민란은 1875년 울산에서 발생한 민란을 제외하고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지만, 이후에 계속된 자연재해의 여파로 농민들의 생계가 곤란해지자, 민란이 1880년대 말에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특히 1892년 이후부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빈도가 잦아졌다. 1893년 경우 최소 65건 이상의 민란이 발생하였고, 발생 지역도 황해도에서 삼남 지방으로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894년 동학 농민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이 모든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수령과 아전 및 토호들의 부세 수탈이 문제였다. 더욱이 고종 때 관혼상제에 따르는 궁중의 막대한 재정 지출, 근대 문물의 수용, 배상금 지급 등으로 인해 국가재정이 궁핍해지자 정부 차원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과 청나라의 경제적인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탈의 정도를 살펴보면, 경작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은 1결에 4두였으나 고종 때 그 2배인 8두나 되었고, 개간할 수 없는 황무지나, 운송비와 창고보관비에도 전세를 거두었고, 군정은 16살에서 60살 아래로 군포를 거두게끔 되어있으나, 어린아이와 노인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고,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한 가구가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하면 나머지 4가구에 군포를 물리거나, 다섯 가구가 모두 도망가면 이들의 친척으로부터 군포를 거두었다. 환곡의 경우 원래 가난한 사람을 구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이자가 없었지만, 그 뒤 이들에게 10%의 이자를 붙이더니 후에는 무려 50%의 이자를 거두었다. 심지어 환곡을 원하지 않는 가난한 자에게 고문해서라도 이 환곡을 가져가게 하며, 이 환곡에는 쌀겨나 모래를 섞어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이처럼 국가와 지주의 수탈이 가중되고 삼정 문란에 따른 농민층의 부담이 증가하면서, 이에 저항하려는 조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봉기하였다.
동학농민군의 무장 활동: 1894년 무려 1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척왜양창의를 부르짖으면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양반과 관료들의 탐학에 반항하고, 외세의 침탈에 저항하기 위해서 대규모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들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할 즈음 청일 양국의 군인들은 자국의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자, 조정은 서둘러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여 휴전을 성사시켰다. 그런데도 대규모로 파견된 청일 양국의 군대는 거류민 보호라는 표면적 이유보다 조선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일 양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발전하자 동학농민군은 다시 거병하였다. 이 무렵 고종은 철수하려던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재래식 무기조차 변변히 갖추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근대적인 무기와 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하면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고, 동학농민군은 해산되었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1895)에서 일본이 승리 함으로써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고, 일본의 조선 침탈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독립협회의 계몽운동: 1896년 일찍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배운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신지식인들이 독립협회 만들었으며, 1898년 전국에 4,0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권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상징으로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며, 민중을 계몽시키고자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토론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통해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독립과 중립적인 외교를 강조하며, 개인의 생명과 재산, 언론과 집회에 대한 자유, 만민평등, 국민주권, 국민 참정권 등 민권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과 상공업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근대적인 국방력을 키워, 우리 땅을 우리가 지키겠다는 자주·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백성들의 정치적 의식이 급성장하면서 사회 변화의 욕구가 더 높아지자, 고종과 조정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대통령 중심의 공화정치를 획책한다는 구실을 들어 해산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참여와 의식을 고양하려던 이들의 활동은 끝나고 말았다.
을사늑약에 대한 국민의 저항: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등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것과 다름없는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종의 허락 없이 체결되자, 언론은 일본의 엄격한 검열과 통제에서도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호로 국민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조정의 신하와 유생들은 국제법을 거론하며 5적을 탄핵하는 한편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상소로 맞섰다. 시종무관 민영환, 갑신정변으로 처형된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 대신 조병세, 주영 서리 공사 이한응, 학부지사 이상철, 평양 진위대 상등병 김봉학, 경영관 송병선이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전 참판 민종식은 홍성에서, 최익현은 정읍에서, 임병찬은 순창에서, 신돌석은 경상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력으로 반항하였다. 일부는 암살단을 결성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일에 나섰다.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여 그를 난자하고, 나철의 암살단은 권중현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을사오적의 대표 격인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에게 칼에 맞았으나 살아남았다. 민중도 시위와 철시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였다.
이처럼 조야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와 일본을 의식해서 을사오적의 처벌 문제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당시 비서감경 이우면, 특진관 이근명, 법부 주사 안병찬 등은 상소문에서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청하였지만, 고종은 “그대의 말이 공분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 충정을 이해한다.”라고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황성신문 장지연은 그 후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친일 성향의 글을 게재하였다. 변절자로 낙인찍힌 장지연은 국가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도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처벌만 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민중의 저항 또한 일본 헌병들의 치밀한 진압 활동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결국 조선은 을사늑약에 의해 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정미7조약에 따른 조선군 해산과 의병 활동: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헤이그 국제 회의장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과 열강의 무관심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이것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즉위토록 한 후 정미7조약(1907.7.24.)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의 고위 관리들의 임면에 통감의 동의를 얻도록 하며, 통감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하였고, 한국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군대를 해산하자 이들은 저항하였다. 서울의 해산된 시위대 일부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부분적으로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도 있었다. 특히 원주의 민긍호, 강화의 유명류, 적성과 임진강 일대의 허위, 강원도의 이인영, 경북·강원의 이강년, 경상도의 신돌석 의병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 해산 당시 무장한 의병 수가 1907년의 4만 4천 명이 1908년의 7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1909년 2만 6천 명, 1910년 2천 명 이하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긍호, 허위, 이강년 등 의병장과 의병 1만 7천 명의 희생이 따랐다. 의병들은 더는 국내에서 일군의 압도적인 무력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항일의 무대를 만주와 연해주로 옮겼다.
군대해산의 조칙을 내린 순종은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되자, 친히 통감부를 찾아가 군대해산의 주범인 이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례비로 3만 원(현 15억 원), 유족 위로금으로 10만 원(현시가 50억 원)을 지급하였다. 여기에서 순종은 자신의 생명과 안녕을 위해 일본에 눈치를 보는 용렬하기 그지없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앞서 동학농민군의 무장 활동, 독립협회의 계몽운동, 을사늑약에 대한 국민의 저항, 정미7조약에 따른 조선군 해산과 의병 활동을 일별하였다. 당시 동학농민군이 척왜양창의를 부르짖으면서 무장투쟁에 나서고, 신지식인과 의식 있는 백성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조선을 준 식민지로 만든 매국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원으로 활약하고, 일본제국주의 조선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통치 이념에 매몰되어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수구파와 야합하여 전제왕권을 고집하는 고종과 여흥민씨의 반동 정치, 조정 대신들의 부정부패와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 매국 세력의 발호,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월등한 외교력과 무력 앞에 이 모든 노력이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을사늑약으로 이미 나라가 망했다는 충격이 커서인지 오히려 경술국치 때 민중의 반응은 을사늑약 때보다 떨어졌다. 더욱이 일본의 침탈이 단순한 경제적 침탈이 아니라 반만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한 침탈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장지연의 고백처럼 조선의 일반 백성들도 이미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일부 백성들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살기 위해서 서간도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남은 자들은 외세이든, 역성혁명이든, 무엇이든 간에 조선왕조의 붕괴를 바라면서 ‘될 대로 돼라.’라는 자포자기형 무기력증이 편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민중의 무력증을 자극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만한 정치세력조차 없었으며, 민중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을 호소할 당위성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자포자기형 무기력증에 관해서 1895년 조선을 여행한 러시아인 루벤초프가 조선인의 게으름에 대한 글이 시사하는 바 크다. 그에 의하면 많은 이는 조선인이 게으르다고 비난하지만, 조선왕조 말 만주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만난 조선인은 게으르지 않았다. 조선 바깥에는 조선의 관리와 같은 수탈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정도로 조선의 정치체제는 민중 수탈 시스템이었다. 부지런하여 필요 이상의 물건을 생산하는 경우 탐욕스러운 관리들에 의한 약탈의 먹잇감이 될 뿐이기에 조선인들에게 게으름은 유일한 보신책이었다. 이처럼 조선 민중들은 총체적 민중 수탈 체제에 맞서 게으름으로 저항했다. 심지어 이들 민중이 보기에는 조선왕조의 약탈 수준은 일본의 경제적 침탈보다 더 나쁜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조선 민중에 의한 전국적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지난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생사를 좌우하는 전쟁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백성들이 의병으로 나섰지만, 을사늑약에서 한일합병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난날 수탈 체제로 자포자기 또는 무력증세에 시달려 온 대한제국의 백성 가운데 일부는 일본이 내세운 통감부를 대안 체제로 보려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통치 10년이 채 못 되어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이 조선인을 자신들의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서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1919년 3월 1일의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7. 외세의 조선 침탈과 일본의 근대화
양계초는 조선이 국제질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강대국에 사대와 의존하려는 사고에 젖어 있는 조선 지도층 인사들의 잘못된 외교 행태를 비판하기를 “중국 편에 섰던 사람이 몇 년 안에 다시 일본 편이 되고, 다시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러시아 편이 되고, 또 변하여 일본 편이 되어 보살펴 주거나 보호해 줄 수 있는 나라를 따른다.”라고 하였다. 조선 왕조사 가운데 유일하게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독립적 외교 노선을 추구했던 임금은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그가 추구했던 자주와 자강 외교는 실종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자주·자립·자강하려는 외교적 노력보다 명과 청에 대한 사대 외교와 청일전쟁 이후에도 강대국인 러시아와 일본에 의존하는 대외정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청: 청은 1840년 1차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종이호랑이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조선의 수구 지배 세력은 계속하여 청에 의존하여 나라를 유지하려는 실수를 저질렀다. 명나라(1368-1644)가 청나라(1616-1912)로 교체되는 시기에 광해군의 균형 외교는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그가 쫓겨나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자, 이들은 명에 대한 사대 외교정책을 고수하였다. 이에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의 동맹으로 후방에서 오는 위협을 제거하고자 조선을 침공하였으며, 이것이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그 결과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후방의 걱정을 들 수 있었으며, 동시에 명의 후금에 대한 금수 조치에서 오는 경제적 문제점을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도 서인 정권은 여전히 후금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았다.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원을 지배하기 위한 마지막 승부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명에 대한 조선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던 인조는 패배하고 삼전도로 나가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은 1643년에 사망하고, 5살 된 순치제가 즉위하면서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하였다. 청은 도르곤의 지휘에 따라 이자성의 난으로 이미 몰락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공격하여 1644년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이후 청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3명의 걸출한 성군이 나타나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120여 년에 가까운 전성기를 누렸다. 청은 티베트, 신장, 내·외몽골 등 중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으며, 당시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으로 군림하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중국의 상황이 이렇게 바뀌고 있음에도 숙종 때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은 만동묘를 지어 멸망한 명의 황제 위패를 모시는 등 소중화 사상에 사로잡혀 시대착오적인 외교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청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정복 민족인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갈등으로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운동 등 각종 내우(內憂)를 겪고,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독일 등 서구제국주의 세력들의 서세동점이 가속화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1840년의 제1차 아편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이후로 노골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청도 동치중흥이라는 양무운동이나 변법자강운동을 통한 근대화 노력을 하였으나, 유교적 문화와 관료제를 그대로 두고 서양에서 새로운 군사, 과학과 기술을 배워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막으려는 반쪽짜리 개혁이었으므로 망해가는 청을 살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개혁이 시작될 무렵 등장한 서태후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부정부패로 개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청의 멸망에 기여한 망국의 여인이 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민비는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무장투쟁 때 망해가는 청에 사대·의존하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에 의존함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재촉한 여인이 되었다. 특히 임오군란 때 오장경을 따라온 원세개는 민비의 요청으로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고, 그 후에도 조선의 총독인 양 횡포를 부렸으며, 서구의 선진과학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사찰단을 파견하고 교육제도를 혁신하려는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청의 종주권 행사에 걸림돌로 간주하여 이를 봉쇄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은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대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유리한 위치를 마련하게 된다.
러시아: 1840년의 1차 아편전쟁에 이어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 아래 프랑스와 영국은 연합하여 아편 무역을 완전히 합법화하고 중국 내륙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1856년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예상한 대로 청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1858년 6월 톈진에서 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을 다시 공격하여 황제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을 파괴하였다. 결국, 1860년 10월 러시아의 중재로 성사된 베이징 협약으로 2차 아편전쟁은 끝났다. 청은 영국, 프랑스, 미국이 요구한 조건을 전부 들어줘야 했다. 러시아는 이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양도받아 이곳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경하게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는 태평양에 진출할 수 있는 부동항을 조선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후 러시아는 조선에 이미 진출하고 있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하고, 자기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노렸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촉발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과 요동 반도의 할양을 얻어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 반도 할양에 반발하여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이 할양을 무위로 돌리고자 힘을 앞세운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일본은 힘겹게 얻은 요동 반도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주와 요동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처럼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접한 고종과 민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정계에서 친러파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당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을 앞세운 갑오개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추진하였지만,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로 기울자, 이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895년 5월 민비는 조선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을 총리직에서 내쫓고, 친일 대신인 박영효를 숙청하는 한편 친러파인 이완용 등을 중용하여 내각을 친러시아 쪽으로 기울도록 하였다. 이에 박영효는 1895년 7월, 왕후 시해를 모의하지만, 유길준의 고발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왕후 시해 미수에 관련된 친일 관료들이 상당수 수배되거나 축출되면서 일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한편 일본으로 도망간 박영효는 조선과 러시아 간 비밀 협약을 일본 정부에 알렸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해임하고,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일본 공사로 임명하여 1895년 10월 8일 새벽 신임 일본 공사의 지휘 아래 일본 공사관 수비대, 일본 낭인, 조선군 훈련대가 민비의 침소인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하여, 민비를 시해하였다. 을미사변이다. 이처럼 한 나라의 왕후가 시해당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아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다.
이 아관파천 이후 일본은 향후 조선에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과정에 러시아가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러일전쟁 발발 직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아울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전략과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이 상호보완 관계임을 내세워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1905년 8월 9일~29일 포츠머스 강화 회담이 열렸으며, 이 회담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적인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회담 후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 19세기 후반 제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수많은 나라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이런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은 식민지가 되지 않고 근대화에 성공하여 서구제국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1910년 이웃 나라인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로 삼았다. 여기에서 일본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급속히 부국강병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일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1760~1820년 영국에서 시작된 과학과 기술의 혁명은 사회와 경제 전반에 걸쳐 혁명을 가져왔다. 우리는 이를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이 산업혁명이 서구 특히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으로 확산하면서 국제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으로 발흥한 신흥 자본주의 세력은 이들의 자본을 유지,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외로부터 지속적인 원료와 노동력과 상품 판매지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 서구제국주의 세력은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총과 대포를 앞세워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를 식민지화하고자 광분하였다. 동북아도 이 제국주의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을 피해 갈 수 없었으며, 1840년에 일어난 제1차 아편전쟁은 이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런 국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성리학에 사로잡혀 유학의 실용적인 학파인 양명학을 사문난적으로 배척하였다. 일본에도 도쿠가와막부 시대에 양명학이 전해졌으나, 막부에서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 중기까지 양명학은 비주류 학문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에도 시대 말엽인 19세기 초 오시오 헤이하치로(1793~1837)와 요시다 쇼인(1830~1859)이 양명학 연구를 통해 근대화에 필요한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정봉환 후 메이지 시대가 열리면서 양명학의 이념적 기반인 사민을 계급으로 구분하는 대신 그 역할을 강조하는 이업동도(異業同道), 계급, 출생과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양지(良知)를 함양하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심즉리(心卽理), 말과 실천을 구별하지 않고 같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실제로 일하면서 정신을 단련하는 ‘사상마련(事上磨鍊)’의 사상을 수용하였으므로 일본은 쉽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 후 양명학은 일본 장인정신의 철학적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나아가서 일본의 도쿠가와막부는 지정학적으로 바다로 둘러싸이고 조선을 건너야만 중국을 접할 수 있는 해양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중국에 사대와 의존하지 않는 외교 전략을 일찍이 추구하였다. 아울러 당시 강대국이었던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조만간 서구제국주의가 군함을 앞세워 일본에 개항과 통상을 요구해 올 것으로 예단하고 있었다. 1853년 예상한 대로 미국 해군 제독 매튜 페리가 군함을 끌고 통상을 요구하고자 도쿄 앞바다에 나타났다. 특히 당시는 고래잡이가 성행했다. 고래기름은 기계의 윤활유로, 밤에는 공장을 돌리는 데 필요한 등유로 사용되었다. 고래잡이배는 한번 떠나면 보통 2년 동안 작업을 했다. 따라서 선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석탄과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이 무렵 미국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캘리포니아를 획득하였으며, 이를 통해 태평양 진출이 가능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이 통상과 함께 기착지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흑선이 증기를 내뿜으며 에도(도쿄) 근해에 나타나 대포를 쏘자, 일본 백성들은 혼비백산했고 막부 관리들도 크게 당황했다. 도쿠가와막부(1603~1867)는 기존방식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미국과 불평등 조약(1858)을 맺고 나라의 빗장을 열었다.
이후 막부는 제1·2차 아편전쟁과 1862년 중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란인 태평 전국의 난(1850-1864) 이후 청나라 정세를 살필 목적으로 다카스키 신사쿠를 포함한 51명의 ‘지토세마루 파견단’을 상하이로 보냈다. 문호를 개방한 이래 막부가 직접 해외에 사람을 파견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많은 번들 가운데 웅번이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일찍이 서구제국주의 세력과 해전을 벌려 패배를 경험하였다. 1863.7.2.~7.4. 영국과 사쓰마번이 충돌했고(사쓰에이 전쟁), 1863.7.20.~8.14.과 1864.9.5.~9.6. 2회에 걸쳐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과 조슈번이 충돌(시모노세키 전쟁)하여 서구의 압도적 무력을 실감했기에, 이들 웅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처음에는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이후 현실을 깨닫고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한 체제변혁과 서양의 문물과 제도, 선진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근대화만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서구제국주의의 침탈을 저지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개국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일본 서남쪽에 위치한 조슈번은 우수한 5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당시 유일 초강대국인 영국에 유학을 보냈으며, 이들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약 5개월 동안(1863.11~1864.4) University College London(UCL)에 머물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해군 시설과 공장 등을 견학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이들 또한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서 존왕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변신하게 된다.
1867년 11월에 일어난 대정봉환 이후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을 흡수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고히 해야 한다“라는 메이지유신의 기치를 울렸다. 이 과정에 원수지간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재하여 사쓰마-조슈 동맹(삿초 동맹)을 맺고,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무혈혁명으로 성사시키며, 메이지유신 후 신정부의 강령이 된 선상팔책을 만든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있었다. 그는 신정부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32살에 암살당했지만, 그와 뜻을 같이한 유신삼걸,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근본적인 체제변혁에 나섰다. 이들은 막부 시대 무려 300개 번들로 나누어져 상호 분열하고 갈등하는 봉건제로는 일본을 침탈하려는 서구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으므로 천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 근대화 작업에 막부의 쇼군을 비롯한 가신과 개화 세력이 함께 힘을 모음으로써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급속한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은 서구제국주의 노선을 따라 이웃인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대상으로 삼고, 전쟁을 통한 무력 강점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점진적으로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치, 외교와 안보, 경제적 작업을 추진하였다. 먼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 마지막 장애물인 러시아를 전쟁으로 제거하고자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러 간의 기존 조약을 모두 폐기토록 하는 한편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를 일본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경부선·경의선 철도를 착공하며, 통신망을 강점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하였다. 같은 해 8월 러일전쟁 중에 체결된 한일협정서를 통해 일본은 한국에 대해 재정, 외교 외에도 군사, 경찰, 궁내, 학정에 일본이 추천한 일본인 또는 외국인 고문을 두어 조선에 대한 고문정치를 시행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의 중개로 체결된 러일 간의 포츠머스(Portsmouth) 강화조약(1905.5)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에 대한 특수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였다.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 전 단계인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1905년 11월, 일본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이용구와 송병준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 조약을 반대하는 참정(수상) 한규설을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고, 밖에서 찾아온 외부대신 직인을 찍었다. 분명히 불법 조약이지만, 이를 통해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통감부를 둠으로써 조선은 독립국의 지위를 사실상 상실하였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이 파견한 통감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폄으로써 대한제국의 수탈 체제보다 통감부가 우월한 대안 체제임을 입증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갑오개혁 때 시행되었던 근대적 개혁 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됐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이를 복원하여 더 강력하게 시행하면서 대한제국의 백성에게 일말의 기대까지 걸게 만들었다. 특히 조선은 갑오개혁 때 근대적 재판제도를 도입하였지만, 실제로 조선의 재판제도는 민중의 수탈 도구였다. 이런 조선의 사법제도 약점을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조선에 부임하자, 먼저 조선의 재판제도를 개혁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고, 궁극적으로 조선을 합병하는 데 이를 이용하였다.
한편 1907년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특사로 임명하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으나, 이미 외교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이 회의에 참석도 못 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일본은 이 헤이그밀사사건에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토록 하여 한일신협약 즉 정미칠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통감은 한국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가지게 되었으며, 고문 제도를 없애고 각 부처에 차관을 임명하는 소위 차관정치를 실시하였다. 아울러 당시 8,800명의 조선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반발한 중앙의 시위대는 시가전을 벌였지만, 실탄이 떨어지자,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으로 무력 항쟁을 계속하게 된다.
마침내 일본은 한국의 경찰권까지 이양받고, 언론기관을 정간시키며, 애국단체를 해산시키고, 애국지사들을 무단 검거한 가운데 매국 세력인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을 앞세워 이미 오래전에 예정되었던 한일합병조약을 1910년 8월 22일 조인하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순종이 나라를 일본에 양도하는 조서를 내림으로써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본 대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과정에 적대세력이었던 청과 러시아에 대해 전쟁이라는 무력 수단으로 이들을 제거하였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서는 서로의 이익을 주고받는 노련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국내 왕실과 조정 대신과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 막대한 회유금을 뿌렸다. 이는 합병 직후에 조선의 왕실과 최고위층 관료뿐만 아니라 지방관리와 지방 유지(有志)를 회유하기 위한 작위와 은사금을 마련한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Ⅲ. 결론
양계초가 한일합병 직후에 쓴 ‘조선 멸망의 원인’에서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다. 그렇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스스로 망한 것이다. 조선이 스스로 망하는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비록 일본이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조선을 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지적에서 조선 멸망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요약하면, 무엇보다 변질된 형이상학적인 통치 이념인 성리학이 조선 멸망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지도층은 중국에서 수입한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비판하고 발전시키기보다 교조적으로 수용하여, 중국의 역사, 문학, 철학에 관련된 서적을 열심히 읽어 수기치인 하기보다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명예와 지위,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며, 끼리끼리 모여 붕당이나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고, 그 과정에 장애가 되는 상대를 피비린내 나는 사화와 환국의 정치를 통해 제거하는 데 몰두하였다.
조선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고종은 19세기 서구제국주의 세력이 오대양 육대주를 상대로 식민지 쟁탈에 나서는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근대화만이 살길이었지만, 이를 추진할 만한 리더십도 갖추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국난 속에서도 서로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투쟁을 수습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였다. 대원군을 축출한 민비와 그의 일족들은 세도 정치를 부활시켜 자기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매관매직하고 부정부패에 골몰하였으며, 이로 인해 민란이 일어나도 남의 손에 의존하는 나라가 되었다. 심지어 왕족과 대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의 생명과 지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까지도 팔려는 매국 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백성들은 토호와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헐벗고 굶주려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어 자포자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군신(君臣)이 하나 되어 일본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주와 자강에 의한 부국강병의 길을 갔다면 결코, 조선은 무너지질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 이웃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지만, 조선의 조야가 나라가 망하는 길을 가지 않고 강한 나라 만드는 데 하나가 되었더라면 일본도 조선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지도층은 수구세력과 개화 세력으로 나누어져 정쟁에 매달렸다.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수구세력은 절대왕정 체제하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편전쟁 이후 준 식민지 상태로 망해가는 청나라에 사대·의존하는 잘못된 외교 노선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임오군란 때 오장경을 따라온 원세개가 총독인 양 조선의 근대화를 자신들이 종주권을 행사하는 데 장애물로 여겨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물론 고종 때 일본과 같이 근대화를 추진하고 부국강병 하려는 개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을 침탈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의도를 잘못 읽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에서 남의 선의를 믿고 의존하여 개혁하려는 오류를 범했으며, 서구의 선진화된 제도와 문물,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여 이 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 데 중요한 통치 이념과 환경, 재정적 여건,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사회와 교육환경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혁명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근대화의 설계도를 그리는 데 실패하였다. 나아가서 개화 세력조차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치 아래 일치단결하여도 부족한 상황에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열되어 충돌했으며, 급진 개화 세력 사이에도 친러 개화파와 친일 개화파의 대립으로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정책을 제대로 시행도 못 해보고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도 조선과 같이 서구제국주의 앞에 바람의 등불인 양 위태로웠지만, 막부는 천왕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은 일치단결하여 서구의 과학과 기술,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경제 발전을 이루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을 침탈하는 데 장애가 되는 청과 러시아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를 얻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국가이든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외부에 투사하여 현 국제질서에서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변화시키려는 유혹을 받으며, 이는 타국에 대한 침탈과 전쟁으로 나타났다.
중국 혁명사상가인 진천화(陳天華)는 유서에서 “내가 강하고 잘났는데 누가 감히 나를 넘볼 것이며, 내가 약하고 못났는데 누가 덮치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이 멸망한 것은 멸망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멸망한 것이며, 조선이 망한 것은 나라를 지킬 힘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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