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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절장치
구조문제
목재를 연결하여 건물을 지으면 기둥과 벽이 닫힌 구조가 되어 마지막 모서리를 조립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목재를 차례로 꿰맞추다가 마지막 한 개는 헐렁하게 깎아서 억지로 끼워야 한다. 조립식 장난감이라도 최소 부품 한 개는 본드로 붙여야 한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닫힌계는 외부와의 연결에 어려움이 있다. 중심과 중심을 연결해야 하는데 중심이 내부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결정의 단위는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문제를 겪는다. 하느님도 해결하지 못하는 우주의 근본 모순이다.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다.
조절장치
사람의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긴 파이프다. 파이프를 통과하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은 인체 내부에 있지만 인체 외부의 존재다. 대장의 배설물은 인체 내부에 있지만 인간에 속하지 않는다.
조개의 속살을 파고든 이물질을 밀어내려고 벽을 쌓은 것이 진주다. 진주는 조개에 속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침입자인가?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 가는 진화는 조개가 진주를 품은 것과 같다. 내부에 들어온 침입자를 밀어내려다가 실패하고 공생하게 된 것이다. 존재는 구조문제의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과정에 만들어졌다.
구조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우주의 근본모순이다.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우회하는 방법은 있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고 안이면서 밖인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조절장치다. 대칭과 축으로 가능하다. 대칭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상호작용이다. 대칭을 벌리고 둘 사이의 코어를 움직여 조절할 수 있다.
구조모순
조절장치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닫힌계다. 닫힌계는 외부에서 동력을 조달하는 시스템이 있고 그 동력을 내부에서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메커니즘은 밸런스와 코어로 이루어진다. 밸런스는 둘의 대칭이며 코어는 대칭의 축이다. 코어를 움직여 대칭을 벌리고 닫는 방법으로 간격을 조절한다.
코어가 하나이므로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조절이 두 방향이면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모순이 일어난다. 조절이 한 방향으로 일어나므로 우리는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대응이다. 인생은 부단한 대응이 있을 뿐이다. 상호작용의 랠리를 이어간다.
눈에 보이는 대칭이 둘이므로 우리는 두 방향으로 사고하게 된다. 자연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우리는 두 방향으로 사유하므로 결 어긋남이다. 대칭을 보지 말고 코어를 봐야 한다.
메커니즘
조절장치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닫힌계다. 닫힌계는 외부에서 동력을 조달하는 시스템이 있고 그 동력을 내부에서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메커니즘은 밸런스와 코어로 이루어진다. 밸런스는 둘의 대칭이며 코어는 대칭의 축이다. 코어를 움직여 대칭을 벌리고 닫는 방법으로 간격을 조절한다.
코어가 하나이므로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조절이 두 방향이면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모순이 일어난다. 조절이 한 방향으로 일어나므로 우리는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대응이다. 인생은 부단한 대응이 있을 뿐이다. 상호작용의 랠리를 이어간다.
눈에 보이는 대칭이 둘이므로 우리는 두 방향으로 사고하게 된다. 자연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우리는 두 방향으로 사유하므로 결 어긋남이다. 대칭을 보지 말고 코어를 봐야 한다.
우선순위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며 상호작용은 조절된다. 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내부 밸런스를 조절하여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하는 방법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동력을 전달하는 상부구조와 연결되는 경로를 조절한다.
전기는 스위치로 외부의 입력을 조절하고 전구를 교체하여 내부의 출력을 조절한다. 자전거는 핸들로 방향을 조절하고 페달로 지구와의 관계를 조절한다. 인간은 내부의 심리적 균형을 조절할 수 있고 외부의 집단과 관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이때 우선순위 문제가 제기된다. 무엇을 먼저 조절할 것인가? 에너지의 방향성 문제다. 외부를 먼저 조절하고 내부를 다음 조절해야 한다. 전체를 먼저 조절하고 나중 부분을 조절해야 한다. 순서가 틀렸을 때 출구가 입구를 막는 게 구조문제다.
큰 것을 먼저 하고 작은 것을 나중 한다. 공간을 먼저 결정하고 시간을 나중 결정한다. 겨냥을 먼저 하고 발사는 나중 한다. 겨냥은 공간이고 발사는 시간이다. 공간은 크고 시간은 작다. 이 순서가 틀리면 망한다. 발사한 다음 겨냥할 수는 없다.
기능검사
존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능이다. 기능이 있으면 존재가 있고 존재하는 것은 기능이 있다. 기능이 없으면 가짜다. 가만있는 것도 외력의 작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기능을 작동시켜서 참과 거짓을 밝혀낼 수 있다.
두 방향으로 가면 거짓이다. 출구가 입구를 막기 때문이다. 무한으로 발산되어도 거짓이다. 조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수렴되어야 경로를 다치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밸런스의 코어를 찾아 한 방향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양방향 오류 - 출구가 입구를 막는다.
발산의 오류 - 무한대로 발산하면 조절 실패다.
순환의 오류 - 결과가 원인이 되는 돌려막기 말장난이다.
조절장치가 기능하는가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가 진행하는 일방향의 경로가 있어야 하고 출구가 입구를 틀어막는 오류가 없어야 한다. 발산되거나 순환되면 조절 실패로 사건이 다음 단계로 연결되지 않고 죽는다.
귀신이든 초능력이든 내세든 천국이든 모든 거짓은 내부가 없고 기능이 없고 조절장치가 없다. 에너지 전달경로가 없다. 사상의설 다음에 8상의설 16상의설, 32상의설 하며 발산하면 조절 실패다. 조절은 밸런스의 균형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정치판에서 알 수 있다. 좌파와 우파의 극단적인 주장은 조절장치가 없으므로 거짓말이다. 좌파의 지적 생산력과 우파의 산업 생산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좌파와 우파의 이항대립을 극복하고 생산력 일원론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말도 잘못이다. 에너지 전달경로를 판단해야 한다. 닭은 달걀을 낳지만, 달걀은 닭을 낳지 않는다. 달걀이 닭으로 자라는 성장사건과 닭이 달걀을 낳는 복제사건은 별개의 것이다. 에너지로 보면 닭이 먼저다.
원자론적 사고의 폐해다. 원자는 쪼갤 수 없으므로 내부의 기능을 검사하지 않는다. 흔히 고유한 속성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얼버무리는 말이다. 기능을 검사하여 에너지가 입력에서 출력까지 가는 경로를 다치지 않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코어문제
자연의 존재는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단위다. 소립자든 원자든 분자든 의사결정 하는 단위가 있다. 강체의 덩어리 형태나 유체의 무더기 형태로 닫힌계를 이룬다. 모든 의사결정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난다. 강체도 내부 에너지 파동은 유체의 형태이므로 본질은 같다.
닫혀 있는 모든 구조는 외부와의 연결에 어려움을 겪는다. 닫혀 있다는 것은 입구와 출구가 만난다는 말이다. 이는 모순이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들어오고 내부 의사결정을 거쳐 다시 외부로 빠져나간다. 입구와 출구는 분리되어야 한다. 우주의 여러 모습은 그 모순의 해결 방법으로 탄생했다.
닫힌계와 열린계가 있다. 열린계는 에너지를 전달할 뿐 의사결정을 하지 못한다. 모든 의사결정은 닫힌계에서 일어난다. 야구공과 배트가 충돌해도 짧은 순간 닫힌계가 만들어진다. 계가 닫히지 않으면 공의 진행방향이 바뀌지 않는다. 열린계는 닫힌계의 부속품일 뿐 본질에서는 모두 닫힌계다.
단위에 속하는 자원들은 닫힌계 내부 코어를 바라본다. 코어는 대칭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에너지를 제공하는 외부와의 연결은 코어가 담당한다. 코어는 대칭 내부에 갇혀 있는데 연결하려면 외부에 드러나 있어야 하므로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여러 가지 꼼수를 개발한 것이 진화다.
의사결정을 하는 뇌는 인체 중심에 있고 그것을 전달하는 눈과 귀는 외부에 있다. 왕은 국가의 중심에 있으면서 동시에 최전방에 있어야 한다. 많은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현장을 살피다가 어이없게 죽어서 역사가 바뀐다. 모든 존재는 중심이 밖에 있어야 하면서 안에 있어야 하는 구조문제가 있다.
생물이 자신을 보호하려면 껍질이 필요한데 껍질이 생장을 가로막는 방해자가 된다. 조개가 껍질을 열면 갈매기에게 먹히고 껍질을 닫으면 먹이활동을 못 하게 된다. 신체를 지탱하려면 뼈가 필요한데 다슬기는 뼈를 바꾸지 못해서 꼭지가 부러지고, 게는 탈피할 때 물렁게가 되어 취약해진다.
중국 속담에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나무는 오래 묵은 줄기가 밑동이 되는데 장작은 반대다. 오래된 장작은 밑에 깔려서 썩고 마르지 않은 새 장작을 태운다. 선배가 앞에서 후배를 이끌어야 함과 동시에 새내기가 앞에서 기회를 얻고 선배는 뒤에서 받쳐줘야 하는 모순이 있다.
조직은 코어가 중요하다. 코어가 외부로 드러나야 무리가 따른다. 동시에 코어를 내부에 감추어 보호해야 한다. 부러져도 코어가 부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칭을 위주로 사유하지만, 대칭은 조개의 껍데기처럼 코어를 보호하는 장치다. 대칭은 코어를 감추거나 드러내는 조절장치에 불과하다.
권력문제
대칭은 드러나고 코어는 감추어진다. 우리는 내부의 조절장치를 보지 못하고 의사결정 하는 코어를 보지 못한다. 대신 외부에 드러난 대칭에 꽂힌다. 우리는 뭐든 대칭적으로 사유한다. 선과 악이라거나 진보와 보수라거나 하며 짝짓기 놀음 좋아한다.
대칭은 코어를 보호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대칭에 속지 말고 코어에 집중해야 한다. 인간이 선과 악을 나누고 진보와 보수로 가르며 대칭에 매몰되는 것이 사실은 집단과 연결하여 집단으로부터 에너지를 조달하려는 거다. 에너지의 공급이 본질이다.
여기서 주는 쪽과 받는 쪽의 포지션 문제가 생긴다. 능동과 수동의 주도권 문제다. 우리가 대칭 중심의 이항대립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흑백논리에 빠지는 이유는 받는 쪽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줄 일은 별로 없고 받을 일은 많기 때문이다.
주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권력은 집단의 조절장치다. 받는 쪽은 조절장치가 없다. 권력은 집단의 에너지를 개인에게 전달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권력을 얻어 에너지를 조달하려는 것이다. 집단의 핸들을 쥐어야 호르몬이 나오고 에너지가 생긴다.
주는 손은 한 손이고 받는 손은 두 손이다. 주는 코어는 하나이고 받는 대칭은 둘이다. 주자 일원론과 받자 이원론은 동전의 양면이다. 에너지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포지션 차이다. 조절장치는 주는 손에 있다. 우리는 주는 손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대칭은 둘이고 연결은 하나다. 대칭은 이원론이고 연결은 일원론이다. 우리는 대칭 이원론을 버리고 연결 일원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모든 대칭은 받을 수 있는 형태다. 무언가를 받으려면 대칭을 벌려서 주는 사람과 연결하는 통로를 열어놓아야 한다.
식물의 잎이 대칭인 이유는 햇볕을 받으려는 것이다. 손발이 대칭을 이루는 이유는 머리의 지시를 받으려는 것이다. 개의 목줄은 머리와 몸통이 대칭된 길목을 장악한다. 개는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칭은 지시받기 좋은 상태다.
능동문명
우주는 연결이다. 연결은 능동과 수동이 있다. 주는 자와 받는 자다. 능동은 1이고 수동은 2다. 능동은 일원론이고 수동은 이원론이다. 주는 것은 화살처럼 뾰족하고 받는 것은 폴더처럼 벌린다. 받는 사람은 두 손을 벌려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주는 사람은 '언제'를 결정하고 받는 사람은 '어디서'를 결정한다. 주는 사람은 시간을 결정하고 받는 사람은 공간을 결정한다.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공간의 결정이면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시간의 결정이다. 수순은 선 겨냥 후 발사다. 사건은 선 공간, 후 시간이다. 시간에서 공간으로 가면 역방향이다. 순방향으로 가야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모순을 피한다. 요리는 공간의 작업이고 식사는 시간의 작업이다. 먼저 식사하고 나중 요리하는 식이라면 거짓이다. 모든 거짓은 순서를 틀리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어디를 주목하는지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받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 과학에 인간의 입장을 개입시키면 안 되는데 말이다. 주는 사람은 한 방향으로 손을 내밀고 받는 사람은 두 방향으로 손을 벌린다. 우리는 세상을 주는 사람의 일원론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문명은 통째로 받는 사람의 이원론에 서 있다.
원자론은 조금 틀렸다. 의사결정의 단위는 있는데 조절장치 개념이 결여되었다. 원자를 쪼갤 수 없다면 내부가 없으므로 조절할 수 없다. 우주는 조절할 수 없는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조절이 가능한 상호작용의 집합이다. 우리가 원자론에 기초한 결정론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상호작용의 조절은 균형을 따르며 균형은 확률로 파악된다. 확률로 보는 양자역학이 맞다.
인과율도 조금 틀렸다. 조절장치가 없다. 원인과 결과 사이 의사결정구조를 봐야 한다. 진화론도 조금 틀렸다. 성 선택이 아니라 성적 조절장치다. 확률론도 조금 틀렸다. 받는 쪽의 우연이 아니라 주는 쪽의 균형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상식은 조금씩 틀려 있다. 공통으로 조절장치와 그에 따른 방향성 개념이 없다. 능동의 논리를 잃고 수동의 논리에 매몰되었다.
선택은 받는 사람 관점이고 균형은 주는 사람 입장이다. 다윈의 성 선택은 성적 조절장치로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 민감하다는 점이다. 짝짓기 프로그램의 초기 디폴트 값을 잘못 지정하면 양의 피드백에 의해 결과는 크게 변한다. 사슴의 너무 큰 뿔이나, 공작의 너무 큰 꽁지깃은 원래 짝짓기의 조절이 어렵기 때문이다. 짝짓기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먼저 암컷이 발정하고 다음 수컷이 구애의 춤으로 암컷을 흥분시키고 하며 상호작용의 주고받기가 서너 차례 반복되다 보면 결과의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암수가 서로를 자극하여 상대방의 호르몬을 끌어내고 상대의 신체를 짝짓기하기 좋은 컨디션으로 만들어주다 보면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점차 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판에서 잘 관찰된다. 정치인과 유권자가 상호작용을 거치며 몇 차례 주고받기 하다보면 극단주의로 치닫는다. 결국 전쟁까지 간다. 선순환 혹은 악순환의 가속 순환 메커니즘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우연히 종과 환경의 조합이 맞아서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는 단계적으로 조절된다. 먼저 큰 방향을 정하고 다음 조금씩 범위를 압축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걸러진다. 성 선택으로 설명되는 생태계의 여러 현상은 단계를 많이 거치기 때문에 나타나는 가속 현상이다. 추리기를 반복하며 한 방향으로 작동하므로 꽤 멀리까지 간다.
조절되는 이유는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집단과 연결된다. 나무는 햇볕과 연결된다. 여기에 구조모순이 있다. 인간의 성장은 집단을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 나무의 성장은 햇볕을 가리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 잎이 줄기 밑으로 와버리면 줄기가 햇볕을 가려서 망한다. 종의 진화도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모순을 피하여 한 방향으로 진행하며 가속하므로 때로는 의외로 짧은 시간에 대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진화는 받는 선택의 우연이 아니라 주는 균형의 필연이다.
출구가 입구를 막으면 죽는다. 정치인의 배신은 출구가 입구를 막는 짓이다. 정치판에 데뷔하는 입구는 진보의 명성이고 출구는 보수의 낙하산 성공이다. 인기는 진보에서 얻고 월급은 보수에서 받는 진중권처럼 동가식 서가숙 망한다.
모든 것은 연결이다. 연결은 능동이 아니면 수동이다. 수동은 철학이 필요 없다. 그냥 환경에 적응하면 된다. 모든 고민은 주는 자의 고민이며 능동 측의 고민이다. 받는 사람은 그냥 받아가면 되지만 주는 사람은 잘 조절해서 줘야 한다. 잘못 주면 욕 먹는다. 우리는 수동문명에서 능동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받는 사람의 신분에서 주는 사람의 신분으로 갈아타야 한다.
조절철학
우리는 인간의 나쁜 행동의 원인은 숨겨진 어떤 의도가 있거나 혹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대개 호르몬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과 관련된 느낌이다. 안 좋은 기억이 많은 것이 나쁜 것이다.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말은 넘겨짚기다. 상대를 자극하여 스스로 실토하게 하려는 꼼수다.
인류의 수준이 처참하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부에서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하는지 알아보지 않는다. 누명을 씌우거나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이는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 책임을 상대편에 전가하고 발뺌하는 짓이다. 숨겨진 의도가 있거나 나쁜 사람이면 내가 할 일은 없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마음 내부로 쳐들어가서 메커니즘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은 스트레스 때문이거나 호르몬 때문이다. 스트레스와 호르몬은 집단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집단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압박받는다. ‘네가 짜증 내는 이유는 집단과 잘못된 관계 설정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이야.’ 하고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 ‘네가 날뛰는 것은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이야.’ 하고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 인간은 집단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 감정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
말썽꾸러기에게 ‘넌 나쁜 아이다.’하고 위협하면 좋지 않다. 그 말은 '너는 우리 편이 아니고 적'이라고 선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적이라고 선언되면 아이는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이니까. 착한 행동은 자기편끼리 동조화하는 것이다. 자기편이 없는데 어떻게 동조화하겠는가? 별도로 패거리를 만들어 심리적인 독립을 추구하면 이미 나빠져 있다.
강박증이나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호르몬이 넘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호르몬이 약하면 자신을 괴롭힌다. 우울증은 호르몬 저하로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개는 길들이는 방법은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집단의 나쁜 흐름에 동조화하느냐 아니면 좋은 흐름에 동조화하느냐다. 환경과의 동조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뭐든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이미 틀려먹었다. 능동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모든 선택은 을의 대응이며 을은 포지션 게임에서 이미 져 있다. 갑이 되어 조절 스위치를 장악해야 한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아도 한 방향으로 몰아야 한다.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하나의 큰 흐름에 동조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