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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바친 일터, 평화시장
“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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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생 동안 직장생활이라고는 단 두 번 했는데 다 합쳐 6개월을 넘지 못했다. 1955년 무렵에 제일 먼저 얻은 직장이 남대문 근처에 있는 재봉틀 가게였다. 나는 여기서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판매도 하는 점원으로 일하였다. 이 상점은 재봉틀을 수입해서 팔았는데 그 당시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상점이었다. 비록 점원이기는 해도 규모 있는 가게에서 밥 먹을 걱정은 면하고 있었으니 지낼 만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마음의 갈등을 많이 느꼈다. 처음에 서울에 온 목적이 시골에서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었다. 공부는 할 생각도 못하고 겨우 재봉틀 가게 점원 노릇이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처지가 답답하고 한심스럽게만 느껴졌다. 언젠가는 독립하여 돈도 벌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지만 당장 가게를 떠나면 밥 먹을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라 독립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서 재봉틀 기름을 콜라 병에 넣는 일을 하다가 재봉틀 기름 장사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큰 밑천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윤도 많은 장사라는 판단이 되었던 것이다. 재봉틀 기름 한 말과 콜라 병 100개 값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당시 재봉틀 기름 한 말 값은 2,400환이었고 콜라 병 값은 백 개에 500환이었다. 나는 1개월 일을 하고 6,000환을 받아 퇴직하기로 결심했다. 재봉틀 기름은 한 병을 사 놓으면 가정에서는 몇 년씩 다시 살 일이 없는, 말하자면 소비량이 매우 적은 품목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판매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윤도 많고 자본도 적게 들고 직장에 얽매이지 않으니 자유롭게 장사를 하면서 학교도 다닐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한 것이다.
막상 퇴직을 하고 보니 때는 늦은 가을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하였다. 문득 너무 경솔하게 퇴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퇴직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어디에다 어떻게 팔 것인지, 판매망과 방법에 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무작정 장사를 시작할 생각만 했던 것이다. 늦었지만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 나는 재봉틀 기름을 많이 파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먼저 재봉틀 기름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했다. 가장 많이 쓰는 곳은 봉제공장일 것이다. 봉제공장이 많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평화시장을 터전으로 장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재봉틀 기름 한 말을 사다가 콜라 병에 나누어 넣고 집을 나섰다. 그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평화시장이었다.
그 당시 평화시장은 길 양쪽으로 가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고 거기에 칸칸이 의류를 만드는 공장 겸 상점이 무려 300여 개나 들어가 있었다. 나는 이곳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기름을 팔았다. 하지만 하루 5개 팔기도 어려웠다. 그곳도 생각만큼 재봉틀 기름 소비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외상으로 주는 위탁판매였다. 당시 대부분 점포는 점포 겸 봉제공장이었기 때문에 점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재봉틀 기름은 반드시 필요하게 되어 있으니 물건을 미리 맡겨두면 언젠가는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방법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 3개 시장을 상대로 장사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은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화시장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이 전국을 상대로 거래하는 규모가 큰 시장임을 알게 되면서 평화시장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평화시장은 지금도 내 꿈의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다. 군 복무 후 맨 처음으로 사업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고 내 사업의 기틀을 잡은 곳이기도 하다. 나와는 정말 인연이 많은 시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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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언 12장 24절, 27절)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지만 평화시장은 6^25 이후에 생겨난 임시 가건물 시장이었다.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이나 지방에서 옮겨와 터전이 없는 사람들이 청계천을 복개하기 전에 둑에 진을 치고 시작한 것이 평화시장이었다. 그 후 청계천 복개공사에 맞추어 3층 건물을 지어 시장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주로 자본이 적은 영세상인들이 2~3평 정도 되는 작은 점포에 입주하여 물품을 박리다매로 사고 파는 시장이었다. 점포 규모는 작았지만 많은 상인들이 입주하여 물건을 팔다 보니 나중에는 전국을 상대로 하는 도매시장이 형성되었다.
나는 결혼 후 6~7개월 동안 부지런히 청계천 변에서 노점상을 했다. 복개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모은 자본으로 친구인 박복용과 함께 평화시장의 점포를 임대하여 입주 상인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29세였고 평화시장 입주 상인 중 최연소였다. 당시는 모두 자본이 부족한 상태였고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물건을 만들어 납품하는 소규모 공장에 물건 값을 제때 주지 않고 1~2개월 후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예 습관이 되어 물건을 팔고도 대금을 잘 주지 않는 경우들도 많았다. 당연히 공장에서는 불평이 많았고 물건을 팔고도 수금을 하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일거리가 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건이 팔리는 즉시 대금을 지불하였다. 남에게 채무를 지고는 못 견디는 성격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성격상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소문이 나서 새 물건이 많이 납품되었다. 속 썩이지 않고 물건 대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공장 측에서 보면 매우 이익이 큰 편이었던 것이다. 물건이 자주 회전되니 우리 가게에는 유행에 민감한 물건이 많았고 외상으로 팔아달라며 위탁하는 물건도 많아져 다른 점포들보다 더 활발히 사업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때 배운 경험이 돈을 잘 주는 것이 사업 잘하는 비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유통업을 하면서 깨달은 바가 많지만 그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반드시 주인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이 자리를 지켜야 물건 구입이나 판매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구입처나 판매처와의 유대도 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문도 없는 점포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고 꼬박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점포 주인들은 한가한 시간이 되면 가게를 비우고 근처의 다방에 가거나 쉴만한 곳을 찾곤 하였다. 하지만 나는 영하 10도 이하의 겨울에도, 영상 30도가 넘는 더운 여름에도 꼬박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는 소변 보는 시간도 아까워 화장실 가는 2층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다니며 시간을 줄이려고 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 자리를 지키는 것은 때로 매우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떻게 하면 더 장사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었다. 손님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손님을 오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이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시간을 보내느라 궁리했던 것이 전혀 헛되지는 않았다 제법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중 몇 가지는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몇 년 후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소매 손님을 걸러주는 직원을 배치해야 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사업이 잘 되어서 동업을 한 친구와 이제는 분배하여 독립하여도 될 만큼 가게가 성장하였다. 나는 동업자와 의논하여 따로 독립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날짜를 정해 독립 절차를 밟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현재의 점포(평화시장 가동 56호)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자리가 목도 비교적 좋을 뿐 아니라 그동안 거래처도 많이 확보했고 외상도 상당히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앞으로 나의 사업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동업자와 의논하였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둘 다 양보할 생각 없이 현재의 점포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날부터 새벽기도회에 나가 이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현재 점포를 맡을 수 있게 해 달라’, ‘하지만 이로 인해 동업자와 의견 충돌이 없게 해 달라’, ‘둘 다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달라’는 기도였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에 묘안이 떠올랐다. 점포는 하나인데 맡고 싶은 사람은 둘이니 맡고 싶은 사람이 떠나는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으면 서로 동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둘 사이에 입찰을 붙여 많은 금액을 써낸 사람이 점포를 차지하고 그 금액은 떠나는 사람이 갖도록 한다면 모두 이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내용으로 동업자와 의논을 하니 그도 좋은 방법이라며 나의 제안에 찬성을 했다. 평화시장 역사 이래 점포 하나를 둘이 입찰 형식으로 경매에 부치는 것은 처음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2~3일을 연구하여 입찰 내역서 20개항을 만들었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일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많은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이 현재의 점포를 맡는다. (경쟁입찰)
낙찰자는 미지급금과 미수금을 맡는다. (미지급금과 미수금의 차이가 많지 않았다)
낙찰을 받지 못한 자는 현 점포에서 500m 내에서는 개점을 할 수 없다.
낙찰자는 1개월 내에 낙찰 금액을 상대에게 입금하며, 입금하지 못할 시는 상대에게 낙찰자의 권리를 승계한다. 만약 그 사람도 1개월 이내에 입금하지 못하면 본 입찰은 무효로 하고 다시 재론한다.
2명 이상 증인을 세운다.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은 반으로 분배한다.
낙찰이 결정되면 어떠한 이유로도 재론하지 않으며 모두가 승복한다.
나의 동업자는 배짱도 있고 활달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집안과 친척들이 서울에 많이 있었고 사교술도 좋아 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서울에 의논할 사람도 마땅치 않아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마음에 많은 부담이 느껴졌다. 나는 그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달리 의지할 곳이 없는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응답을 주시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입찰 일이 되었다. 각자 계약금을 갖고 서로 서명한 후 입찰을 시작했다. 동업자는 가족과 친척들의 자문과 도움을 받고는 자신이 낙찰 받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했다. 나는 기가 좀 죽기는 했지만 내 인생에 몇 번 안 되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비록 배짱은 없지만 기회가 올 때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경 말씀대로 큰 그릇을 준비하자고 결심하고 용기를 내어 거금 32만 1천 원을 써냈다. 낙찰 결과 내가 동업자보다 10%를 더 써넣어서 내게 낙찰이 되었다. 동업자는 비록 낙찰을 받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을 받을 수 있었기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덕분에 동업자와의 관계는 잘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13년 동안 사업을 할 수 있었고 후일 동업자도 우리 점포와 600m 떨어진 곳에 점포를 임대하여 사업을 하였다.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래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좋은 거래처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궁리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가격을 내려서 물건을 싸게 팔면 거래처를 많이 확보할 수 있겠지만 싸게 팔면 이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품이 싸구려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도 있어서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매일 아침 6시까지 출근하고 밤 11시나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다 보니 아들딸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서 깨어 있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서 일주일에 하루씩 늦게 출근하는 날을 잡아 놓고 있었다. 도매장사는 아침 일찍 거래가 시작되기 때문에 늦게 출근해서 보면 직원들이 물건을 많이 팔아놓곤 했다. 그런데 계산서로 판매 현황을 파악하다 보면 직원들이 적정가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은 경우도 있고 적게 받은 경우도 있었다. 지난 일이니 할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지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거래 관계에서 신용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부산이나 대구에 있는 거래처에 일일이 엽서를 띄워서 직원들이 착각하여 금액을 더 받았으니 다음에 올 때 꼭 들러서 차액을 찾아가라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반대로 적게 받은 곳은 엽서를 띄우지 않았다. 그리 큰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은 아주 좋았다. 엽서를 받은 거래처의 대부분은 다시 우리 가게를 찾아왔고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다. 더 많은 물건을 구입해 주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우리 가게를 선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신의를 지켜 거래를 하다 보니 저절로 많은 거래처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조그맣게 시작하였던 사업이었지만 젊음을 바쳐 신명나게 일했던 일터가 평화시장이었다. 일 욕심이 많았던 나는 쉬지 않고 열심히 사업을 하였다. 가급적이면 다른 점포보다 빨리 문을 열고, 물건도 빨리 공급하고 재고도 빨리 회수했다. 언제든지 다른 사업자들보다 하루 혹은 반나절 빨리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대구, 대전, 부산, 광주 등에 신상품을 빨리 공급하기 위해 1965년에는 지점을 설치하기도 했다. 지점이란 것은 은행이나 협동조합, 규모가 큰 사업에나 있는 것이지 일개 평화시장의 의류유통업자가 지방에 지점을 둔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업에 대한 열정이 그런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나는 사업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길에서 괜찮아 보이는 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 무작정 따라갔다가 오해를 받기도 하고 견본으로 쓰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을 쫓아가서 입고 있던 옷을 사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 옷으로 견본을 만들어 히트 상품으로 선전을 하여 많은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하루는 친구네 돌잔치에 초대되어 가서 도배지 무늬를 보고는 옷에 그 무늬를 적용하면 어떨까 연구하느라 잔치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기어코 주인에게 도배지 한 장을 얻었다. 그 도배지를 갖고 공장 기술자를 불러 옷을 만들어 보라고 하니 공장 주인도, 기술자도 모두 만류를 했다. 당시에는 단순한 무늬가 유행이었는데 그 도배지는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어느 잡지에서 올가을에는 꽃무늬가 유행할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던 터라 고집을 부려 꽃무늬 스웨터를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겨울 장사는 그 꽃무늬 스웨터가 유행이 되어 큰 재미를 보았다.
판매기법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당연하게 모두 사용하는 전략이지만 1960년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나는 많이 생각해 내서 활용해 보곤 했다. 그중 하나가 “되돌이”라는 판매기법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시켜 잘 팔리는 물건을 가지고 남대문, 동대문 청량리, 시장의 소매상을 방문해 판매하고 못 파는 것을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되돌이 상인을 10여 명 고용하여 동대문, 남대문, 청량리 등 지역 시장으로 돌리니 물건이 잘 소진되었다. 점포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기보다는 찾아가서 팔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꾸고 떠올린 방문판매기법이었다. 그 외에도 개인어음 발행, 현찰 구입, 현찰 판매, 겨울재고 여름에 팔기 등 약 20여 가지 판매기법을 연구하여 효과를 보았다. 특히 재료를 구입하여 물건 값과 교환하는 방법은 이익이 물건과 재료에서 이중으로 남아 많은 이익을 얻었다.
신명나게 일을 하긴 했지만 사업이란 것이 언제나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은 것이 사업이다. 평화시장에서 하는 의류도매업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데다 외상거래가 많았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하여 신용조사를 해야 했다. 어제까지 잘 하던 거래처가 오늘 갑자기 부도를 내는 일이 꽤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게 역시 전국에 거래처가 산재하다 보니 그 관리가 수월치는 않았다. 대구에 있는 어느 상회가 부도가 났다거나, 부산 광복동 시장에 불이 났다거나 하면 그 일들이 우리 가게와 다 연관이 되었다. 부도가 나면 수습을 위해 지방출장을 자주 가야 했고 불이 난 거래처는 상황에 따라 외상값을 유예해 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고의로 부도를 낸 사람을 그냥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례도 있었다. 대구 서문시장에 법무사 출신 상점 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사업을 잘하다가 갑자기 부도를 내었다. 그는 부도를 내기 전 여러 거래처에서 많은 물품을 외상으로 가져갔다. 워낙 계획적으로 낸 부도였기에 우리 가게도 피해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구에 내려가 보니 그는 이미 사라졌고 주소지에는 늙은 부모만 살고 있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구청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어서 있을 만한 곳을 추측해 보았다. 경산에 있는 누이네 집일 것 같았다. 밤에 경산의 시골집 근처에 가서 기다리니 그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재산을 타인 명의로 이전시켜 놓은 후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것이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게의 위상을 지키고 다른 거래처에도 이러한 행동은 꼭 손해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구청에 가서 그 사람의 지방세 납부 실적을 조사한 결과 한 군데 허점을 발견했다. 그가 사는 집이 80여 평이었는데 그중 시유지가 30여 평이었다. 그가 구청으로부터 산 자기 소유의 땅이었으나 재산세만 내고는 등기를 하지 않아 구청 소유로 되어 있었다. 법무사 출신인 그가 다른 재산은 다 명의 이전했지만 이 땅은 구청 소유로 되어 있어서 안심하고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문법무사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니 등기비용을 대납하고 대위보전등기를 하면서 압류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등기 된 땅을 압류하니 그가 며칠 후 나를 찾아와 선처를 부탁했다. 나는 물건 값과 등기비용 등 제 비용을 모두 받고 압류를 해제하여 주었다. 이때 나는 범죄는 숨길 수가 없으며 어딘가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고 세상 죄도 숨길 수 없는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는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살 수 없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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