緬懷濯翁高風
讀書樂爲古道
탁계 전치원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회고해 보니
옛 도의를 익히기 위하여 즐거이 독서삼매에 드시었다.
글씨 : 이가원 박사
[자료제공] 합천 청은 전호열
◎ 緬懷 면회
지난 일을 생각함.
◎ 高風 (고풍)
1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
2 뛰어난 인덕(人德)
3 남의 풍채(風采)를 높이어 일컫는 말. 고상(高尙)한 풍채(風采)
◎ 古道 (고도)
옛날 다니던 길. 옛날의 도의(道義)
◎ 전치원 [ 全致遠 ]
요약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병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대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학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출생-사망/1527 ~ 1596
본관/완산(完山)
자/사의(士毅)
호/탁계(濯溪)
국적/한국
활동분야/정치
주요저서/《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1542년(중종 37) 이희안(李希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1)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며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노흠(盧欽)·김면(金沔)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저술하였다. 문집인 《탁계집》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치원 [全致遠] (두산백과)
◎ 이가원 [ 李家源 ]
분야
역사/근현대,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현대/현대
출처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이가원
목차
정의개설활동사항저술 및 작품상훈과 추모
정의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한학자이자 대학교수.
개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연민(淵民)이다. 1917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나 2000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이가원은 퇴계 이황(李滉)의 14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1952년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모교에서 문학박사 학위(1966년)를 취득하고,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중화학술원에서 철학박사 학위(1969년)를 받았다. 이가원은 박사 학위 취득 전인 1955년부터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4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겨 국학 연구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이가원은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박사학위 논문인 「연암소설연구」는 당시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가원은 도산서원장, 퇴계학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세계 최대 한자사전인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편찬을 주도하는 등 국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에는 그가 평소에 모아 기증한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이가원전집』(23권), 『연암소설연구』(정음사, 1986), 『금오신화역주』(정음사, 1986), 『중국문학 사조사』(정음사, 1986), 『한국한문학소사』(정음사, 1986), 『조선호랑이 이야기(편)』(학민사, 1993), 『조선문학사』(태학사, 1995)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87년에 제2회 성곡학술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97년 제3회 용재학술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에는 제11회 춘강상(교육부문)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강동엽, 『연민 선생의 학문과 생애』(아세아문화사, 1987)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가원 [李家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