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번동3단지 LH아파트에 행복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36년 동안 301~308동까지만 있던 아파트에 309동 건축이 완공되었습니다. 309동(행복주택) 완공과 동시에 저희 복지관도 올해 8월부터 어르신들의 경로식당을 새롭게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직원들과 어르신들 모두 새로운 건물과 환경을 준비하고 적응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8월 한여름 태풍이 휘몰아치던 비오는 날 어르신들의 식사가 정리된 조금 늦은 시간, 남자 어르신이 비에 흠뻑 젖어 식당에 들어오셨습니다. 평소에 잘 알고 인사드리는 신씨 아버님 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인사드렸지만 왠지 눈길을 피하시며 빠르게 배식대로 가셨습니다. 사회복지사의 눈치? 빠른 촉! 아니면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아버님 오늘 한잔 하셨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씨 아버님은 만취 상태였습니다. 음주 자체가 나쁜 것으로 표현될까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조절이 되지 않는 과한 음주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신씨 아버님은 배식을 하면서도 영양사, 조리사 선생님들에게 강한 어투로 뭔가를 이야기 하시고는 자리에 앉아 저를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권 과장 오늘은 못 본척 하쇼”
사실 최근 경로식당을 이용하시는 어르신들 중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신씨 아버님도 어르신이라고 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청년 같은 어르신입니다. 체격도 좋으시고 왕년에 주먹도 좀 쓰시고 거기에 만취상태인, 김씨 아버님의 과거를 조금 알고 있는 저로서는 만취한 어른신의 말과 눈빛이 사실은 무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신뢰하며 어르신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대화는 자동차 공회전처럼 제자리 이었습니다. 못본척 하라는 신씨 아버님과 못본척 할 수만은 없다는 저……. 몇 분이 지났을까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 현관문에 우둑 허니 서있는 어르신을 뒤 따라 갔습니다.
신씨 아버님은 양손에 식판과 수저, 젓가락을 들고 비오는 하늘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신씨 아버님께 경로식당의 음식은 외부로 반출될 수 없음을 강하게 말씀드렸지만, 신씨 아버님의 행동은 완고 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신씨 아버님은 젓가락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식당으로 돌아와 앉으셨습니다.
다정한 말이 똑똑한 말을 이긴다고 합니다. 사회복지사의 단호하고 똑똑한 말보단 다정한 말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도 겁이 났습니다) 또한 뭐가 아버님을 이토록 분노하게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아버님 오늘 속상한 일 있으세요?”
긴 한숨을 내쉬고 말씀하시는 신씨 아버님은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속상한 마음에 술을 한잔 했는데, 심지어 집에 간단한 안주거리 마저 없어,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에 경로식당 점심을 안주삼아 한잔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하십니다.
제가 이상한 걸까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제 입장에서도 신씨 아버님의 짧은 말씀이 너무 이해되고 공감 되었습니다.
신씨 아버님께 오히려 부탁 드렸습니다. 점심은 식당에서만 드실 수 있어서, 맛있게 식사 하시고 좀 쉬신 다음에도 술 생각이 나시면 집에서 기분 좋게 드시면 어떨지 여쭈었습니다.
말없이 식사를 마친 신씨 아버님은 미안하다는 짧은 인사 후 급하게 자리를 일어나셨습니다. 우산도 없이 비속을 걸어가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에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복지관에는 지역주민 누구나 환영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주민이 종종 있습니다. 아버님의 속상한 마음에 제가 더 화를 더한 건 아닌지 편견의 눈으로 보진 않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라도 제가 조금 더 지혜롭고 따뜻하고 다정 해야겠습니다.
며칠 후 김씨 아버님께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경로식당에서 근무하시는 종사자 분들께 손수건을 선물해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씨 아버님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로식당을 이용 중이십니다. 그렇게 신씨 아저씨와 저는 오늘 하루도 삶을 살아 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