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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모처럼 아내 제노베파가 트레킹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1월3일과 8일이 영명축일인 관계로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행보였습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성지를 순례하기 앞서 환희심이
자신을 부추긴다는 감정을 안고 아름다운 명동골목을 지나 성당 후원 성모님 동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늘 약속시간의 1등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이미 도착하셔서 성당을 축으로 주변을 탐방하신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박기상 안토니오 형제님이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남산 송년 트레킹부터 함께하고 계신 형제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걷는
모든 형제, 자매들과 그 기쁨을 공유하시겠다는 의미로 강지양 글라라 자매님께서 포도주 두병을 준비해 주셨으며 또한 정정임
아네스 자매님께서도 특별한 포도주인 오디로 숙성시킨 포도주 한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명례방, 명동성당 터 옛이름이죠.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사대문 안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으로서 고품격을 지닌 터가 바로 명동성당입니다. 성당 언덕을 오르기 위하여 한걸음을 옮기려할 때 즈음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처 우장구를 준비 못한 실수로 자신을 탓했지만, 금새 자신에게 관대함을 베풀었습니다. 아주 고약하고 지독한 고문끝에 자행된 망나니의
참수를 겪어가시며 순교를 당하신 분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가랑비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생각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성당 언덕을 오르면서 몇일 전 준비해 두었던 순례자를 위한 기도를 잠시 암송했습니다.
순례자를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천주여,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가문 좋고 명성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잘 살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매질 당하고, 죽음을 당했던
성지를 찾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관광의 목적인양 흩으러 지고
어긋난 자세로 임하지 않도록 올바른 순례의 지혜를 주시고
진정한 순례자로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얻어진
순교자의 정신을 우리 마음에, 생활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도착한 성당 후원, 이곳은 누구에게 나 열린 공간이죠. 어떤 마음을 지니고 찾아 오더라도 자비와 사랑으로
안아 주시는 성모님이 계신곳, 그리고 한국 천주교만이 지니고 있는 신비롭고 극적이며 불가사의한 자생적 탄생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지 메카가 바로 명동성당이라는 사실, 마음을 조심하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우리를 옛부터 집을
나설때 마다 부모님으로 부터 늘 듣는 이야기중 하나가 바로 조심을 당부하시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늘 올곧게 세우고 행동하라시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풀어지면 잡념이 살아나 엉뚱한 행동을하게 되어 결국
자신도 모르게 변을 당하게 되죠. 성당. 또는 성지 그리고 복음서 등등을 대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긴장되고 조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성모님 앞으로 다가가 인사와 그리고 평소 불편했던 일들을 꺼내 기도로 편집하여 이르고
그 답을 소원했습니다. 좋고 기쁜 일들은 주님이나 성모님 모르게 즐기고 지내면서도 불편하고 힘들고 험한일들이
닥치면 간 쓸개까지도 드리겠다는 심정으로 메달리는 .... 극히 이기적인 신앙적 삶 휴우~~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약속시간이 임박하자 명절 앞이고 우중임에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오시는 순서대로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곧장 성모님 품으로 찾아가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늘 순례자로서
격을 스스로 갖추는 것입니다. 김종식 파스칼 형제님께서 지금은 기도중이십니다. 무릎을 장궤틀에 붙이고 무슨 기도를
하실까? 의문을 세우지만 금새 터득합니다. 사람 사는 속에 있는 일들을 불러 모아 기도중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재속의 형편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죠. 자신을 낮출 수 있을 때 까지 낮추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밝은 햇살을
얻을 수 있답니다.
순례자의 의관을 제대로 꾸미시고 나오신 이형용 이시도르 형제님이십니다. 오늘 순례길내내 순례팀의 안정감을
이끌어 주신 형제님의 배려가 참 좋았습니다.일상적으로도 서로 메일을 주고 받으시며 소통하시는 두분께서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면서 단위형제회에 소속된 형제,자매님들끼리 서로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언로가 열려 있어야 마음의 행로가 함께 열리며 신앙적 삶의 모티브가 서로 서로 구체화 될 수 있고
같은 공감대 안에서 함께 배려하고 의지하며 고해와 유혹의 바다를 건너 주님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 배움이 바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의 본질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큰봉사이신 이국희 모니카님께서 시작기도를 챙겨 주셨습니다. 시작기도는 무척 중요합니다. 시작은 반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늘 세상일과 맞서서 출렁거리기만 하는 감정을 추수리고 진정시켜 조심으로 마음을 붙잡고 평화의 시간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시작기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초심이 아름답고 굳건하면 평심과 종심 또한 평화의 마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다는 사실은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매번 시작기도를 촬영하면서
집중력과 그 진지함을 담아 내려고 하지만 금새 그럴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각자 기도하는 모습을 통하여 엄숙함을
동반한 거룩하고 진지한 기도의 순간을 형제 자매님들을 통하여 익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출발전 단체사진 촬영 장소를 정문으로 정했습니다.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삶의 희로애락에 대한 숙명적 감정인
좋은 것은 좋은것대로 나쁘고 암울하고 비극적인 일들까지도 위로 받고 치유 받기 위하여는 스스럼 없이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문은 바로 나의 모든 삶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함께 인증하는 차원에서 정문을
출발전 단체사진 촬영장소로 정했습니다.
저는 명절 앞이 바로 21일임을 알면서도 트레킹 일자를 바꾸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소문, 당고개 순교지가
안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시기적으로 오늘 순례일과 일치되는 연속성과 구체적인 거룩한 순교자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서소문 일대는 어물,채소, 약초, 염직, 피혁 등등의 문류가 번창하던 곳 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왕래하던 곳이였던
관계로 국법과 관련된 국사범을 이곳에서 참수함으로서 그 전시및 파급효과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노려 이곳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 설이 얼마남지 않은 이 시기에 최양업신부님 부모님 이외 여럿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서소문 형장을 열 준비를 하자 많은 난전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명정 대목을 받아야 하는데 이곳에서
참수가 있다면 장사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항의하자 나라에서는 급하게 당시 무당집이 있던 언덕, 당고개로 처형장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연유가 있는 성지를 찾는 자세로 좀더 진정 거룩한 마음을 세우고 성지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변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죄송함을 전합니다. 늘 함께해 주셨던 형제ㅡ 자매님들이 가정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신다는
안타까운 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참석 못하신 형제들과 자매님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을 밝혀둡니다.
명동 중심 길을 걸어 명동을 벗어난 후 , 소공동 지하상가와 시청앞 지하보도를 이용하여 옛 대한일보사옥과 싱어롱으로
유명하셨던 전석환씨가 이끌며 함께 노래를 부르던 다방 골목길로 올라섰습니다. 엄동에 봄비처럼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이 또한 축복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랑비가 우리 순례자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심성을 복돋아 순례객들의 신앙적 살핌을 공고히 해주었습니다. 슬프면서도 기쁨이 서린 것이 바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지입니다. 나를 초개처럼 버리고 하늘을 얻었으니.... 당연한 귀결입니다. 숙연하고 침착하면서도 거룩함을 느끼며 평소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하여 바름으로 정화시키는 시간을 갖는 순간이 바로 성지순례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순교자들의 이름을 한분 한분 거명하며 바치는 기도의 순간 순간, 다시 피어 오르는 순교자들의 곧은 절개와 치명의 순간을
떠 올리다 보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당시 고통과 그리고 재속에서 있을 법한 많은 인연에 대한 시련을 오로지 신앙심
하나로 이겨낸 거룩한 순교정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 앞에 기도를 끝내면서 잠시 침묵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어 보았습니다.
서소문 성지가 한 때는 행려자들의 거처로서 이용되어 성지로서 제구실을 상실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지를 관리하는
현장사무실이 개설되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는 순교자 현양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성지로서 면모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관리하시는 형제님 덕분에 세베리노도
모처럼 단체사진을 찍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이슬비처럼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들면서 당시 이 지역에 대한 풍광을 추수려 보았습니다. 당시 살지 않았던 탓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각종 고증과 문헌을 통하여 익히고 배운 사실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가며 풍광을 재현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는 서소문 밖입니다. 조선을 개국하며 도읍지로 한양을 정하면서 약 17km에 해당하는 성을 쌓아
사대문과 함께 사소문을 만들었습니다. 동쪽으로 흥인지문(동대문) 만들어 仁 가치를 세우고 사대문 중 가장 낮은 낙산이
있어 외침을 받을 확율이 높은 곳이라하여 산맥을 뜻하는 之를 첨부하여 그 허약성을 동대문 현판으로 극복하려고 興仁之門
이라 하였고 남쪽의 숭례문(남대문) 세우면서 화기를 다스리고자 현판을 바로 세워 화재를 관악산 화기를 불러드려 불을
막겠다는 의지에서 崇禮門의 현판을 세워 설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소문을 만들어 광희문을 열었
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敦義門(서대문)에는 仁義禮知信 가운데 義를 넣어 敦義門이라 하고 남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작은문으로
서소문을 세웠습니다. 또한 북쪽에는 북대문에 智를 넣어 弘智門 세우고 그 사이에는 彰義門(자하문) 두었으나 정식으로
북문은 숙정문입니다. 북악산 동북쪽 주능선상인 좌청룡 혈자리가 바로 숙정문이 있으나 문을 열지 않은 관계로 대신 자하문
밖에 홍지문을 세워 대신사용 한 것 입니다. 사대문 세울때 동쪽을 봄으로 보고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나무를 상징적으로 보고
나무를 仁으로, 남쪽은 여름으로 봐 火로 상징하고 禮로 본 것입니다. 또한 서쪽은 가을로 보고 金을 변할 수 없는 義로
보았으며 북쪽은 겨울로 보고 水 보고 물을 통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에서 智 뜻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 중앙에
종각을 세워 보신각이라 이름 지어 仁義禮智信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중 순교자들과 인연이 많은 소문은 동쪽의 광희문과
서쪽의 서소문이었습니다. 태형과 고문으로 죽어간 순교자들을 성밖으로 내갈 때 사용한 문이 바로 광희문과 서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시구문이라는 명칭도 얻게 된 것입니다.
서소문은 옥사한 순교자들을 내가는 문과 사형장으로 가는 순교자들의 길목이기도 하였습니다.
서소문밖 네거리 성지는 103위 성인중 44위 성인성녀와 124위 하느님의 종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중 27위가 순교한 한국최대
순교장소입니다. 이곳은 천주교도 박해기간내내 지도층, 평신도들이 참수를 당한 곳으로 서울수산물 시장과 난전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으나 노량진수산시장을 개장함으로서 이전하였고 그 곳을 1977년 서소문 도시공원으로 만들 때 서울시와
진통끝에 협의를 하여 서소문밖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으나 1999년5월 다시 조광호신부님의 작품으로 현재의 현양탑이 세워 진
것입니다. 마침기도를 끝으로 약현성당으로 가기 위하여 자리를 떠습니다.
야고바형제들 뒤에 보이는 현양탑이 바로 1977년 세웠던 탑입니다. 새로운 탑을 건설하면서 약현성당 십자가의 길인
14에 모셔다 놓았습니다. 시간관계상 십자가의 길, 기도를 생략하고 순교자현양탑을 등지고 정하상 바오로 동상앞에서
다함께 기도를 올려습니다. 비는 지금도 내려 마음을 아련하게 적셔 주었습니다.
1887년 블랑주교가 중림동 수레골에 강당을 짓고 교리 교습소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공소가 되었으며 신자수가 점점늘어
나자 1891년10월27일 정초식을 갖고 1893년9월25일 축성식을 갖었습니다. 약현성당이란 이름은 이 언덕 주변으로 약초밭이
많았던 관계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약현 성당은 고딕양식이지만 건물이 작고 낮은 관계로 뽀족한 지붕을 버리고 낮고 둥근
아치형을 사용하여 신축하였습니다. 약현성당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87년 서소문밖 네거라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기념성당과 전시관을 갖춘 순교자 기념관 착공을 갖었으며 1991년 5월12일 김수환추기경께서 축성식을 갖으므로서
서소문밖 성지순례 기념성당으로 태어 난 것입니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1892년도에 완성된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성당입니다.
작고 아름다운 약현 본당입니다. 의자에 앉아 정숙한 마음으로 제대뒤 스테인글라스를 응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환희심이 봄 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환희심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듣고 보는 평화방송의 시그널
종소리로 사용하는 소리가 바로 약현성당 종소리를 채집하여 사용하는 것이랍니다. 아직도 타종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우리들이 현장에 있을 때 타종되어 삼종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참고로 젊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결혼하기를 원해
항상 예약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기념관에서 근무하시는 자매님들 통하여 각각 성물에 얽히 고증을 듣고 있는 형제,자매님들의
모습입니다. 설명은 약 1시간 가량 이어졌습니다. 이런 시간을 통하여 당시 시대적 사황을 알고 그 뜻을 새기며 그 얼을
온전하게 받아 드려 자신의 산앙생활에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것이 순례자의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 보면서 동영상을 보고 각 성물에 얽힌 사연들을 접하면서 마지막으로 기념관을 나오기 직전 우린
교황바오로 2세께서 1984년 5월6일 명동성당에서 시성식 당일 바치신 기도서 앞에 모여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그 전문을 실어 봅니다. - 이 땅의 온 겨례와 교회를 성모님의 보호에 맡겨 드리는 기도 -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의 어머니시여, 당신은 모든 이의 고통과 희망을 아ㅅ나이다.
이 세상안에서 그리고 저희 자신의 마음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의 겨룸을 아시나이다.
당신은 이 나라의 겨레가 놀라운 기쁨과 아울러 많은 수난을 통해 "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분께서 찾아 얻은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낳아 주셨나이다.
오 자비의 어머니시여,
저희는 이제 당신의 사랑 가득한 마음에 이 땅의 온 겨례와 교회를 맡기나이다.
모든 불의와 분열과 폭력과 전쟁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죄와 악의 유혹과 멍에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저희와 함께 머므소서, 의혹과 믿음으로, 이기심을 봉사로, 교만을 온유로,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가 십자가의 어리석움으로써 복음을 살아 그 위에서 돌아 가신 예수님을 증거케 하시어, 당신 아드님과 함께
성령의 일치 안에 아버지와의 참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오 그리스도의 어머니시여,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어루만지고 붙들어 주소서 가난한이, 외로운 이, 아픈 이, 사람 못받는 이, 억눌린 이, 잊혀진 이를
두루 거두어 주소서, 저희들을 축복하소서, 요셉성인과 더불어 저희를 위해 빌어 주시어 모두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갈라진 이 땅에 평화를 내리시고 모든 이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소서, 복되신 태중에 아들 예수님을 저희에게 보여주소서
아멘.
성지 전시관 앞에서 인증의 뜻과 순교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키움의 뜻에서 기념촬영 갖었습니다.
전시관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해 놓았습니다.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의 순교자들에 대한자료와
교회자료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오래된 인쇄 복판본, 을축년 첨례표(1865년1월~ 1866년3월)는 병인박해 이전의
축일표입니다. 정약종의 평민을 위한 교리서인 주교요지와 박해자의 입장에서 교회의 논리를 내세운 정하상바오로의
상재상서, 북경주교의 도움을 얻기위하여 작성한 황사영백서, 그리고 1998년 화재때에 기적적으로 화실되지 않은
목조 성모상이 마음에 깊이 각인된 전시자료들입니다. 특히 한국천주교박해사를 드라마틱하게 꾸민 30분 분량의 동영상은
압권입니다.기념촬영은 끝낸 일행은 순교 기념관 성당으로 자리르 옮겼습니다.
16명의 성인 유해가 모셔진 기념성당에는 바오로사도, 바르톨로메오 사도, 바르나바 사도,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상탈,
심플리치오 주교, 율리안노, 요한 데리베라 대주교, 프란치스코 드살, 빅토리아, 불라시오 주교, 엥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베드로 신부, 샤스탕 야고보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요한이 모셔져 있었다.
16인 성인께 바치는 기도문
+ 교우 여러분 우리 마음을 당신 성전으로 삼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성인과 함께 간구를 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16인의 성인 호명
+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은 산이와 죽은 이를 다스리시나이다.
간구하오니, 모든 성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념관 성당 순례를 끝으로 서소문밖 성지 순례를 끝내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섰습니다. 한양성 남대문 일대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약현성당과 그 밖의 주변 건물들 그곳은 바로 우리 선조들께서 겪은 피의 순교 증거 자리 였습니다.
다음 순레지는 당고개입니다. 당고개 성지를 찾기 전 순례자 일행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부근에서 가장 오래된 중림
설렁탕 집을 찾아습니다. 국물이 진하고 맛갈이 나고 그 양도 많은 이름난 곳이기도 한 이 집 방에 몰려 앉아 두 자매님이
준비해 주신 포도주를 나누며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식사 후, 서소문밖 상인들의 반대로 교우들의 처형장으로 바뀐 당고개를 향해 도보로 걸었습니다. 빠른 걸음으론
약25분 소요 되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당고개 성지입니다. 서울에는 당고개란 지명이 여럿있습니다. 상계동 덕릉고개 넘어가는
언덕과 상도동에도 당고개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당집이 있던 곳이라 그런 지명을 얻은 곳입니다. 왜? 교우들의 처형장소가
서소문밖 서쪽이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경복궁에서 남쪽을 바라 보았을 때 사직단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禮記에
기인된 것입니다. 신성한 국가 사직을 모시는 단안에 죄인의 피를 보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였습니다.
또한 서쪽은 하루의 해가 기운는 것이라 죽음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 자연현상의 뜻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쪽의 모든 처형장은 이런 연유로 사직단 우측에 자리를 잡게된 것입니다. 서소문밖, 당고개, 새남터 등은 사직단을 기준으로
사직단 밖 서족으로 거의 일작선을 이루고 있는 형극입니다. 길을 건너 서울 서부역방향의 인도를 따라 20여분 내려가다
남영역 굴다리에서 다시 힁단보도를 건너 다시 남쪽 방향 힁단보도 건너 가야 합니다. e- 편리한 세상 아파트 앞에 당고개
성지가 있습니다.
당고개 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께서 순교하신 성지이다.1840년경 서소문밖 네거리에 있던 처형장 때문에 설 대목장이
영향을 받으므로 한양상인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당고개로 처형장 바뀐 것이 순교지가 된 곳입니다. 당고개에서는 1월31일과
2월1일 연이어서 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로서 기해년 박해는 마무리 되면서 이 당시 순교했던 10명중 최양업신부님 어머니를
제외한 9분이 103위 성인품에 올랐으며 신부님의 어머니는 124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최양업신부님의 가족은 전례
없이 아이들과 함께 부부가 옥에 갇혔습니다. 막내 아들이 굶어 죽자 모성애로 나머지 아이들을 살리고자 배교 후 옥을 빠져 나온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남편 곁으로 가기 위하여 다시 옥으로 돌아가 함께 순교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죠. 이성례 마리아가 그 주인공으로서 아이들은 동냥으로 모은 돈과 쌀과 재물을 들고 망나니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 목을 베어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들은 망나니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옛적 이 당고개는 공덕 오거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언덕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지역 동내 이름을 따 신계공원화 되었습니다.
이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만들어진 지역공원입니다. 도시지역 재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잘못하면 성지로서 제
기능을 상실할 수 있을법 했지만 절묘한 성령의 힘으로 조력자였던, 성지개발 계획자, 설계자, 건설관계자 등등의 아름답고
신앙적 조력으로 주변환경인 주거환경과 도시공학적 측면에서 절묘한 타협을 일궈내어 아름다운 성지를 연출했습니다.
너무나 우리들의 정서와 일치하는 배치와 문양과 자재 그리고 언덕 아래에 속에 공간을 만들어 다중들이 모이는 미사공간
배치는 주변 아파트들에 대한 배려가 분명합니다. 교회 특성상 잦은 모임과 행사는 분명 주거인들에게 시각,청각적 불편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종교란 겸손과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종교의 덕목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당고개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14처와 성물 판매소 뜨락으로 들어 가는 골목길입니다. 꼭 골목길 형상이 박해시대 점조직으로 서로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편편지 못한 필사본 교리서를 들고 동내의 가장 후미진 골목 끝에 있는 이마리아 집을 들어서는 느낌이 드는 광경입니다.
분명 성모님이시지만 저는 한편으론 머나먼 타국 마카오에 가 있는 큰아들을 그리며 다른 자식을 껴안고 계신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님을 형상한 조각이라고 굳세게 미련하게 믿고 있는 중입니다. 새남터가 마주 보이고 그 넘어로 줄곧 걸어갈 수
있다면 분명 신학과 교리공부에 여넘이 없으실 최양업신부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 합니다. 십자가 형상의 잔듸밭과 이성례
마리아님의 형상화된 성모님 상 주변에 놓여 있는 옹기그릇중 물동이가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순교자들께서 죽음을
앞둔 위급함속에서도 신앙에 목말라했던 증거의 형상화라는 컨셉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를 따라 줄기차게 따라 다니는 미래의 프란치스칸 녀석입니다. 이 친구를 매번 만나고 있으면서도 전 아직 이름을
모릅니다. 늘 어른들 틈에 서성이는 것 같지만 혼자서도 순례를 잘 하고 있답니다. 가끔 다가와 무엇인가 묻고 사라지는
뒷 모습을 보면서 보는 혜안과 느끼는 정서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느 때는 아이들이 어른들을 위한 삶의 교과서가 될 적이
있습니다. 늘 가까이 두고 정성과 사랑으로 소통하며 보살피고 키우는 것은 바로 어른들의 몫입니다.
당고개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오후 3시에 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새남터를 거쳐 강변을 따라 걸어 절두산
까지가 예정된 순례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을 앞둔 여건으로 오늘은 당고개에서 미사를 끝으로 순례길을 멈추기로
하였답니다. 가실분은 먼저 떠나시고 잔여 순례객들은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친 일행들은 걸어서 용산역에
도착한 후 트레킹 담당 회계 자매님의 제안으로 커피를 함께 마시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자비로 커피도 사주셨답니다.
찾고 찾아 아이파크 백화점 6층에 있는 커피점을 찾았을 때 그 커피점 옥호가 바로 천사였습니다. 순교자님들이 보내 주신 천사라 생각하니 온종일 판 발품과 마음품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각자 지닌 먹거리를 빽펫에서 꺼내 나누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4호선역에서 각자 집으로 향 했습니다. 함께 해 주신 신부님과 큰봉사자님 그리고 형제,자매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못하신 형제 ,자매님들께도 감사드리고 마음으론 순례길 내내 함께 했다는 사실을 고백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2월은 남한산성 성지 트레킹임을 알려 드리며 1월 소식을 매듭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