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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자료는 풍산홍씨정익공파종회 회장 홍만식님(찬성공종중 회장)께서 다음카페에 올린 자료를 참고로하여 작성한 자료입니다.
● 남원공파 파시조 - 10세 홍이상의 여섯째 아들●
◇ 11세 남원공 홍탁(洪𩆸 1597~1651)
○ 字 행가(行可) 광해군5년 계축(癸丑) 진사(進士) 벼슬은 통정대부 남원부사를 지내시다 현직에서 돌아가셨다.
○ 贈 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
묘소 : 충북 충주시 동량면 말흘산(末屹山 유좌(酉坐)
○ 묘갈명은 전라도관찰사 삼남 주삼(柱三)께서 지으셨다.
○ 1644년(인조 22년) 심기원·이일원·권의등이 인조를 제거하고 회은군 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고변하여 구인후·김류등이 이들 역당들을 체포·처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영국공신으로 책록하고, 1646년(인조 24년) 정공신의 자제나 수종자들은 영국원종공신에 책록하였다.
○ 심기원 사건은 같은 훈신 사이에 있었던 군사권의 쟁탈전, 반청· 친청의 정쟁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결국 친청의 김류· 김자점이 승리한 사건이다.
○ 1646년(인조 24년) 발간된 영국원종공신녹권 8면에 풍산홍씨 11세 남원부사 홍탁(洪𩆸)할아버지가 영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있다.
풍산홍씨 9세조 홍수(洪脩)할아버지는 과곡교위 충무위 부사직(果穀校尉 忠武衛 副司直)이란 한미한 벼슬을 지내셨으나, 아들 모당 홍이상의 벼슬에 맞추어 이조판서로 처음에 추증되셨다.
○ 보통의 경우 녹훈을 부친의 증직교지나 자녀의 음직교지로 교환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남원부사를 지내신 홍탁(洪𩆸)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조부의 추은 증직교지로 바꾸었다.
○ 풍산홍씨 9세조 홍수(洪脩)할아버지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總官)을 두번째로 추증받았다.
이러한 희생과 효심이 풍산홍문을 명문대가로 불리게된 기초가 되었음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 풍산홍씨찬성공종중 파시조●
◇ 12세 홍주천(洪柱天) : 광해10년 1618~현종12년 1671)
○ 字는 숙훈(叔勳) 부친 통정대부 남원부사 탁(𩆸) 어머니 평양조씨 차남으로 태어났다.
○ 양성현감(陽城縣監)을 지내시고, 차남 만조의 현달로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묘갈명: 判敦寧府事 萬朝 撰( 차남 판돈녕부사 만조 지음),척질(戚姪) 한성부윤 박경후가 글씨를 쓰다.
○ 묘소 :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710 辛坐
○ 찬성공 홍주천 표석 음기
공의 휘는 12세 주천, 자는 숙훈으로 안동 풍산현에서 계통이 나왔다.
고려조에 휘 풍산홍씨 시조 1세 지경이 있었는데, 국학 직학을 역임하였다.
2세 간은 도첨의 사인을 역임하였다.
3세 유는 밀직사를 역임하였다.
4세 연은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5세 귀는 중낭장을 역임하였다.
6세 숙은 좌군 사정을 역임하였다.
7세 계종은 사포 별제를 역임했으며, 좌통례에 추증되었다.
8세 우전은 부사용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9세 수로 부사직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10세 이상으로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11세 탁으로 남원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으로 평양조씨이다. 문충공 휘 준의 9세손이며, 사용 소의 손녀이며, 부사용 안국의 딸이며, 참봉 성덕린의 외손이다.
공은 만력 무오년(광해군 10, 1618) 11월 8일에 태어났다.
임오년(1642)에 진사에 올랐다. 무자년(1648)에 비로소 관직에 나아가 희릉 참봉 · 강릉 참봉· 광흥 봉사· 빙고 별검· 의금부 도사· 사첨 직장 ·장악원 주부 · 전생서 주부를 지냈으며, 나아가 양성 현감 되었다.
당시에 직접 양전을 했는데, 균일하게 실상을 검사하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었다. 2년 뒤에 돌아와 훈국 낭장을 여러 차례 맡았다.
신해년(1671) 4월 21일에 성 남쪽의 우거하던 집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 애통하구나!
첫 번째 부인은 안동 김씨이다. 고려 태사 선평의 후예로 문정공 휘 상헌의 손녀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광찬의 딸이다. 목사를 역임하고 좌승지에 추증된 김래의 외손이다.
부인은 병진년(1616) 9월 24일에 태어나 갑진년(1664) 10월 24일에 죽었다. 아름다운 덕이 있어 시부모님을 효로써 섬겼으며, 시동생과 동서들을 정성으로 대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완산 이씨이다. 우리 세조대왕의 7대손이다.
사인 주국의 증손녀이다. 고양 고봉 아래 성동리 인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오른쪽에 묻고 두 번째 부인은 왼쪽에 묻으니 같은 봉분에 다른 묘실이다. 즉 선영의 바깥 산등성이다.
첫 번째 부인은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만원은 진사로 현감을 역임했다.
현감 이경항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중적과 중겸이다. 중적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차남은 만조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봉사 권진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생원 중형, 생원 중휴, 중인, 중흠이다. 장녀는 생원 목천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남하성에게 시집갔다.
중형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시보· 신보이다.
삼남 만동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신휴석에게 시집갔는데,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덕함으로 진사이며, 덕영이다.
장녀는 이시방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조태흥에게 시집갔다. 진사(덕함)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불초한 자가 선조의 음덕을 받들어 2품 벼슬에 추은되어 봉작과 증직되었다.
공은 자질과 품행이 높고 바르며, 지조가 확고하고 효도와 우애는 두텁고 화목하고 바른 행실은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자신을 다스림에는 간소하고 검약하였다.
항상 생업을 챙기지 않아 자주 곡식이 떨어지는 형편인데도, 그것을 담담하게 처신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왕래한 이가 겨우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들뿐이었다.
공의 감추어진 덕과 숨겨진 행적은 저의 문사로서 형용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삼가 서술한다.
세계와 관작은 위와 같다. 이와 같다.
아들 통정대부 수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전주부윤 만조가 피눈물로 삼가 적는다.
종질 가선대부 한성부윤 우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박경후가 뒤에 기록한다.
숭정기원후 66년 계유(1693) 월 일 세우다.
● 풍산홍씨공조정랑공파종회(12세 찬성공 홍주천의 첫째아들)●
◇ 13세 홍만원(洪萬源) 묘비 번역본
1. 표제부
朝鮮國通訓大夫工曹正郎洪公萬源之墓 淑人韓山李氏祔左
조선국 통훈대부 공조정랑을 지내신
홍공 만원(洪萬源)의 묘이다.
숙인 한산 이씨를 좌측에 합장하였다.
2. 행장(가계 및 생애)
공의 휘는 만원(萬源)이며, 자(字)는 풍산현 사람으로 풍산홍씨이다.
그 선계(先系)는 유서 깊어 대대로 이름난 가문으로 이어져 왔으며,
세계(世系)의 자세한 내용은 선영의 묘비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기상이 맑고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와 사서를 두루 익혔으며
뜻을 세워 학업에 힘쓰니 스승과 선비들이 모두 그 재능을 인정하였다.
과거에 나아가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도를 지키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
3. 인품과 행적
공의 성품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마음이 온화하고 두터웠으며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항상 신의와 예의를 지켰다.
학문은 깊고 넓어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였으며
글을 짓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집안에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화목하였으며
밖에서는 사람들과 사귀되 의리를 중히 여겼다.
청렴결백함을 몸소 실천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4. 혼인 및 가정
배위는 숙인 한산 이씨이다.
명문가의 딸로서 부덕을 갖추고 예법을 지켜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자손을 훌륭히 길렀다.
부부가 서로 공경하고 화목하여
가문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5. 생몰 및 장례
공은 1640년 태어나
1704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65세였다.
공의 부친은 양성현감(안성)지내신 주천(柱천) 모친은 증 영의정 김광찬의 따님 안동김씨, 조부는 통정대부 남원부사를 지내신 탁(𩆸) 이다.
묘비는 친동생 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 만조(萬朝) 짓고
당질 통정대부 수(守) 전라도관찰사 중하(重夏) 글씨를 썼다.
묘소 : 경기도 일산동구 성석동 771-1
6. 공조정랑공 홍만원 모표
휘는 만원이며, 자는 군일으로 풍산현 사람이다. 세계는 선고(죽은 아버지)의 묘비에 있다.
증조의 휘는 이상인데, 대사헌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탁인데, 남원부사로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주천인데, 양성현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에 증직된 안동김씨로 좌의정인 문정공 휘 상헌의 손녀이며, 동지중추부사로 영의정에 증직된 광찬의 따님이다.
숭정 경진년(1640년) 9월 24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독실하였으며, 9세에는 경사와 작시에 능통하였다. 황황(어쩔 줄 모르게 급한 상황)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신동이라 칭하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기특해하며 사랑했다.
커서 여러번 공거(과거에 급제하는 것)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음사로 나아갔다. 기미년(1679년)에 비로소 진사시에 참여하여 2등이 되었다. 병인년(1686년) 성상께서 선비를 반궁(성균관)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응시자가 많이 넘어져 죽어 이로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역임한 바는 내직으로는 장작랑·사축서 별제·사옹원 태복·사재감 주부·장예원 사평·공조정랑인데, 출사하기도 하고 출사하지 않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좌수운판관과 영산·부여·고령·진보의 현감으로 혹은 버리고 돌아오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평소의 뜻이 벼슬살이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신년(1704년) 12월 6일 갑자기 풍현이 일어나 거주하는 집에서 역책하셨다. 향년 65세였으며, 선고(돌아가신 아버지) 묘 옆의 임좌(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한산이씨로 목은(이색)의 후예이며, 현감 이경항의 따님으로 여사의 풍모가 있었다. 시부모님께 순종하고 제사를 올리는데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위로는 종족으로부터 아래는 하인들까지도 모두 기뻐서 좋아하였다.
(부인은) 무인년(1638년) 12월 5일에 태어나서 정해년(1707년) 11월 27일에 돌아가셨다. 아들 둘을 두어 장남은 중적이며, 차남은 중겸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중적의 아들은 설보로 사인(벼슬하지 않은 선비)이며, 정도천·강신이 곧 그의 사위이다. 세 명의 딸은 모두 어리다.
중겸의 아들은 철보이다. 공의 성품은 편안하고 고요하여 서로 사귀고 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행실이 구차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성과 욕망의 분변을 엄하게 하여 구차하게 그 의리가 아니면 하나도 취하지 않았으며, 사전과 현읍(군현)이면서 담석이 늘 비었는데도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6년으로 이 생석을 여전히 못하였는데, 마침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유지(묘지석)를 묻고 또 천표(묘표)를 세웠다.
그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덕과 숨어있는 행적을 글로 모두 기술할 수 없으니 슬픈 일이구나!
동생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홍만조가 삼가 지음.
당질 통정대부 수 잔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전주부윤 홍중하 삼가 씀.
기축(1709년) 5월 일(日) 세움. 즉 강희 48년(1709년)
● 풍산홍씨정익공파종회(12세 찬성공 홍주천의 둘째아들)●
□ 13세 홍만조(洪萬朝) 약사
1645(인조 23)~1725(영조 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자는 종지(宗之), 당호는 만퇴당(晩退堂)
○ 증조부는 대사헌 문경공 모당 홍이상(洪履祥), 조부는 영국공신 남원부사 홍탁(洪𩆸), 부친은 양성현감 홍주천(洪柱天) 모친은 증 의정부 영의정 김광찬의 따님이다.
1690년(숙종 16) 충청도관찰사
1691년(숙종 17) 전라도관찰사
1693년(숙종 19) 충청도관찰사, 강화유수
1696년(숙종 22) 청나라 사은부사
1698년(숙종 24) 평안도관찰사
1701년(숙종 27) 전라도관찰사
1703년(숙종 29) 강원도관찰사
1704년(숙종 30) 함경도관찰사
1708년(숙종 34) 경상도관찰사
1713년(숙종 39) 경기도관찰사
1717년(숙종 43) 한성부판윤
○ 관찰사는 황해도를 제외하고 9회 역임하셨으며, 강화유수와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까지 11회를 역임하셨다.
○ 형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영임 하시고 넷째 아들이 분무원종공신에 책록 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기로소에 입소하시고 청백리에 뽑혔다.
○ 묘소에 양조은포비가 세워져 있고묘지(墓誌)는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짓고, 신도비(神道碑)는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이 지었다
○ 풍산홍 씨 최초 족보인 기축보(1709년)를 간행하셨다. 저서 만퇴당집 6권.
○ 호(號) 만퇴(晩退) 시호(諡號) 정익(貞翼)이다.
○ 묘소 :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산 22-16 축조가
찾아오는 길 : 아산시 배방읍 휴대세교길 247
○ 정익공 홍만조 표석 음기
조선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 세제좌빈객 홍만조의 묘.
증 정경부인 안동 권씨를 오른 쪽에 부장함.
공의 이름은 만조이고, 자는 종지이며, 호는 만퇴당이다.
풍산 홍씨로서,
시조는 고려에서 직학을 지낸 홍지경이다.
고조부인 홍유는 증 좌찬성이고,
증조부 홍이상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호는 모당이다.
조부인 홍탁은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홍주천은 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을 증직 받았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는 증 영의정 김광찬의 딸이다.
공은 인조 을유년에 태어났다.
기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과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 대관을 거쳐 승정원에 들어갔고
관찰사가 되었으며 한성부윤을 한 번 지냈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목사, 현감, 낭청, 관서의 두 번째 자리와 겸직은 기록하지 않았다.
을사년 12월 2일에 사망하였다.
부인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는 증 참의 권진의 딸이고 길성위 권대임의 손녀이다.
계미년에 태어나 을미년▨월1일에 사망했다.
장지는 온양 동쪽 세교 축좌의 산에 있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홍중형은 좌랑을 지냈고,
홍시보, 홍신보라고 하는 두 아들을 두었다.
홍시보는 아들 홍규한을 두었고,
딸은 최숭운에게 출가하였다.
홍신보의 두 아들은 홍위한과 홍기한이다.
둘째 아들 홍중휴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홍택보, 홍제보, 홍준보이며,
딸은 심상관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 홍중인은 참봉이고,
홍정보라고 하는 아들을 두었다.
넷째 아들 홍중징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이 되었다.
아들은 홍유보이고 딸은 목성리에게 출가하였다.
첫째 딸은 정자인 목천현에게 출가하여
목성관, 목성항, 목성함, 목성익, 목성정을 낳았고,
둘째 딸은 남하성에게 출가하여 남질을 낳았다.
내손, 외손, 증손, 현손이 50여 명 된다.
공은 세 임금을 모시면서 지위는 1품까지 올랐고, 수명은 80을 넘겼다.
언행과 사업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지만,
일단 입언 할 만한 군자를 기다리기로 하겠다.
숭정갑신년 후 84년 정미일 세움. (영조 4, 172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