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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고향 지명찾기
고향을 떠난지가 얼마나 되었던고 ? 그러니까 내가 군대입대 하기전 까지 살았으니까 1967년 7월30일 아침까지 살았네 ..... 군생활 만36개월 하고 제대하면서 고향으로 안가고, 곧장바로 서울로 와서 살았으며 고향에는 가끔 들렸으니까 옛지명도 어렴푸시 생각이 나지만 틀린곳도 있을터이니 이해하여 주시고 틀린곳이나 지명이 다른것은 지적하여 주시고 수정할수 있게끔 올려주시기 바람니다. 청미래 (배기호) 드림.
신대지구 (구:전남 승주군 해룡면 신대리 일대:순천시로 편입되기전 주소)
맴실마을
구 : 전남 승주군 해룡면 신대리 미계 (미강서원)
~~~***** 지명 설명 & 생각이 잘 안나는곳 *****~~~
허리찔 ..... 위치 ? 지명설명 ?
연막 ........ 선창(월산)을 지나 산두 가기전. 간척지 막기전 바닷물이 들어올때 소금굽던자리 (다른데 염전처럼 바닷물을 가두었다가 물이 어느정도 증발되면 염분이 많은 물을 큰직사각형 쇠솟에다 불을때서(피워서) 긇이면 염분많은 물이 달아져(보타져)서 가는 소금이 되지요.
선창 (월산)... 간척지 막기전 선창수문(매안교)까지 배가 들어왔어요. 옛날(일제강점기 전)에는 신대앞 행매앞 까지 바다였는데 일본사람이 선창(월산)에서 산두가는 쪽으로 뚝을막고 간척사업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신대 행매앞이 바다가 농토로 변한것이지요.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내가 어렸을때 신성포에서 광양으로 뚝을막아 농토로 변한게 현재 간척지 이며 간척공사 하는것을 보면서 자랐지요.
그때는 선창수문(매안교) 위 행매 신대 앞 냇가에도 바닷물이 밀물때는 들어오고 참게.짱뚱어.문저리(망둥어) 들도 잡혔으며 간적지 가장자리 부근에는 갈대밭이 있었는데 갈대숲에는 갈게. 꽃게. 바다달팽이. 고동.소라 등도 잡혓고
맴실사람들도 바다에 나가서 갈게를잡아 여수 순천에다 팔기도 하였으며 바닷물이 빠지는 바닥꼬랑(바닷물이 모여서 빠지는 개울)에다 발(생선잡는 고정시킨 기구 : 대나무로 만든것)을 처서 생선도 잡고 갯뻘밭에서는 짱뚱어 낙시로 짱뚱어도 잡는것을 본기억 나요.
간척공사 물막이가 끝난뒤는 염분이 빠질때까지 농사를 못지으니까 갯뻘말린 허허벌판 이었지요. 끄때는 간척지가 놀이터며 축구 삥뽕(현재 야구비숫함) 마라톤 등 완전한 놀이터 였지요.
구렁 ....... 나무.돌 도 없이 황토로만 된 커다란 뭉덩이 같은 굽경사진 골짜기. 맴실동쪽뒷산 고총굴 방향으로 큰꼴짝이 있었는데(엄청크며 경사가급하고 돌이없는 황토임)골짜기 안에서 소리치면 웡웡하며 크게 따라 울렸지요 크기가 대략 맴실마을 동쪽 정도의 크기 였어요.
구렁안 중간에 발디딜정도의 적은길을 벼랑따라 굽어지게 이쪽에서 저쪽까지 파놓고 그좁은길를 달려서 가는데 끝까지 못가고 중간에서 떨어지면 황토흙이라 다치지는 않지만 구렁밑(고총굴)에서 다시 올라와야 하지요 이런놀이를 한것을 본기억이 어럽프시 나요.
그당시 우리나라는 너무가난하고 못살았으며 흉년들어 보리고개를 만나면 옛말그대로 초근목피 하며 땔감으로 나무 를 사용하여 전국에 산이 큰나무가없는 민둥산이 더러있었어요. 이러한 산들을 정부에서 사방사업을 하는바람에 구렁도 급경사도 없어지고 지금처럼 나무도 많고 좋아젔지요.
가산곡 ... 남가산 큰가산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가산곡이라 하는지 ? 글세요 ! 정확히는 잘몰라요.
항골목... ? 갈갈 ..... ? 정지뚱(정자등)..... ? 불무턱 .....? 새까끔......? 까끔 ~ 은=산 이라고 알고있는데 만는지 안맞는지 잘모르겠어요. 고총굴 .....? 지땅몰랑...? 종굴 ........? 허리찔 .... ? 위치(장소)도 기억이 잘안나요. 엄머리 .... ? 위치(장소) 신대가는 방향 같은데 ?
신대지구 (매안) 의 옛 지명. 지명유래를 아시는 분은 알러주시면 (댓글.전화.글쓰기.지인을통한대화.등) 잘못된것은 수정하고 없는것은 올리겠으니 많은 협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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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염막이라고 했군요.우리 고향에서는 염밭이라고 했읍니다.
그렇읍니다.
소금을 만드는 것을 소금을 굽는다고 하였고 커다란 4각쇠솟에 바다물을 넣고
불을 때서 그 물이 보타지면 소금이 되지요.이 글을 보니 1940년대로 회귀하여
할아버님의 손을 잡고 염밭으로 놀려다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감명스럽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언머리 허리질 고총굴; 언머리-서쪽사장을 지나 비봉실배센 문답 밭뙤기에서 신대방향으로 난 길(두번째그림). 고총굴-그 문답(밭)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향매 방향으로 나가는 길. 길이 동네 뒷산을 휘감아서 향매 앞쪽에서는 집안산과 구: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남. 허리질-문답 밭뙤기를 지나서 지땅몰랑 뒤쪽을 감아서 가산곡까지 이르는 길. 미계(아름다운 골짜기)에서 보면 앞쪽 지땅몰랑의 7부 능선(허리)에 길이 놓여있음. 전지뚱(정자등)-서쪽 사장을 지나 미계(미강서원) 가는 길의 좌측.
향매(행매): '상무지'라고 함. 옛날에 향을 묻어두던 곳에 마을이 생겨 향(상)을 묻어두던 곳(무지). 처음에는 안좋은 뜻으로 알아 들었으나 '향'과 관련있는 말. 예) 조개무지-조개가 묻혀진 곳. 무덤... 갈갈: 서쪽이라는 순 우리말. 항골목: ?. 해나무-회나무(콩과식물로 노목이었음). 회화나무(콩과)로 추정-중국에서는 고관관료들의 동네에 식재했던 고급?수종. 선창(월산)-어른들이 '불무께'라고 많이 불렀음.
미강서원가는 길 이름이 궁금해요. 순천 아랫시장 다녀오시는 어른들 마중 나갈때 우리는 동네 보란(벌안)에서 뛰놀다가 '전지뚱 가자'고 소리치면 모두 서쪽 사장을 지나서 전지뚱과 만나는 길목(여기서 보면 미강서원 좌측 좌야쪽에서 때로는 미강서원 우측 길에서 우리동네쪽으로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어른들이 보임)에서 '장꾼'들을 마중하였음. 가산곡: 가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옥녀봉 우측과 지땅몰랑의 경계 사이를 통하여 남가 및 대가산으로 나아가는 길. 종굴-신대마을에서 향매 방향에 걸쳐 있는 신대 뒷산. 현재는 부영 CC 클럽하우스 이쪽저쪽 부근. 도둑놈 잡으러 간다고 온동네 사람들이 산속 굴까지 간 적이 있음.
철렁: 서쪽 사장 뒤쪽에서 집안 산방향으로 걸쳐진 산 부근을 부르는 말. '철렁'에서도 시제를 모셨음. 연두굴-성산에서 동네들어오는 입구 인 '갓속'을 지나 성산쪽가는 길 좌측 산쪽? 빙기쟁이; 대법 뒷산으로 불무턱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늘 빙지쟁이를 바라보며 하루 해를 보냈다. 창터- 삼동마을 건너쪽에 있는 순천 공동묘지 부근을 이르는 말. 시제를 이쪽 부근 '도실봉'에서도 모셨다. 현재는 주변이 개발되고 있다. 도실봉-'창터'에서 평화방향의 낮은 산.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새로이 철로가 지나서 평화마을 하단부를 관통하고 있다.
종굴입구: 종굴에 나무하러 갈 때는 '언머리' 길을 통해 가다가 중간에(우턴하여) 벌판을 가로 질러서 냇가를 건너서 집이 한 두집 있는 곳(신대쪽에서 보면 향매가는 쪽 냇가 둑 좌측). '연푸쟁이'라고 불렀는지? 2~3 집이있고 막걸리 파는 집도 있었음. 논물 관리하던 어르신들 모시러 이곳에도 가끔씩 들렀음. '소'(늪지 또는 소택지?); 향매와 신대 사이에 있는 산 아래(향매쪽에 더 가까움) 논때기에 물이 많이 받쳐 늘 물이 차있던 곳. 현재도 부영CC 아래 산 밑 공원부지에 못이 조성되어 있으니 물이 받치는 곳임에 틀림이 없음.
불무턱: 옥녀봉 남서쪽 하단에 형성된 골짜기와 농토(전답)지역을 이르는 말로 위쪽부근에는 한 때 술을 빚는 '술도가'가 있었음. 자주 술 주전자 또는 대두병에 술 사오는 심부름을 하였음. 아래쪽으로는 간척지와 연결됨. 이곳이 순천 택사를 재배하여 조기벼를 재배하는 한 켠. 불무턱에서 '빙기쟁이 고개'를 넘어서 성산(기차역이 있는 송산을 일컬음)으로 넘어감. 빙기쟁이 고개에는 돌무덤을 쌓았고, 동네에서 보아서 제일 외진 곳 중의 한 곳. '꽃밭쟁이'; 불무턱에서 배들이(배덜이, 선월) 가는 방향 어느 부근을 일컫는 말?. 집안산; 선창 뒷쪽과 구렁 사이의 산을 지칭하는 말.
사~장: '사:장'. '사'자를 길게 발음함. 동쪽 사:장과 서쪽 사:장이 있고, 서쪽 사장에는 팽나무가, 서쪽 사장에는 '소사나무(또는 서어나무류)류가 심어져 나무 위에 올라가 눈감고 '나무잡으리' 놀이를 많이 함.' 삥뽕'; 루를 만들어 놓고 작은 공을 손으로 쳐서 루를 밟고 한 바퀴 돌면 점수를 획득, '전화잡으리', '진(찐)돌이'; 양팀을 나누고 양쪽에 진(나무)을 정해 놓고 잡은 사람을 진에서부터 손을 잡고 늘어서서... '술래잡기', '섬뛰기', 똥딱기(잣치기), '오징어 잡으리'... 도레버즘; 온 동네를 무대로 요즈음 TV에 나오는 '런닝맨'의 효시. 이웃마을까지 무대를 넓혀 하는 놀이. 동네 아이들이 단체로 하는 놀이문화가 많았음.
'뒷째'; 동네 서쪽사:장에서 동쪽 '철렁'에 이르는 동네 뒷산을 이르는 말. 겨우내 토끼몰이 할때는 1차로 집안산에서 몰이꾼이 토끼를 몰아오고, 구렁에서 지킴이들이 한 줄로 서서 몰아오는 토끼를 다시 몰아 넣거나 '가격' 함. 토끼가 방어선을 뚫고 고총굴, 언머리 방향으로 도망가면 서쪽 사:장쪽 뒷째에서 동쪽방향으로 다시 토끼몰이를 함. 하루 두 세번 하다가 귀가. 2~3일간 연속 토끼몰이 하면 토끼도 지침. 토끼가 언머리를 지나 지땅몰랑으로 달아나면 '가산곡'에서 역방향인 '전지뚱' 방향으로 토끼를 몰았음. 작전범위가 넓어서 지땅몰랑까지는 잘 쫒지는 않았음. 동네 청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 주로 참가.
'구:렁 방어선'; 토끼는 앞발이 짧아서 위로 잘 뛰어가므로 위쪽에서 낮은 아래쪽으로 토끼몰이를 함. 집안 산쪽에서 '구:렁'으로 토끼몰이를 하는데 토끼가 얼마나 영리하던지, 좀 엉성한 아이를 뚫고 방어선을 빠져나감. 방어가 뚫린 아이는 동네 형들한테 야단맞음. 종굴나무; 동네 주변에서 나뭇거리가 다 떨어지면 그래도 '종굴'로 나무하러 감. 종굴에는 소나무 낙엽(이것을 '참가리'라고 함)을 긁어 한 망태 긁어 담아 '뒷뜰(매안 초등학교 정원이름을 '매안뜰'이라함)'을 건너오다가 '상감'이 나타나면 망태를 내동댕이 치고 종굴 산으로 냅다 달아났지요.^^ 어른들은 이른새벽 조례동 NC백화점 넘어서 서면으로 먼산 나무 다녀오심.
매안 골목길: 갓속에서 내리뻗은 한길이 마을 하단에 포물선을 그리며 선창으로 뻗음. 마을 하단 길에서 4개의 골목길이 수직방향으로 뻗어 있고, 하단 길의 중심에 회관. 4개의 골목길에서 곁 소골목이 다시 나눠짐. 갈갈골목 곁골목-영일님 집에서 시작, 그 뒤쪽 우측 소골목으로 들어서면 배성호님, 광문님 집. 항골목-회관 주변에 내상아제(베틈을댁) 밭퇴기가 하나 있고, 좌측 곁골목으로 곽씨, 배씨, 강씨네집, 조금 가서 우측으로 신대댁, 신산댁, 행전댁(오른쪽은 황올댁작은집, 배광호님댁, 맨끝이 황올댁-연호 님댁). 가운데로 ㅇ 가운뎃골목-일자로 뻗어있고 맨끝 우측이 주암댁, 좌측끝은 대밭사이로 세몰댁, 가운데끝집은 곽씨네...
동쪽골목: 회관에서 출발하면 좌측 소골목에 동조아제(나중 평촌아제댁), 당몰댁. 원 동쪽길이 시작하면 우측으로 강천댁(나중에 마란댁), 대추쟁이댁, 기생미댁, 양센댁, 봉전댁, 움팽아제댁. 좌측으로 서정아제, 겜실댁 지나 좌측 소골목에 도장굴댁. 맨위가 내동댁, 동쪽 사장에는 닥실댁, 이씨, 곽씨네.. 중간에 새로 지은 집도 있고 새로 이사한 집도 있지만 이런식으로 복귀가 가능합니다. 동네 어른들 뵈면 동네 버스길 이전의 1950~60년대 버젼 구성도 가능할 것 같네요~ 옥녀봉 중하단으로 뻗어있는 옛날 길 이야기도 찾아보고요...
고맙습니다.
고향은 없어저 볼수는 없지만
그림이라도 그려보는데 큰도움이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못된것은 지적하여 주시고
빠지거나 틀린것은 바로 잡아주시기 바람니다.
고맙습니다.
성산넘어간고개를 가쏙이라 한것 같아요
가쏙(갓속): 그전에 쓰던 말들은 구전이라 옮기기가 쉽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항골목에 회나무도 언젠가 나무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들어보니 중국에서는 양반 동네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님들께서 회화나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