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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1일, 대전구장에서 빙그레의 역사적인 첫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MBC 청룡. 경기 내용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개막전 선발로 내보낸 장명부가 5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것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6회부터 나온 한희민의 호투는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빙그레 타자들은 하기룡-김용수-유종겸-오영일-김태원 등 주력 투수를 총동원한 MBC를 상대로 막판 맹추격전을 벌였다. 빙그레로서는7-8 한 점 차까지 따라붙은 9회말 무사 2, 3루에서 4, 5번 타자가 삼진과 범타로 물러난 것이 아쉬웠다. 1사 2, 3루에서 김상국이 날린 우익수 플라이 때 3루 주자 이군노가 홈에서 태그아웃되며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초창기 빙그레 이글스의 주축 멤버들. 유승안, 이강돈, 송진우, 한희민이 올스타전을 앞두고 한 자리에 모였다. <출처: 한화이글스>
그해 빙그레는 전기리그에서 12승 42패, 후기 19승 1무 34패를 기록하며 종합 순위 최하위(31승 1무 76패, 승률 .290)에 그쳤다. 경험부족과 세밀한 플레이 미숙으로 인해 29번이나 1점차 패배를 당한게 뼈아팠다. 그나마 후기에는 청보를 제치고 7개 팀 중에 6위를 차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또 영건 듀오 이상군(12승 17패, 평균자책 2.43)과 한희민(9승 13패, 평균자책 3.13)의 활약은 다음 시즌을 기약할 수 있게 했다.
시즌 뒤 열린 신인지명회의에서 빙그레는 2차 2번으로 대구상고-영남대 출신 외야수 이정훈을 얻는데 성공했다. 1987년 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권이 팀당 세 장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삼성이 놓친 이정훈이 빙그레의 차지가 된 것. 이듬해 이정훈은 데뷔 첫 시즌부터 타격 3위에 해당되는 .335의 높은 타율에 2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뛰어난 활약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또 마운드의 이상군이 18승, 한희민이 13승을 따내며 첫 해보다 한층 성숙한 투구를 선보였다. 그 결과 빙그레는 전기리그에서 24승 2무 28패로 청보에 한 계단 앞선 6위, 후기에서도 23승 2무 29패로 청보와 공동 6위에 오르며 창단 2년 만에 탈꼴찌에 성공했다.
창단 두 번째 시즌을 마친 빙그레는 3년 계약기간이 끝난 배성서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OB-삼성을 거친 김영덕 감독을 새 사령탑에 선임했다. 김영덕 감독은 프로 출범 이전에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낸 인연이 감독 선임에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기에 1984년 롯데 우승을 일궈낸 강병철 감독까지 타격 코치로 가세했다. 각자 우승 경험을 지닌 새 코칭스태프는 동계훈련 기간 동안 빙그레 선수들을 혹독하게 담금질했다. 특히 항상 지적되던 약점인 수비력과 주루플레이를 집중적으로 가다듬었다. 기존의 이재환 코치는 김대중, 이동석, 한용덕, 장정순 등 신예급 투수들을 짧은 시간 안에 마운드의 주력으로 끌어올렸다.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1988년, 빙그레는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해태와의 첫 맞대결에서 전승을 거두는 등 시즌 초반 단독 1위를 질주했다. 전기리그 최종 성적은 34승 20패로 해태에 반게임차 뒤진 2위, 후기리그에서도 28승 1무 25패로 해태-삼성에 이은 3위에 올랐다. 시즌 종합 성적 62승 1무 45패 승률 .579로 창단 3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플레이오프에서도 강호 삼성을 3전 전승으로 제압하고 단숨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코칭스태프의 뛰어난 지도력, 베테랑과 신예의 조화, 마운드의 확실한 원투펀치의 존재, 정교함과 파워가 조화를 이룬 타선 등이 빙그레 돌풍의 비결이었다. 여기에 더해 구단에서도 선수들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승리 수당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생 빙그레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제물로 삼기에는, 해태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는 해태 선수들은 큰 경기 경험에서 빙그레 선수들을 압도했다. 게다가 삼성 감독 시절 최동원, 선동열을 상대로 첫 경기에 에이스 김시진을 투입했다가 실패를 맛본 김영덕 감독은 1차전 선발로 에이스 한희민이 아닌 이동석을 대신 내세웠다. 결과는 선동열에 14개의 탈삼진을 헌납한 끝에 0-2의 완패. 경험이 부족한 빙그레 선수들에게는 1패를 먼저 안고 시작하는 게 너무도 큰 부담으로 느껴졌다. 빙그레는 2차전에서 뒤늦게 한희민을 투입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초반부터 난타당하며 5-6으로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3차전도 해태에게 내준 빙그레는 4, 5차전을 연속으로 잡으며 잠시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6차전에서 해태 문희수의 호투에 막히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해태와의 악연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듬해인 1989년 빙그레는 6할 대 승률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 창단 첫 우승의 꿈에 부풀었다. 해태와 만난 한국시리즈도 1차전 이상군의 역투에 힘입어 승리하며 우승에 한발 더 다가서는 듯했다. 하지만 2차전에서 실책 3개를 저지르며 역전패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내리 4연패, 2년 연속 해태의 헹가래를 지켜봐야 했다. 2년 뒤인 1991년에는 더 비참했다. 그해 빙그레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 해태와 3번째로 우승을 놓고 대결했다. 하지만 단 1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4전 전패, 3번 한국시리즈 진출해 3번 모두 해태에 우승을 내주는 비극을 경험했다. 창단 초기에 찾아온 여러 번의 우승 기회가 하필 해태의 최전성기와 일치했던 것이 빙그레에게는 너무도 불운이었다.
1991년 한국시리즈를 기념해 발행된 공중전화카드. 1990년대 초 프로야구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팬서비스가 많았다. 야구장에서는 선수 카드를 판매했고, 스포츠신문은 매년 개막 때면 전 구단 모든 선수 프로필이 나온 가이드북을 부록으로 발행했다.
<출처: 한화이글스>
당시 빙그레에서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빙그레와 해태의 우승 경험이 승부를 갈랐다”고 평가한다. “빙그레 선수들은 아마추어 시절 우승을 많이 경험해본 선수들이 아니다. 자수성가라고 할까, 프로에 와서 열심히 연습한 끝에 스타 반열에 오른 선수들이 많았다. 반면 해태 멤버들은 중고등학교, 대학 때부터 수없이 우승을 경험한 스타 출신들이 많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하지 않나. 한국시리즈도 결국은 (우승을) 해 본팀이 잘 하더라.”
1992년, 빙그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전력으로 네 번째로 한국시리즈우승에 도전했다. 정규 시즌에서 빙그레는 최강이었다. 마운드에서는 송진우(19승), 정민철(14승), 이상군(10승)이 펄펄 날았고 한용덕(9승)도 힘을 보탰다.
‘악바리’ 이정훈이 .360의 타율로 타격왕 2연패에 성공한 것은 물론, 장종훈은 41홈런으로 역대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20홈런을 넘기는 타자가 극히 드물었던 시절에 나온 기록이다. 여기에 이강돈, 강석천, 강정길 등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빙그레 타선은 모기업의 주력사업(화약)에 빗댄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92년 시즌 최종 성적은 81승 2무 43패. 2위 해태와 무려 10.5게임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1위였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상대는 천적 해태 대신 정규시즌 3위인 롯데자이언츠. 3전 4기 우승을 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삼성과 해태를 연파하고 올라온 롯데 선수들의 기세는 무서웠다. 반면 장기간 휴식을 가진 빙그레 선수들은 시리즈 초반 좀처럼 경기 감각을 찾지 못했다. 빙그레는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송진우가 기대 이하의 피칭을 하며 6-8로 패했고, 2차전에서도 잘 던지던 정민철을 빼고 9회 송진우를 구원으로 투입했다가 패배를 당했다. 3차전을 어렵게 잡아내며 시리즈 전패는 면했지만 4차전은 염종석에, 5차전은 박동희에 당하면서 또 한 번 ‘준우승 징크스’에 울어야 했다.
계속된 우승 실패의 후유증일까.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선수들의 집단 부상과 슬럼프로 정규시즌 5위에 그쳤다. 장종훈과 이정훈의 부상과 큰 기대 속에 입단한 신인투수 구대성의 부진이 뼈아팠다. 여기에 오랜 기간 에이스로 활약한 한희민이 구단과의 갈등 끝에 삼성으로 이적하며 마운드에 공백이 생겼다. 빙그레 팬들에겐 데뷔 2년차를 맞은 정민철의 활약(13승, 평균자책 2.24)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팀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에 빙그레는 1993년 11월 9일, 구단 이름을 모그룹과 같은 ‘한화’로 변경하고 제 2의 창단을 선언했다. 팀명 변경과 함께 유니폼은 종전의 주황색에서 빨간색으로 교체됐고 CI와 로고도 전부 변경됐다. 또한 김영덕 감독 후임으로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을 영입하고, 유승안-이충순을 코치로 임명하며 코칭스태프 개편도 단행했다.
한화 이글스 로고와 마스코트. <출처: 한화 이글스>
강병철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화는 5년 동안 두 차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그쳤다. 1994년과 1996년에 두 차례 정규시즌 3위를 차지했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1995년에는 6위, 1997년과 98년에는 7위까지 추락했다. 전성기 팀의 주축으로 활약한 이정훈, 이상군 등이 일제히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하락세를 보인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에 1994년 길배진, 1995년 신재웅 등 1차 지명 선수가 거듭 실패하면서 세대교체 작업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6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향후 팀의 새로운 주축이 될 선수들을 대거 지명했다는 점이었다. 그해 한화는 신인 지명에서 이영우, 송지만, 김수연, 임수민, 이상열, 심광호, 홍원기 등을 선택하며 세대교체의 물꼬를 트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마운드에서는 기존의 송진우와 정민철이 좌우 에이스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데뷔 첫 해 실망스러웠던 구대성이 ‘대성불패’로 거듭났다. 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어느 정도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쯤 끝이 날지 기약이 없는 리빌딩에 지친 탓일까. 올스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7월 9일 광주구장에서 한화 구단은 강병철 감독에게 해임을 통보했다. 이로서 강병철 감독은 2011년 현재까지한화 구단 역사에서 유일하게 계약 기간을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사령탑으로 남게 됐다. 남은 시즌은 천안북일고 감독 출신의 이희수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마무리했다. 한화는 시즌 뒤 이희수 대행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999년. 양대리그가 출범한 이 해 한화는 정규시즌에서 매직리그 2위를 차지하며 3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이어드림리그 1위 두산을 플레이오프에서 4전 전승으로 물리친 뒤, 한국시리즈에서도 롯데를 4승 1패로 누르고 창단 14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1992년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한 것은 물론, 지긋지긋한 준우승 징크스까지 끊어낸 통쾌한 우승이었다. 구대성은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1승 3세이브를 따내며 MVP를 수상했고, 정민철도 선발 2승으로 마운드를 굳건히 지켰다. 타선에서는 노장 장종훈이 27개의 홈런을 치며 중심을 잡았고, 외국인 타자 듀오 데이비스와 로마이어가 75홈런-215타점을 합작했다. 세대교체의 주역인 이영우, 백재호, 송지만, 임수민 등도 각자 제몫을 다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1999년 한 해 ‘반짝’한 뒤 이듬해부터 한화는 다시 긴 암흑기를 맞았다. 우승 다음해인 2000년, 한화는 3할 타자 세 명-20홈런 타자가 5명이나 되는 타선을 갖고도 시즌 7위로 추락했다. 급격한 마운드 붕괴가 원인이었다. 1999년 18승을 기록한 에이스 정민철의 일본 진출과 전해 14승을 거둔 이상목의 공백으로 투수진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생긴 것. 여기에 시즌 중 외국인 선수 로마이어의 항명 사건 등으로 팀 분위기까지 엉망진창이 됐다. 결국 한화는 시즌 뒤 이희수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대신에 이광환 전 LG 감독을 새 사령탑에 임명했다. 여기에 최동원, 윤동균, 배대웅 등 오랜 기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던 코치들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이전까지 한화와는 별다른인연이 없던 외부 지도자들을 대거 영입한 것.
하지만 이광환 감독의 한화는 시작부터 큰 악재를 만났다. 마운드의 기둥 구대성이 2000년 12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갑작스런 구대성의 공백에 한화는 이듬해인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다. 외국인 투수 누네스, 워렌과 조규수 등이 돌아가며 뒷문을 막아봤지만 어느 하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탄탄한 마무리는 이광환 감독이 주창한 ‘스타시스템’을 위한 최우선 조건이다. 여기에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과 체력저하도 한화의 발목을 잡았다. 한화는 2001년에는 61승 4무 68패를 기록하며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59승 5무 69패로 전체 7위로 더 내려앉았다. 특히 주포 장종훈이 생애 최악의 성적(타율 .248에 12홈런)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는 게 심상치 않았다.
대전구장에 설치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탑. 한화 창단 초기의 독수리 마크가 선명하다.
<출처: 손윤>
2002년 11월 6일, 한화는 제6대 감독으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유승안을 선임했다. 한화의 첫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사령탑이 된 유승안 감독은 이미 1999년 시즌 중반 건강 문제로 자리를 비운 이희수 감독을 대신해 잠시 감독 역할을 한 경험이 있었다. 2001년 당시 구단 내에서는 내부승격 형태로 감독에 임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한화는 곧장 감독으로 앉히는 대신 해외연수를 권유했고 유 감독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승안 감독은 취임과 함께 ‘리빌딩’을 단행했다. 팬들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장종훈 대신 신예 김태균을 중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수비와 타격 정확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범호를 붙박이 3루수로 기용했다. 두 선수는 2004년 이후 한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로 성장했다. 마운드에서도 노장들에게 기대는 대신 안영명, 박정진 등 신예들의 비중을 높였다. 투수를 교체할 때 마운드에 직접 나가고, 일명 ‘유승안 시프트’로 알려진 파격적인 수비대형을 구사하는 등 미국야구에서 배운 노하우를 활용하려는 노력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리빌딩이 성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 한화는 2003년 5위, 2004년 7위에 그쳤다. 시즌 뒤 한화는 계약기간이 끝난 유승안 감독의 후임으로 김인식 전 두산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한화 이글스는 1985년 창단 이래 수많은 레전드급 스타를 배출하며 숱한 영광과 환희의 순간을 만들어 냈다. 사진은 대전구장 내에 설치된 구단 역사 전시물. <출처: 손윤>
‘덕장’, ‘믿음의 야구’ 등의 수식어가 대변하듯 인화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김인식 감독은 한화에 딱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김 감독은 부임 첫해인 2005년 한화를 정규시즌 4위에 올려놓은 것을 시작으로 2006년에는 시즌 3위로 시작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7년에도 정규시즌에서 전년도와 같은 67승 2무 57패를 기록하며 3위에 올랐다. 한화로 팀 이름이 바뀐 뒤첫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달성한 것이다.
특히 김인식 감독은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처럼 재기가 불투명한 노장 선수들을 데려다 요긴하게 활용했다. 문동환, 권준헌, 최영필, 지연규, 조성민 등이 김인식 감독의 믿음을 복용하고 부활에 성공한 선수들이다. 일각에선 노장들을 영입하는 바람에 팀의 세대교체가 늦어졌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김 감독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화 구단이 2000년대 이후 전력보강을 위해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은데다, 2군 전용구장이 없는 팀 사정상 젊은 선수를 키우는데도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2006년 류현진이라는 괴물신인의 등장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동산고를 졸업하고 입단한 좌완 류현진은 신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피칭을 선보이며 데뷔 첫해 다승, 평균 자책, 탈삼진 3개 부문에서 전부 1위에 올랐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신인왕-MVP 동시 수상이자 팀 역사상 세 번째 신인왕의 탄생. 류현진은 이후 2011년 까지 6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이렇다 할 전력보강이 없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김인식 감독의 한화는, 2007년 3위를 마지막으로 한계에 도달했다. 이듬해인 2008년, 한화는 전체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김인식 감독 부임 후 처음으로 가을야구 도전에 실패했다. 송진우, 구대성 등 노장 투수들이 급격한 노쇠화 현상을 보였고 안영명, 박정진, 양훈, 김혁민, 유원상 등 젊은 투수들은 성장하는 대신퇴보했다. 기대했던 재활공장의 신제품 출시도 없었다. 2009년에는 아예 팀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주포 김태균이 시즌 초반 뇌진탕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게 결정적이었다. 여기에 외국인 선수 디아즈와 에릭 연지도 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화는 46승 3무 84패로 빙그레 창단 첫해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8위)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0.346의 승률은 창단 첫 해 승률(.290)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나쁜 승률이었다. 5.70의 팀 평균자책은 빙그레 시절까지 포함해도 최악의 기록이었다. 한편 2009년 시즌을 끝으로 ‘레전드’ 송진우와 정민철이 은퇴를 선언했다. 한화 구단은 두 선수의 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21번과 2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렇게 한 시대가, 역사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화는 장종훈(35번), 정민철(23번), 송진우(21번)의 은퇴와 함께 그들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사진은 대전구장에 설치된 영구결번 설치물. <출처: 손윤>
다시 한 번 팀을 재건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2009년 말, 한화는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한대화 전 삼성 수석코치를 3년 계약으로 영입했다. 신임 한 감독은 한밭중-대전고 출신이자 과거 OB가 대전을 홈으로 쓰던 시절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지역 대표 스타. 하지만 한 감독은 취임 선물을 받기는커녕, 무너진 투수진과 김태균-이범호가 빠져나간 타선이라는 ‘폭탄’을 떠맡아야 했다. 게다가 2010년에는 시즌 중에 주전 3루수 송광민이 입대하는 악재가 터졌고, 시즌 뒤에는 김태완과 정현석까지 군입대 대열에 합류했다. 여기에 한국 복귀를 선언한 이범호가 친정 한화가 아닌 KIA 유니폼을 입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거듭되는 악재 속에서도 ‘한대화 이글스’는 선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2010년)는 49승 2무 82패(승률 .368)로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쳤지만, 2011년 시즌에는 구단 운영진이 교체된 5월을 기점으로 무서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한때 4강 진입까지 노릴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최종 성적은 59승 2무 72패로 LG와 공동 6위. 2년 만의 탈꼴찌도 기쁜 일이지만, 무엇보다 잃었던 대전 팬들의 사랑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전드’ 출신 투수코치들의 지도를 통해 김혁민, 양훈, 안승민 등 젊은 투수들의 기량이 급성장한 것도 반가운 부분이다. 한대화 감독은 팬들이 붙여준 ‘야왕’이란 별명과 함께 야구팬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선수단의 기대 이상 분전에 구단도 적극적인 투자로 화답하고 있다. 한화는 한때 인색한 투자와 무능력한 일처리로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올해 초 구단 수뇌부가 물갈이된 뒤에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특히 구단주가 빙그레 창단 초기에 못지않은 관심과 의욕을 야구단에 보이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한화는 지난해 신인드래프트 1순위 유창식에 7억, 올해 1순위 하주석에 3억의 계약금을 안겼다. 리빌딩을 위한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시즌 막판 ‘5위 달성 시 3억 원 지급’을 내거는 등 선수단에 동기 부여를 위한 당근도 빼놓지 않았다. 지난 7월에는 대전구장과 2군 전용 훈련장의 증축을 확정하며 팀의 미래를 위한 시설투자에도 나섰다. 독수리의 화려한 날개 짓이 다시 시작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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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탑이 있는 줄 몰랐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