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의 개혁 사업
https://youtu.be/F9cWSxKpzPI
네덜란드는 매우 초기부터 교황의 폭정에 대하여 단호한 항의를 해 왔다. 루터가 등장하기 7백 년 전에 로마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두 감독이 교황청의 참성격을 알게 되자 그들은 두려움 없이 다음과 같이 로마 교황을 규탄하였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양의 목자가 되는 대신에 이리가 되었다. …당신 스스로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대는 종들의 종이 되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만주의 주가 되고자 애쓰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하고 있다.”
https://youtu.be/JSaDWCQdKbs
여러 세기 동안 또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러한 항의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왈덴스인들이 번역한 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성경은 매우 큰 유익을 준다. 여기에는 농담과 우화와 거짓과 천박한 말이 전혀 없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이 있다.”라고 하였다. 신앙의 선구자들은 이미 12세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로마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신자의 수는 계속하여 증가되었다. 그들은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어떤 사람도 믿음을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복음 전파로 신자를 얻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거기서 열성 있고 충성된 사람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육을 받고 신부로 임명된 사람이었으나 성경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뿐 아니라 이단에 미혹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읽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탕한 삶으로 양심의 소리를 무시해 보려 했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신약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고, 루터의 저서를 읽으며 개혁파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사람이 재침례를 받은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그는 유아 세례에 관하여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유아 세례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그는 회개와 믿음이 침례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노는 로마 교회를 버리고 자기가 받아들인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광신자의 무리가 일어나 비합리적이요 선동적인 교리를 주장하며 사회를 어지럽히고 또한 폭동을 일으켰다. 메노는 광신자들의 그릇된 교리와 무모한 방법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그는 25년간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을 다니면서 주로 하층 계급을 상대로 활동하였으며 그 감화는 멀리까지 미쳤다. 그는 성실과 겸손, 친절한 태도와 진실하고 열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삶으로 실천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였다.
독일에서는 카알 5세가 개혁 사업을 금지하였으나 제후들이 그의 폭정을 막아섰다. 네덜란드에서는 그의 세력이 더욱 강력하였으며, 박해의 명령이 연이어 신속히 이어졌다. 성경을 읽는 것, 그 말씀을 듣거나 전하는 것,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 심지어 시편을 노래하는 것도 사형당할 이유가 되었다. 카알과 필립 2세의 치하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번은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하였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종교 재판관들 앞에 끌려 나온 일이 있었다. 은밀히 기도한 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때 제일 어린 아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왕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왕의 통치가 번영하고 그의 일생이 행복하기를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정부의 관리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재판관들 중 몇 사람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 중 한 사람은 화형 선고를 받아야만 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연약한 부인들과 소녀들까지도 굽히지 않는 용기를 보였다. “아내들은 남편들이 달려 있는 화형주 곁에 서서 불에 타고 있는 남편들에게 위안의 말을 들려주거나 시편을 노래로 불러 주었다.” “어린 처녀들은 마치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처럼 산 채로 조용히 무덤에 들어가 누웠고 혹은 결혼식에 나가는 신부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수대나 화형장으로 나아갔다.”
박해는 진리의 증인들의 수를 오히려 증가시킬 뿐이었다. 백성의 확고한 태도에 분노한 왕은 해가 거듭될수록 개혁자들을 더욱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나 개혁 사업을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윌리엄이 이끄는 혁명으로 네덜란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덴마크의 개혁 사업
스위스 피에몽의 산간, 프랑스의 평원, 네덜란드의 해변 등지에서 복음은 신자들의 피로써 전파되었다. 한편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평화롭게 복음 사업이 시작되었다. 비텐베르크의 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개혁주의를 스칸디나비아에 전하였다. 루터의 저서가 발행되자 진리의 빛을 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미신과 사치와 부패에서 벗어난 강인한 북유럽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성경의 진리를 환영하였다.
“덴마크의 개혁자” 타우젠(Tausen)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탁월한 지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순결한 생애로 수도원장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장차 교회를 위하여 유력한 봉사를 할 수 있는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그 청년 학도는 독일이나 네델란드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단설에 감염될 수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에는 갈 수 없다는 한 가지 금지 조항이 있었다.
타우젠은 로마 교회의 가장 강력한 요새들 중 하나인 쾰른(Kö ln)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신비주의에 빠진 학생들에게 곧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루터의 저서들을 얻게 되었고, 놀람과 기쁨으로 그 저서들을 읽었으며, 그 개혁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수도원장이 보내 주는 지원이 끊길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결심하고 즉시 비텐베르크 대학에 등록하였다.
이후 덴마크로 돌아간 그는 다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자기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친구들을 보다 순결한 신앙과 고상한 생애로 인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성경을 펴서 죄인에게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다. 로마 교회의 유력한 옹호자가 될 것으로 그에게 큰 기대를 가졌던 수도원장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다른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홀로 방에 갇히게 되었다. 독방에 갇혀 있던 타우젠은 창문 틈으로 수도원의 동료들에게 진리의 지식을 전하였다. 덴마크의 신부들이 로마 교회가 이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면 타우젠의 음성은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두는 대신 수도원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를 더 이상 방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마침 그때 새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보호하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는 그를 환영하였고,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또한 다른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덴마크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로마 교회가 그들을 방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개혁자들의 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갔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이기로 선포하였다.
스웨덴에서의 개혁 사업 발전
스웨덴에서도 비텐베르크에서 온 청년들이 자신들의 고향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다. 스웨덴 종교 개혁 운동의 두 큰 지도자 올라프 페트리(Olaf Petri)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문하에서 배웠다. 올라프는 루터처럼 열성과 웅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각성하였고, 라우렌티우스는 멜란히톤처럼 사려 깊고 침착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은 무지하고 미신적인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올라프 페트리는 자주 폭도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간신히 생명을 건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 개혁자들은 왕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교회의 통치하에 빈곤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압제에 눌려 지냈다. 정치 세력들은 서로 분쟁하며 당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왕은 국가와 교회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와 싸우기 위하여 유능하고 용기 있는 조력자들을 환영하였다.
스웨덴의 군주와 지도자들 앞에서 올라프 페트리는 로마 교회의 지지자들에 대항하여 개혁주의 교리를 높이 들었다. 그는 교부들의 교훈이 성경과 일치할 때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믿음의 필수적인 교리가 성경에 분명하고 단순하게 계시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 교리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법령도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될 때는 아무런 권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개혁주의의 대원칙인 “성경,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임을 확고하게 나타내었다.
이러한 주장은 개혁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은 무지한 무리가 아니었고 종파심이 강하거나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들이 가진 성경의 무기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들은 시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학자요 신학자였으며 복음의 진리 체계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고, 궤변 학파의 학자들과 로마 교회의 주교들을 성경으로 정복한 사람들이었다.”
스웨덴 왕은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얼마 후에 국회도 개신교회를 찬성하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이 올라프 페트리에 의해 스웨덴어로 번역되었으며, 왕의 희망에 따라 그 두 형제는 성경 전체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리하여 스웨덴의 국민은 비로소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국회는 성직에 있는 사람들이 국내 어디서나 성경을 해석해 주도록 하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성경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무지와 미신의 암흑은 복음의 빛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로마 교회의 압박에서 해방된 그 나라는 지금까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힘과 탁월함을 소유하게 되었다. 1세기 후 스웨덴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30년 전쟁의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있는 독일을 구하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은 유럽의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북유럽 전역이 다시 로마 교회의 핍박 아래 들어갈 것처럼 보이던 위기의 때에 스웨덴 군대의 도움으로 독일은 교황권의 횡포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루터교도와 칼뱅파는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