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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면의 폐사지(廢寺址) / 금산
산북면의 폐사지(廢寺址) / 금산
[원고분량 : 200자원고지 41.8장]
1. 영원사지(鴒原寺址), 죽림사지(竹林寺址)
1)위치 및 유래
사지의 주봉은 산북면 서중리 서쪽 약 1㎞지점에 위치한 월방산(月芳山, 360𝑚)이다. 동향하여 내려온 지맥은 우암대(愚巖臺)를 북에 두고 남진하여 웅창마을을 에둘러 금천(錦川) 변에 웅암(熊巖)을 이루고, 그 뒤로 나지막한 산봉우리 마루금에서 동향하여 완만한 경사면을 이룬 주암(舟巖)이 금천과 접하는 곳을 제외한 3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서중리 56, 57, 65, 66, 67번지 일원의 약 12.000㎡가 옛 영원사(鴒原寺) 와 죽림사(竹林寺)의 사지(寺址)이다. 사찰의 창건연대 및 유래 등은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사지에 남아 있던 3기의 3층석탑 양식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일설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2)사명(寺名)의 고증(考證)
·도천사지(道川寺址) 說
상주 및 문경지역 고문헌과 기타 문헌에서도 사명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다만 폐사지에 창건했던 죽림서당(竹林書堂)과 지방 유림들의 모임인 산양수계소(山陽修稧所)를 1603년(선조 36)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도천사[道川祠 : 1758년 창건, 군수(郡守) 황정간(黃廷幹), 찰방(察訪) 신경(申熲), 진사(進士) 황상중(黃尙中)을 배향(配享)하다가 1870년 조령에 의해 훼철](출처:상산지, 1928년 무진본)라는 사우(祠宇)가 있어 사람들이 사(祠)를 사(寺)로 잘못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영원사지(鴒原寺址)
1984년 간행 근암서원지(近嵒書院誌)에 따르면, 산양지역 최초의 서당인 '죽림서당' 건립은 1552∼1554년 중에 상주목사 신잠이 창건하였으며, 그 위치는 서중리 웅창마을 '영원사 옛터'라고 하였다. 부훤당 김해의 '영빈서당이설기(潁濱書堂移設記)'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두리 진사 황범주의 한시 '금천팔경'에도 '영원고탑(鴒原古塔)'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영원사(鴒原寺) 고탑도매(古塔盜賣)사건 경찰수사기록(1916. 8. 19.) 및 동년 9월 20일 수사후기에도 옛 영원사 고탑이 기술되어 있다.
·죽림사지(竹林寺址)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의 청대구곡(淸臺九曲) 제3곡을 죽림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근암서원(近嵒書院)의 발상지인 죽림서당이 이곳에 있게 된 연유 등으로 미루어 죽림사란 사찰이 인근에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정확한 사명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일제강점기인 1916년까지만 해도 도천사(道川寺)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4~5개의 기록과 지역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원사(鴒原寺)가 있다가 폐사되었고, 뒤에 죽림사라는 사찰도 인근에 개창되었다가 이 또한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이들 사찰의 자세한 연혁은 각종 문헌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3)유적 유물 및 기타
·도천사지 3층석탑 3기
원래 소재지는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56·57번지 및 65·66·67번지 일원이다. 현재는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 직지사 경내 대웅전 앞에 2기(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에 1기(보물 제607호)가 따로 서있다. 원래의 배치 양식과 전혀 다르다.
·이전 경위
1974년 김천 직지사 주지 오녹원(吳綠園)이 도괴(倒壞)된 상태에서 흩어져 있던 석탑을 도청의 허가를 받아 모두 반출하였다. 이때 마을에 시멘트 500포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상태
1976년 멸실되었던 상륜부가 복원되었으며, 직지사 대웅전 앞 2기는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06호(1976. 11. 30. 지정)로 명명되었고, 비로전 앞 1기는 문경도천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607호(1976. 11. 30. 지정)로 명명되었다. 탑의 높이는 모두 5.3𝑚로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제51호, 1963. 1. 21. 지정) 양식과 동일하다.
·배치 양식
신라시대에는 1금당 1탑 양식이 보편적이며 통일신라시대에는 1금당 동·서 양탑 양식이 유행하였으나, 1금당 3탑 양식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배치 양식으로 학계에서도 관심있게 보고 있다. 이 지역이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3탑 양식으로 꽃피어나서 삼국을 통일한 기념비적인 상징물은 아닐까?
·고탑도매사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창구리 4통 5호 채국진(蔡國鎭)이란 사람이 면내 서중리 수계소(修稧所)와 영원사 폐사지에 유존하는 3기의 석탑을 자신의 소유라 하고, 1916년 1월에 경성 파성관(巴城館) 호텔의 마스모토 다미스케(松本民介)에게 매각하였다. 같은 해 1월 19일 면장에게 석탑의 소유자임을 증명받고 헌병파견소장이 반출을 허가하였다. 그러자 30년 전 폐사지내 건물 부지와 지상 석탑 3기를 60원에 매수한 소유권자 채광진(蔡匡鎭)이 경찰에 고발한 사건이다. 이에 경무총장은 반출하기 위하여 내려 놓은 3기 중 2기를 원상으로 복원하고 매매계약을 해지하도록 했다. 이후로 매매 또는 타인에게 이전하지 못하도록 방지책을 마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헌병경찰 수사기록에 영원사라는 명칭이 보인다. 만약 이때 매매가 성사되어 반출되었다면 일본인의 계략으로 일본까지 밀반출되었을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폐사된 시기
사찰의 폐사 시기 또한 기록이 없어 특정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른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1554년 신잠 상주목사가 상주지역 18개면에 서당을 건립하였고, 그 후 관내 소야리 미면사를 서당에 소속시켜 각종 부역 및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본 사찰이 이때까지 존속하였다면 구태여 먼 곳의 미면사를 소속시켰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또한 이 사찰은 임란 중(1593년) 죽림서당(훗날의 근암서당→근암서원)과 같이 왜구의 병화를 당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뿐이다(출처: "상산지" 사찰조, "부훤당문집" 영빈서당이설기).
2.미면사지(米麵寺址). 백련사지(白蓮社址)
1)위치 및 유래
산북면 전두리 공덕산(914.6𝑚) 남서쪽 4.1㎞ 지점에 있는 거무산(450𝑚)이 거산리와 소야리를 경계로 하고 있다. 거무산 동쪽 사면에 두 개의 소지맥이 분지되고, 그 가운데 작은 분지를 형성하여 동남향으로 계곡이 흐르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소야리 산98번지 일원의 속칭 이민골이다(미면골⟩이면골⟩이민골).
·창건 연대
미면사의 창건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속명 신극정, 1206~1294년, 산양현 출신)의 저서 『호산록(湖山錄)』 「유사불산기(遊寺佛山記)」에, 신라 신문왕 7년(667)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창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불산 대승사 사적비』에도 의상대사가 공덕산 아래에 미면사를 창건하고, 원효대사는 인근 10리인 화장사(華藏寺)에 계시면서 조석(朝夕)으로 상봉(相逢)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폐사지에 남아 있던 불상은 대승사로 옮겼고, 석탑이나 부도의 받침 및 부재는 문경 옛길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보전되고 있어 후일 분석결과에 따라 확실한 고증이 진행될 것이다.
2)사명의 고증
미면사(米麵寺)의 유래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설할 때와 같이 미면사에서 화엄경을 설할 때도 용녀의 수발을 받았는데, 뜰의 양쪽에 있는 우물 한쪽에서는 쌀이, 다른 한쪽에서는 국수가 공양인의 수만큼 적절히 공급되어 미면사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백련사(白蓮社)
고려 고종 19년(1231) 제1차 몽고군 침입으로 폐사에 가깝던 절은 정통사(精通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천태종의 정화결사처가 되어 사찰 명칭이 백련사(白蓮社)로 변경되었다. 특이점은 절사(寺)가 아니고 모일사(社)로 표기한 것이다.
·동백련사(東白蓮社)
1241년 상주목사 최자(崔慈)가 다시 상주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을 주법으로 초청하여 큰 가람으로 발전시켰다. 훗날 강진의 백련사와 구별하여 동백련사로 불렀다고 전한다.
·중수 때의 모습
불우(佛宇), 조당(祖堂), 승료(僧寮), 객실(客室), 허백루(虛白樓), 냉천정(冷泉亭), 신청루(神淸樓 : 樓橋) 등 60여 칸이라고 「유사불산기」에 기록되어 있다.
3)유적 유물 및 기타
부도 2기가 유지에 있었으나 광복을 전후하여 도난당했다. 문경 미면사지 다층 석탑부재 1점, 문경 미면사지 부도받침부재 1점 등 2점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2007년 문경옛길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문경 미면사지 계단식 적석탑 도굴 직후 압수 물건인 청동촉대 1점, 청동반자 1점, 청동반자편, 청동바라 철재보습, 납덩어리 망와, 당초문평와당, 연화문원와당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1980년 1차 도굴시 압수한 물건이다. 이 가운데 청동촉대에는 ‘상주별장 김득현(金得玄) 시주’라는 명문이 있고, 청동반자(청동북)에는 상주사족 김용(金用)의 딸이 시주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그리고 문경 미면사지 계단식 적석탑은 현지에 남아 있다.
·문헌에 있는 기록
1199년 개경의 정통사(精通師)가 구 미면사를 중수하고는 사명을 백련사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최자의 『보한집』 백련사 석대에 붙이는 글에 실려 있다. 1232∼1237년 몽고의 제2차 침입으로 소실 및 퇴락한 모습은, 1241년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이 대승사와 미면사 방문 후 '유사불산기'에 남겼다. 상주목사 최자(崔慈)의 청으로 60여 칸의 불우불사를 이루었다. 최자의 '보한집'과 천책의 '유사불산기'에 실려있다. 전남 강진의 백련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동백련사(東白蓮社)로 개칭한 사실과, 이때까지 의상대사의 설법대, 석장, 삿갓 및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초상화 등을 보았다고 하였다. 1244년(고려 고종 31년) 진정국사 천책이 동백련사의 법사가 되었다. 1247년 몽고의 제4차 침입으로 다시 가람이 쇠락하고, 천책은 강진의 백련사로 돌아가 백련사의 4대 주법이 되었다. 1280년(충렬왕 6년) 천태종 고승 정오왕사(丁午王師)가 10년간 주석(충숙왕 원년인 1315년에 국통으로 책봉된 스님으로 '암거일월기'를 남김)하면서 동백련사는 다시 천태종 승려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1390년 8월 13일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백련시회(白蓮詩會)에 참석(‘목은시고’ 함창읍조, 함창 유배 시절)하여 백련사 석대에 붙이는 글을 지었다. 고려말 요원(了圓)스님의 법화경 영험전에 망명스님에 관한 기록과 함창 김의균의 법화경 독송회에 관한 기사가 있다. 1696년(숙종18) 묘저암 벽천(碧天)스님의 ‘대승사 사적기’에 관음전 정북(正北)에 금당(金堂)을 초창하였다 하였고, 이 금당에는 미면폐사에서 이봉(移奉)한 금불삼존상을 모셨다고 기록하였다. 1705년경에는 지역 세력가인 최씨(崔氏)의 무덤과 재사(齋祠)가 건립되면서 승려들이 흩어졌다. 이때 불상은 대승사로 가고, 토지는 김룡사가 잠시 소유하다가 대승사에 돌려주었는데, 대승사와 근암서원 간에 토지 소유에 관한 소송이 있었다. 소송 문서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이미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748년 ‘상산지’ 사찰조에는 미면사가 기록되어 있다.
·폐사 시기
위의 기록(대승사 사적기)으로 보면 1696년 이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면사지 계단식 적석탑
미면사지에서 계류와 나란히 임도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남동진하여 220𝑚를 하산하면 남서쪽에서 내려오는 다른 계류와 합수점 상단에 위치한다. 여기서부터 도로와의 거리는 420𝑚다. 축조 규모와 양식은 장방형(長方形) 단층 기단에 5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확정할 수는 없으나 출토유물을 분석한 경북대학교 한기문 교수는 1241∼1247년경 백련결사 후원자들이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 붕괴의 경위는 1980년 1차로 금속 탐지기를 동원한 도굴꾼에 의하여 감실과 중요부분이 훼손되었고, 2차로 1994년 건설장비(굴삭기)를 동원한 도굴꾼에 의하여 정상 부위부터 탑의 중심부 최하위까지 형태만 남겨두고 무참히 파손되었다. 현재의 형태는 탑의 중심부과 우물처럼 함몰되어 있고 탑 주변에는 크고 작은 임목으로 가려지고 나무의 뿌리가 탑을 침범하고 있다.
3.화장사지(華藏寺址)
1)위치 및 유래
백두대간에는 대미산이라는 명산이 있으니 남쪽으로 뻗은 한줄기는 여우목고개를 지나 대원령 하늘재를 형성하고, 서남쪽으로는 운달산, 동남쪽으로는 공덕산을 이루어 김룡사와 대승사라는 큰 가람을 품고 있다. 공덕산 동남쪽 지맥은 여석봉(礪石峯: 숫돌봉)에 이르러 동쪽 사면 끝부분에 탑들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니 이곳이 곧 화장사 옛터다. 이곳은 신라시대 초기까지 수주군(현 예천군) 안인현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전조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예천군 화장면 소재지였다가 1906년 대한제국 때 문경군에 편입되어 산북면 내화리가 되었다. 이곳은 우리 면 소재지에서 동북방 5.4㎞ 지점 59번 국도에서 서북 방향 200𝑚에 있다. 뒷면인 서쪽은 여석산(숫돌봉)의 동쪽 사면이 매우 가팔라 사지(寺地)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남쪽은 노루목고개로 면 소재지와 문경시청 쪽으로 나가는 갑문이 되고 동쪽에는 59번 국도가 남북으로 금천(錦川)과 병행하여 흘러내리며 국사봉 줄기의 정침봉이 코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장대처럼 높이 솟았다. 북쪽은 동로 벌재이고 그 아래 천주봉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며 경천댐이 수평을 이루는 곳, 그 한가운데가 바로 화장사 옛터다. “금당 맛질 반서울이요, 화장 칫들 놀기 좋다.”라는 말이 전해오는 이곳의 지번은 산북면 내화리 48-1번지 일원이다.
2)사명의 고증
화장사(花庄寺)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행정단위 명칭이 예천군 화장면(花庄面 또는 化莊面)이었던 관계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화장사(華藏寺)는 산북면 대승사(大乘寺)의 사적기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공덕산(功德山) 아래 미면사(米麵寺)를 창건하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인근 십리 지점의 화장사(華藏寺)에 계시면서 조석으로 상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서 사찰의 명칭을 화장사로 추정하고 있다.
·창건 연대
원효대사(617~686, 진평왕 36년~신문왕 6년)에 대한 주석 기록으로 보아 아무리 늦어도 서기 68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폐사 시기
폐사된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폐사지 인근에는 16~17세기경에 건축된 화산사, 영모재, 존경재의 한옥 축대 계단석 등에 화장사의 건축 부재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3)유적 유물 및 기타
문경 내화리 3층석탑(보물 제51호), 문경의 문화재편(금동제 사리구) 참조.
문경 내화리 3층석탑 도굴 및 회수유물, 금동제 사리함(현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 "산북면지" 878쪽~888쪽, 산북면지편찬위원회, 2016년.
첫댓글 2015년 문경 도천사지(영원사지) 탑지유적 시굴조사보고서 자료(서울 불교문화재연구소, 문경시 공동조사).
1928~1929년 "상산지" 무진본 33쪽 원사조의 '도천사' 기사.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 신라 영원사지, 고려 죽림사지, 조선 산양향약소, 죽림서당, 회로당, 산양수계소, 산양풍헌소, 도천사당, 죽림정사터 및 웅연서원, 산양창 유허지... 현 주암정, 우암정 일원.
1750년 "부훤당문집" 영빈서당이설기의 '영원사' 기사
1899년경 한두리 진사 소산 황범주의 작시 "금천팔경" 중 '영원석탑' 기사
1970년 1월 13일자 한국일보 보도자료 기사
1974년까지 영원사지에 남아있던 신라석탑 3기를 배경으로 한 채훈식씨와 동네친구들의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