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군의 활약
1592년 9월 1일(양력 10.5) 명의 유격遊擊 심유경과 왜는 50일간 휴전에 합의하고 명나라 내란(寧夏之變)이 9월 17일 진압되어 9월 26일 경략經略 宋應昌이 총사령관이 되어 출전을 준비하여 이여송李如松이 원군 대장으로 12월 5일 4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1593년 1월 이여송은 조선군 8천명과 승통僧統 서산대사 休政(청허), 그 제자 유정惟政(송운대사)의 의승군 및 의병 2천명과 명군 43천명 등 조명朝明 연합군으로 고시니 유키나가가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하여 7개월 만에 수복했다
왜적은 16백여 명을 잃고 더 이상 대결하지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뒤따라 서울로 향했고 고바야가와 군과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여 이여송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함경도에 침입한 가토도 서울로 퇴진하였다. 1593년 2월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의승장 처영 등과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과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1593년 2월 21일 한효순 순찰사가 왜적을 차단하기 위해 경주 울산 영천 영일 등 7개군 병력을 지원받아 당교의 왜군 진지를 급습하였다
7일간 전투에 병마절도사 박진, 권응수 비안현감 정대임, 밀양부사 이수일, 양산군수 변몽룡, 용궁현감 허응길, 군교 김호의, 권수예 등의 군사가 모이고 의병은 이름 나이 거주지 등을 기록한 망신순국亡身殉國의 당교회맹에 경주 15명, 영천, 울산 2명, 영일 5명, 창녕, 영해 10명, 장기 2명 자인 2명, 흥해, 예안 9명, 영천 3명, 안동 14명, 경산 2명, 대구 5명, 상주 박원량 김덕룡 황정간 김원진 채득해 권의중 김구령 등 7명, 청하 영덕 청도 거창 고령 선산 의성 진보 예천 삼가 함창 기부흥 남영 등 2명, 의령 합천 현풍 함안 남양 죽산 백천 밀양 경성 등이 박진남의 회암실기에 실려 2월 21일부터 7일간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서 화의를 계속 추진하여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은 왜군은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였다
4월 10일 권의중이 감영에 가다가 신창에서 왜적 수십 명을 참수하고 빼앗은 무기를 감사에게 상납하여 목필木疋 전죽箭竹 어교魚膠를 하사받았다
1593년 4월 20일 왜군이 충주 조령로를 따라 경상도로 철수하면서 4월 29일 상주 선산 등지에 분산 주둔했고 5월 3일 왜적을 보내는 호송사가 당교에 도착했다 5월 6일에는 명나라 장수 발아천총撥兒千摠 송호한宋好漢과 전창田蒼이 접대가 소흘하다고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을 잡아가고 5월 14일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이 상주의 왜적을 쫒아내고 주둔하여 후방보급로 역할을 했다
6월 29일 진주성 2차 전투는 왜군의 보복 공격으로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어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성내의 생물을 모두 죽였다
강원 ·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기다렸다.
1593년 8월부터 이여송의 명군이 철군하고 유정 부총병 등 군사 고문, 훈련 담당 등 소수 인원만 남고 상주에는 명나라 吳惟忠 군대가 주둔했다
9월 21일 임금의 수레가 한양에 들어갔다
화의를 위해 심유경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송응창 막하의 참장參將 사용재謝用梓 유격장 서일관徐一貫을 가짜 사신으로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9월 1일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인질을 동행하지 않았다고 조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명의 책봉사절을 수행한 황신黃愼이 왜의 재침을 11월에 조정에 알렸고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화의는 결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