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09
- 연줄 채용 좌절한 伊 청년들, 20년간 50만명 해외로 떠나
- '백 채용'은 나라 망치는 반칙… 내부 고발제 등 투명성 높여야
'1000유로 세대'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청년들의 좌절을 그린 자전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작가인 안토니오를 6년 전 밀라노에서 만났었다. 그는 명문대인 밀라노 공대 건축학과를 나왔지만, 졸업 후 10년 동안 정규직 일자리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안토니오는 "동기생 중 이름 있는 건축사무소에 취업한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불공정한 채용 문화를 성토했다. 건축 기사로 취업하려면 건축사무소 인턴 경력이 꼭 필요한데, 그 자리는 대부분 유력자 자제들 차지라서 사회 출발점에서부터 취업 기회가 봉쇄된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탈리아 기업들은 공채로 직원을 뽑지 않고 연줄(raccomandazioni)로 뽑기 때문에 든든한 백이 없으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가 불가능하다"면서 "투명성이 전혀 없는 직원 채용 과정이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안기고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 기업들의 '연줄 채용'은 뿌리 깊은 병폐다. 오죽했으면 최고 명문대인 로마 루이스 대학 총장이 "능력보다 연줄이 앞선다"면서 '아들아, 조국을 떠나라'라는 칼럼을 유력 일간지에 게재했을까. '연줄 채용'에 좌절한 이탈리아 청년들은 실제로 조국을 등지고 있다. 지난 20년 새 고학력 청년 50만 명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했다.
유능한 인재를 경쟁국에 빼앗기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최근 5년간 이탈리아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이거나 0%대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불가리, 펜디, 구찌 같은 명품 기업들이 줄줄이 외국 기업에 넘어가고, 국적 항공사 알리탈리아, 타이어 제조업체 피렐리 등 국가 대표급 기업들까지 외국 업체에 팔린 것은 이탈리아 기업들의 경쟁력 상실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탈리아에 1000유로 세대가 있다면, 한국엔 '88만원 세대'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채 저소득에 시달리는 청년들이다. 이들이 '헬조선'을 부르짖는 이유 중 하나는 인턴 채용 과정부터 '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설문조사한 결과, 기업 인사 담당자의 50%가 인턴 채용 시 인사 청탁을 받아본 적이 있고, 청탁이 채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69%에 달했다.
▲ 지난 2월1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이 취업게시판을 들여다보며 구직공고를 확인하고 있다.
최근 기업 채용 비리 사건이 잇따르자, 정부가 '전수조사' 카드를 빼들었다. 공기업뿐 아니라 은행 등 민간 금융회사까지도 최근 5년간 신입사원 채용에 부정 청탁이 없었는지 빠짐없이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어림잡아 10만명이 넘는 신입사원 이력서가 사법기관의 점검 대상이 될 전망이다. 이렇게 해서 채용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기업 인사 부서가 내밀한 청탁 내역을 기록물로 남겨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내부자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업 내 인사(人事)는 경영권 영역이기도 한 만큼 정부가 시시콜콜 들추기보다는 기업들로 하여금 채용 시스템의 투명성을 높이도록 독려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채용 심사 기능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한다든가, 인사 청탁 관련 내부 고발 제도를 도입하고 합격자 서류를 영구 보관토록 하는 방안 등이 대안이 될 법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 스스로 채용 반칙 행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 산업화에서 뒤졌던 한국 기업들이 한참 앞선 선진 기업들을 빨리 추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능력과 성과에 기반한 채용 문화가 한몫을 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경쟁력 확보의 최전선에 있다는 사명감을 갖고 채용 문화의 오염을 막아야 한다.
아울러 권력자, 기득권층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채용 청탁을 금기시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 좋은 일자리가 희소해진 시대에 취업을 둘러싼 반칙 행위는 죄질이 무겁다. 청년 실업이 심화되면서 유능한 청년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자리를 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예사롭게 봐선 안 된다. 이미 이탈리아의 전철(前轍)을 밟고 있는 조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홍수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