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박목월 선생 // 이건청
(동리목월 2021. 여름호)
[목월 선생 댁을 찾아간 까까머리 고등학생]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때였다. 학교에서 문예작품 발표회를 하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 두 분을 초청 연사로 모시게 되었었다. 두 분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뵙고 초청 수락을 받아오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내가 박목월 선생 댁을 찾아 나선 것은 1959년 9월 20일 경이었다. 전화가 귀한 때였고, 편지 연락은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어서 직접 선생 댁을 찾아 나섰던 것. 선생 댁이 원효로 전차 종점 부근이라는 말만 듣고 무조건 원효로 행 전차를 탓고 원효로 종점에서 내렸었다. 원효로 4가 종점. 부근 복덕방을 찾아가 ‘박목월 선생댁’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놀라워라, 복덕방 영감께서 선생댁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이 아니던가.
9월 20일 밤 8시경, 달이 휘영청 밝았었다. 신창동 비탈 길 적산가옥, 거기서 선생을 뵈올 수 있었다. 헤아려 보니 그때 선생 연세 44세. 지금 같으면 이제 시단 중진급에나 속하셨을 연세에, 또, 40세에 겨우 접어들었을 지훈 선생도 한국 시의 원로 자리에 우뚝 정좌하고 계셨음을 알겠다. 이날 밤 까까머리 고등학교 이건청과 목월 선생의 어설픈 만남이 내 생의 명운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문예작품 낭독회는 10월 1일, 남녀 학생 좌석을 분리해서 앉힌다는 조건으로 막을 올릴 수 있었고 이 모임은 그 후 해를 거듭하면서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역량있는 문사들을 배출한 명망있는 자리로 뜻매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었보다 그때 제1회 문예작품 낭독회 준비로 동분서주 하던 문학소년은 후에 박목월 선생의 평생 제자가 되었고, 10 여 년 선생의 시작 지도를 받아 시인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선생 작고 후 한양대 시학교수 자리에 설 수 있게도 되었었다.
이 때의 에피소드 하나. 아마 이날 행사 후 학교측에서 두 분 선생께 약간의 거마비를 드렸던 모양, 한창 장년에 접어드시는 두 분 선생께서 의기투합, 명동 주점으로 직행하셨던 것, 후에 목월 선생께서 들려주신 얘기론 그 집 술값을 3년 동안 갚았다 하셨다. 첫 번째 술 값 외상, 다음에 술 값 깊자고 만나 외상, 또 외상. . 그래서 술자리 3년이 이어졌다는 것. 두 분 선생의 거칠 것 없었던 장년 풍경이 한없이 멋져 보이는 것인데, . . . 지훈 선생 47세, 목월선생 63세 타계라니 이런 폭음들이 겹치면서 건강을 해치신 것은 아닌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박목월 선생 출생연도, 1915년]
2015년은 선생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선생의 출생연도가 1916년으로 알려져 왔고, 거의 모든 문단 관계 기록도 그렇게 통용되어 왔다. 그런데 선생의 출생 기록들을 세밀히 살피고, 선생의 장남 박동규(朴東奎) 서울대 명예교수와도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내게는 목월 선생 조부(祖父)부터 기재된 선생 집안의 원적부(原籍簿) 복사본이 있다. 선생의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목월 선생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발부받은 호적관계 서류이다. 1914년(대정 3년) 8월 25일에 이 원적부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적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 조부는 박훈식(朴勳植), 이분의 장남 박준필(朴準弼)이 목월 선생의 부친이다. 박준필은 1912년(대정 원년) 1월 2일 김석천(金石川)과 혼인하였고, 1915년(대정 4년) 1월 6일 목월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1916년(대정 5년) 12월 31일 박준필은 목월 선생을 박영종(朴泳鍾)이란 본명으로 호적 관계 서류에 출생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선생의 공식 인사 기록들-한양대학교의 인사기록부, 선생의 주민등록 모두가 1915년생으로 되어 있다. 박동규 교수 역시 선친의 출생연도를 1915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용인에 자리한 선생 묘지의 묘비명을 쓴 김동리 선생도 박목월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 1월 6일로 기재하고 있다. 잘 아는 대로 목월 선생과 김동리 선생은 문청 시절을 경주에서 함께 보낸 막역지우이다.
이상이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고, 선생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한 연유이다. 기왕의 기록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사후에 탄신 100주년 기념은 원(原) 출생연도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고, 유족과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기로 하였고,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을 2015년에 개최하기로 확정했다.
박목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축제는 목월 선생 문하생 모임인 「목월문학 포럼」, 선생께서 20 여 년 봉직하시며 교육 열정을 쏟아 후학들을 길러내신 「한양대학교」, 선생의 필생의 문학 열정이 담긴 시전문지 심상사, 선생 문학 업적의 보존 센터인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그리고 「한국시인협회」공동 주관으로 기획되어 2015년 3월 24일부터 6월 17일까지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1920년 12월 3일 출생인 지훈 선생과 1915년 1월 6일 생인 목월 선생과 지훈 선생은 5년 쯤의 나이차이가 난다. 그러나, 두 분은 이런 나이 차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필생의 지친으로 허교하며 지내셨다. 지훈 선생은 선비 전통으로 다져진 가풍 속에서 한시를 깊게 수용하게 되었고, 육신 나이 20을 전후한 때에 「승무」, 「고풍의상」, 「봉황수」등 원숙한 시편들을 썼다. 반면, 목월 선생은 개신교 집안, 신식 교육 속에서 성장하며 1934년부터 동시를 발표하였고, 1940년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지훈, 목월 두 분이 같은 시기 같은 지면에 같은 선자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지만 지훈 선생의 경우 그의 시가 지니는 조선조 시가 전통의 형식미와 고풍스런 언어미가 5년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한학 가풍 속에서 몸에 밴 대가풍의 선비의식이 지훈에게서 나타나곤 했음도 알겠다. 해방 후 목월 선생이 지훈 선생께 ‘이제 우리도 못 배운 학교 공부를 해야 하겠네’라 말하니 지훈 선생이 ‘무슨 소리를, . ,이제 우리가 가르쳐야 될 것 아닌가?’라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목월 선생께 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목월 선생은 삶의 일상 속을 인식해내는 여실, 섬세한 존재의 시를 쓰셔서 한국현대시의 정점을 보여주셨고, 지훈 선생은 『지조론』 ,『시의 원리』등을 썼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등을 역임하는 선비풍, 대가풍의 삶을 사셨다.
1969년, 변방 내 집을 찾아오신 선생님 내외분
1969년 어느날 선생님 내외분이 내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영등포구 개봉동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어설픈 동네였다. 집 밖에서 선생님께서 나를 찾고 계셨던 것. 놀라워라. 아직도 논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골 주택, 서울 끝 동네 거길 선생께서 찾아오시다니, 그때 나는 중학교 국어 교사였고, 이제 막 시단에 발걸음을 걸친 풋내기 시인이었다. 선생님 내외분은 교회 누군가의 차편을 빌려 가난한 숙맥 제자를 찾아 나서신 것이었다‘ “자네 보러 안 왔나. . .” 선생님 말씀이셨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중, 그리고 선생 강의실에 앉아서도 시 쓰는 기본은 견고한 정신이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저작들, 가령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로댕」, 「말테의 수기」, 같은 책들, 구라다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선의 일기」,같은 책들에 빠져 있었다.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감각이나 상상력 보다는 문학에 대한, 시에 대한 엄격한 절제와 경건한 몰입을 강조한 글들이었다. 10여 년 원고를 써들고 선생댁을 드나들었지만 선생께서는 자유분방한 감각이나 활달한 상상을 강조하고 계셨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