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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2_주설_본향을 찾는 사람들
히브리서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배경으로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간 건강하게 잘 지내셨는지요? 설 명절을 보내시느라고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가족 친지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은 명절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여러모로 고생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저도 설날을 전후해서 서울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자동차가 그렇게 많이 빠져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차량으로 가는 곳마다 정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역귀성이 되어서 서울에 올라가고 또 순천으로 내려오는 길에 크게 차가 밀리거나 막히지는 않았지만, 반대편 도로를 보면서는 마치 제가 그 도로 위에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차가 밀려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내려오고 반대편의 차는 서울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기에 얼마나 밀려있는지를 보면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거의 서울에서 남원정도까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긴 거리를 몇 시간이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도로위에 차가 서 있을 것을 생각하니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제가 보는 것만 해도 답답증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
설날이나 추석 명절과 같이 고향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막히고 전국이 들썩일 때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이 생각나곤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이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한 말과 창세기 47장에서 야곱이 애굽의 바로왕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했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말했던 것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14절). 그들이 자신들이 나왔던 본향, 즉 아브라함이 나왔던 갈대아 우르 지방을 본향으로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15절).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16절). 이것이 14절에서 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4-16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6절의 말씀은 9절과 10절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9-10절,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땅으로 보지 않고 이방의 땅에 있는 것처럼 장막(텐트)에 살았습니다. 만약 그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고자 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터가 있는 성’을 짓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천국에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함께 부른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의 노래와도 같습니다. 천성(天城)은 하나님 나라의 성(城)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문만 바라고 나가세 /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도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과 같이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본향은 서울이나 순천과 같은 이 땅의 고향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영적인 고향, 하늘의 본향을 찾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저는 서울에서 30년을 살았지만 서울이 고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이 경남 하동이었기 때문에 자주 시골에 내려왔지만 사실 하동도 제가 자랐던 곳은 아니기에 고향이라는 생각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특별히 고향에 대한 감흥이 사실 없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계신 곳이기에 서울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도 사실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본향처럼 설레이며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사모함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다보면 조금씩 점점 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역경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의 본향을 찾아오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세상에서의 역경과 고난이 어떻게 본향을 찾게 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질 유산을 미리 받아 챙겨서 멀리 타국으로 나갑니다. 그는 결국 가진 돈을 모두 허랑방탕하게 낭비한 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가다가 드디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5:17-20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탕자는 ‘술, 성적 쾌락, 노름 따위에 과도하게 빠져 바르게 살지 못하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이 세상을 쫓아 사는 영혼들은 모두 이와 같은 탕자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탕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본향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를 두 번이나 강조하듯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강조입니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영적인 고향을 찾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
영적인 본향을 찾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은 진지하게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곧 만나게 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천국행 티켓을 끊어 놓은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던지 간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고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천국행 열차의 티켓을 끊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행 열차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본향을 찾아가고 있는 나그네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곧 천성의 문을 두드리고 있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는 세상의 짐을 많이 지고 여행을 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꼭 필요한 것들만을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 인생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끌어안고 세상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성경은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하늘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곧 떠나게 될 버스정류장에서 의자에 내가 앉아있든지 서 있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만원버스를 탔는데 누구는 앉아가고 누구는 서서 갑니다. 앉아가면 조금 더 편할 수는 있습니다만, 어쨌든 버스에서 내려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평생 영원토록 이 버스에서 앉아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요? 내가 이 버스에서 언제 내리는가? 어디에서 내리는가? 목적지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높은 건물을 올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광야의 땅을 사들이고 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이지 머물러 살아야 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잊어버리면 광야를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를 믿음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가나안 땅도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원이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는 하지만, 믿음이 내용도 없고 삶도 없는 공허한 것이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육체를 위하여 썩어질 것을 심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영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8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영적인 본향을 찾는 나그네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하루를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결에 자주 휩싸이고 마음을 빼앗겨서 자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저도 ‘내가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겠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시간일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데 유익합니다. 하루에 잠시라도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내가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라는 것에 대하여 고백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두팔벌려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정욕과 자랑을 너무 사랑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우리는 무거운 짐을 여행을 하고 있게 됩니다. 짐이 가벼우면 여행은 즐겁지만 짐이 무거우면 여행은 고행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세상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성공의 짐, 미움과 다툼의 짐, 경쟁과 투기의 짐, 염려와 불안의 짐,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걸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런데 영적인 본향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여 있고 또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이 고백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생명과 정의와 사랑을 이 세상에 자신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통해 흘려보내려고 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나그네 삶을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3-14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기를 소원했고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구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일은 거룩한 것이고 회사와 가정의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서 주님을 섬기듯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6:5-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세상에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을 섬기듯이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교회의 일만을 성직으로 보지 않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모든 직업들을 소명의 자리로 보고 성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자리에서 맡기신 성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사랑으로 훈육하고 돌보는 것에서부터 거리를 청소하거나 회사의 업무를 통해 거래처의 사람을 만나거나 때로는 나를 통해 어떤 사람이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일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주께 하듯 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향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인생이라고 해서 무조건 세상을 관조적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걸어가는 걸음에 예수님의 보혈이 묻혀지고 하나님 나라의 흔적이 나타날지를 생각하며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모두 뒤로 하고 떠나갈 날,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날인 것도 잊지 않습니다.
옛날 동네에서 아이들과 땅따먹기 놀이를 많이 했었습니다. 커다란 네모를 그려놓고 그 안에서 돌을 손가락으로 튀겨서 상대방의 금을 넘지 않으면서 세 번만에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땅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조금씩 넓혀가다가 상대방 아이와 금을 넘었느니 아니니 하면서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성근아 저녁밥 먹어라!’라고 부르시면 이제까지 넓혀왔던 땅 모두 내려놓고 ‘예~’하고 달려갑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울고 웃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떠나는 날이 있음을 알고 천상병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소풍 나온 것처럼 그렇게 사는 법’도 아는 것이 본향을 찾는 나그네의 삶일 것입니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아침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