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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남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뜰못(김홍)
다시 듣고싶은 '고두석님의 회고담'
김 홍
‘제3회 전국문인초청 전남기행’ 행사에 문인의 입장으로 동참했던 것을 먼저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늦깎이 등단하여 문인들 틈에 끼게 되니 우선 품위가 있어 보여 좋았고 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니 배울 점도 많을 뿐 아니라 문단의 음지에서 기를 쓰지 못하던 새내기가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우쭐했다.
먼저, 웃기는 얘기를 하더라도 수준이 달랐다. "경상도 할머니와 미국 사람이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할머니가 "왔데이"하니까, 미국 사람이 무슨 요일이냐 묻는 것으로 생각하고 "먼데이"라 하자 할머니께서는 뭐냐고 묻는 줄 알고 "버스데이"라고 대답하니까 미국 사람은 할머니 생일이라고 알아듣고 “해피 버스데이”라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데이, 직행버스데이"라 고쳐 말했다하여 한바탕 웃었다.
전남문협 회장님의 맛깔스런 유머는 언제나 배꼽을 쥐게 했다. 오후1시 광주를 출발하여 문림의향 소도읍 고장인 장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3시였다. 장흥문화예술회관에 들어서자 때마침 경기도 한새빛 지회장 등 일행들도 도착해 있었다. 예정된 개회시간이 오후5시이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은 시간인데도 전국 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1부 행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데도 장흥문화예술회관 실내는 등록을 마친 문인들이 색소폰 연주를 듣기 위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색소폰 연주는 전남문협 회원인 김명국님의 자원봉사인데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였다.
오후5시가 조금 지나서 판 열기는 시작됐다. 의례적인 절차에 따라 내빈소개와 환영사가 진행됐다. 그 중 전남문인협회 조수웅 회장님의 인사말씀은 형식과 내용이 유별났다.
“당나라 현종이 자기 뜻이 담긴 명문장을 만백성들에게 발표하고 싶었다. 어전에 모인 신하들에게 그 글을 쓸 사람을 추천하도록 엄명을 하였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백(李白)이 만장일치로 뽑혔다. 수소문 끝에 만취한 이백을 찾아내었으나 그를 대궐 안으로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대궐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벼슬아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그들은 이백에게 그 자리에서 벼슬을 내려 입궐시켰다. 하지만 이백은 술보답게 임금님이 내린 글제로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고 있었다. 담당 신하가 애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임금님이 정해준 마지막 날에는 이 신하가 발사심이 나서 마침내 불호령을 내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만취 상태인 채로 일필휘지를 했는데, 과연 시선답게 순간에 명문장을 써내어 임금님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백의 글재주를 본 임금님은 그자를 자기 곁에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백으로 하여금 궁궐에서 거처하며 글을 쓰도록 명하였다. 이백은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는 임금님께 제발 궁궐 밖으로 나가게 해주라는 간청을 하였다. 임금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은 임금님 총애 아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소원인데, 이백은 이를 사양하다니...... 하지만 그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궁궐 밖으로 내보내기로 해놓고도 임금님은 못내 아쉬워하며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냐고, 뭐든지 말만 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백은 무턱대고 궁궐 밖으로만 내 보내주면 더 이상의 소원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임금님 생각으로는 참 괴이한 일이었지만, 그냥 빈손으로 내보내기가 그래서 요즈음 말로 백지 수표 한 장을 이백에게 건네주었다. 이백은 그 종이 한 장이면 세상에 나와, 재물은 물론 여자 등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요술방망이를 얻게 된 셈이다. 여전히 술에 찌들기 시작한 이백은 제 방식대로 살다가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는데, 그를 염습하기 위해 장의사가 옷을 벗겼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그 요술방망이 백지 수표가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권력과 명예를 초월해야 할 문인들의 가치관과 선비정신을 일 깨워 주는 명 인사말이었다.
곧이어 각 지회별 문인들을 소개한 다음 초청강연 ‘고두석 이야기’가 시작됐다. 작달막한 키에 단단한 체격의 고두석원장은 연단에 오르자 자작시 ‘고향’을 읊으면서 화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본인의 나이가 70세라지만, 50대 후반과 같은 당찬 장년의 모습과 우렁찬 목소리는 장내를 제압하고도 남았다.
"저의 인생은 한판의 살풀이 같았습니다. 권투선수 시절 코치로부터 첫째 상대를 두려워하지 마라. 둘째, 맞는 걸 쾌감으로 느껴라. 셋째 기회만 엿 봐야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세상살이에 대입하여보니 딱 들어맞았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무작정 상경하여 노숙생활과 주먹질하는 소위 깡패세계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탈출, 대학에 진학하여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준교사 시험에 합격, 정교사가 되고 정년퇴직 한 후 현재 관악국악교육원 원장으로 시조창의 대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말하는 동안 강연을 듣고 있던 전국문인들은 아직도 기가 팔팔한 노익장에게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다.
“고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외우도록 한 시가 있습니다. 괴테의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오’라는 시인데, 이 시는 내 자신이 죽음을 결심하고 자살하려 했을 때 마지막으로 암송하다가 용기를 내고 다시 새 삶을 살게 한 시입니다.” 하면서 고두석 원장은 괴테의 시를 줄줄 읊었다.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오’ /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지니고 /
비바람 속에서도 꽃피는 길에서도 / 한결같이 한 생을 살아 가구려 /
‘서두르지 말아요’ 이 한 말씀을/ 마음을 바로잡는 고삐로 삼아 /
깊은 사려, 올바른 판단 / 한번만 결심이 끝난 다음엔 /
온 힘을 기울여 앞으로만 나가보오. /
‘쉬지 말아요’ /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가요 /
반짝하는 인생이 덧없이 가기 전에 / 영원히 길이 남을 보람 있는 업적을 /
이 세상에 유물로 남겨 놓구려 /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오’ / 운명의 폭풍우에 꾸준히 견디면서 /
나침처럼 한결같이 의무에만 살고 / 무엇에도 굽히잖고 정의에만 살아 보오 /
인고의 모든 날이 지나간 훗날에는 / 역사 위에 찬란하게 그대의 면류관이 빛나리라//
“어느 날, 제자들이 동창회 모임을 갖고 식사를 대접한다기에 가 보았더니 학창시절 문제학생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그 학생이 큰 회사의 사장이 되어 한턱낸다면서 큰절을 한 다음,
괴테의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오’를 큰 소리로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괴테의 시를 암송하며 용기를 냈다면서 스승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몇 차례나 뛰었고 줄넘기 2,000-3,000개를 거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데드 포인트(dead point, 死點)를 견딜 수 있는 인내와 끈기였습니다. 데드 포인트만 넘기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답니다."고 말하는 고두석원장의 강연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뷔페식 차림의 저녁식사를 마친 후 2부 행사인 문학인의 밤은 다소 시간이 짧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흥미진진했다. 제주도 문인협회에서 참석한 단 한 분의 문인은 박자와 음정이 맞지 않으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불러 큰 인기를 얻었고, 프로가수처럼 자신의 기타 반주에 듀엣으로 부르는 문인과 세련된 모습의 경기도문인협회 회원들과 노래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했다는 시조와 창을 결합하여 만든 시조창 열연과 시 낭송이 덧 보였고, 특히 충남문인협회에서 전남문인협회에 증정한 서예작품은 문인 자신이 일필휘지한 작품으로 전남문협에서 길이 보존해야할 자산이 되기에 충분했다.
탐진강 강바람에 실려 고즈넉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정해진 숙소에서 1박한 다음 기행의 둘째 날이 밝았다. 행사일정에 따라 장흥 안양면 기산리에 있는 가사문학의 산실 기봉 백광홍 관서별곡 현장을 탐방하고 소설가 한승원님의 집필실 ‘해산토굴’ 바로 앞에 있는 '한승원 문학학교‘에 당도하여 한승원작가와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한승원님은 필자와 1970년대 거의 10년 동안 함께 어울리며 형님으로 모셔온 사이인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뒤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고희가 넘으신 연세이지만 멋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함께 간 문인들, 특히 타 시도에서 온 문인들은 한승원님과의 만남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닫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산토굴' 앞 '한승원 문학학교' 입구에 '달 긷는 집'이라는 제목의 글이 한승원님의 친필로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황혼에 집 한 채 지었습니다. 전신주 벌이 줄 감으며 올라가는 하늘수박 덩굴이 타고 가는 나선 같은 태극의 끝 숲 속 옹달샘에 빠진 달 바가지로 길어 가지고 암자로 달려왔다가 사라진 달 때문에 울다가 죽어간 스님. 강물 속 달 길으려다 익사한 이태백 기리는 ‘달 긷는 집’>
“15년 전 여름 이맘 때였습니다. 득량만에 시커먼 도깨비가 있었는데 그 도깨비를 만났지요. 그 도깨비가 하는 말이 ‘네 얼굴은 연꽃인데 다리는 왜 나귀다리냐?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논과 밭 등 모든 걸 살 수 있는 돈을 빌려 주겠으니 다 사도록 해라.’하여 그 돈으로 해산토굴에서 보이는 바다와 논과 밭을 모두 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내 것입니다.”
소설 같은 얘기를 하였지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전국문인들은 사업(事業)과 광기(狂氣)라는 용어로 문학의 경지를 설명하는 소설가 한승원님의 해박한 강의를 열심히 경청했다.
1939년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목선’으로 등단한 이후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동학제’ 등 수많은 장편소설과 어른을 위한 동화 ‘우주색칠하기’와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등 불후의 명작을 출품하고 한국문학상, 이상문학상, 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한 한승원님의 건강이 매우 좋아 보였다.
“소설가 한승원님이 15년째 머물고 있는 고향 장흥의 작업실 해산토굴은 그의 말과 글들이 피어나는 자궁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선 작가 자신도 자궁이 된다. 글을 품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바야흐로 끝낸 소설 원고를 전자편지로 출판사에 보내고 난 내부의 불그죽죽한 핏줄과 굵고 가늘게 주름진 무늬들을 간직한 그의 속은 ‘해산하고 난 산모의 자궁’같다.”고 표현한 최근 한승원 소설집 ‘희망사진관’에 부치는 어느 기자의 글에 동감하고 싶다.
점심은 ‘여닫이 횟집’에서 마치고 한국문학계의 대가인 고 이청준님의 생가를 방문했다.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고 이청준님은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후 ‘축제’ ‘서편제’등 수많은 소설을 창작했고 판소리 다섯 마당을 동화로 풀어 쓴 ‘놀부는 선생이 많다’ ‘토끼야, 용궁에 벼슬 가자’ ‘심청이는 빽이 든든하다’ ‘춘향이를 누가 말려’ ‘옹고집이 기가 막혀’가 있다.
김석중(전남문협 부회장)님의 해설에 의하면, 고 이청준님은 명문학교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된 영재였으나 명예와 권력이 있는 지위보다는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면 선학동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어른들 손에 2-3만원씩 현금을 쥐어드리곤 했던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전국 문인들은 작가 고 이청준의 대표작인 '서편제'를 영상화한 임권택 감독 '천년학' 촬영 세트장과 장평면 봉림리 문병순 시인이 거금 3억5천만원을 들여 조성한 개인 문학 테마파크 계명성 시비공원을 관람한 후 석별의 정을 나누었는데, 전남 해남에서 오신 김기두님은 79세의 고령이지만 내년 행사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백의민족'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녹두장군'등 주로 민족분단과 '오월광주' '동학농민혁명'등 근대사를 소설로 써 온 송기숙님의 생가와 '자랏골의 비가' 현장 방문이 행사일정표에 있었으나 시간관계상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송기숙님은 1935년 장성에서 태어났지만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계산초등학교와 장흥중고, 전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남대학교 대학원에 적을 두고 대학신문사 전임기자로 활동하면서 현대문학에 '이상서설'이 추천되어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그 후 목포교육대학 교수로 7년간(1965-1973) 재임하다 모교인 전남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나 전남대학교 교수 10명과 함께 '우리의 교육지표' 제하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당시 유신정권에 의해 구속을 당하게 된다. 1980년의 봄을 맞아 다른 교수들은 복직되었으나 그는 실형에 병과 되었던 자격정지 부분에 대한 복권이 되지 않아 복권을 기다리고 있는 중 518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 사이 송기숙님은 지리산 피아골에 칩거하여 소설을 쓰다가 전국 해직교수들과 제휴 해직교수 아카데미를 조직, 각 지역으로 강연을 다니는 등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 복직하여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직을 맡았다.
그는 전남대학교에 5·18연구소를 주도한 다음 곧 소장직을 내놓고 전남 화순군화순읍 무등산 자락으로 이사하여 5·18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장편 ‘오월의 미소’를 집필하고 2000년 초에 출간하는 등 정년퇴직 후 일생을 통해 ‘건강한 삶은 무엇이고, 그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한 ’삶과 역사를 일군 이야기 꾼‘이라는 별명에 토를 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1박2일의 전국문인초청 전남기행을 마친 후 장흥(長興)은 글자 그대로 길게 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갖가지의 요소를 거론하기 전에 우선 글쟁이들을 우대하는 것이 길게 흥할 징조가 아닐까. 첫번째 만났던 날, 영상물 상영을 통해 장흥이 배출한 문인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의 작품세계와 그들의 생애를 소개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
이번의 문학기행을 통해서 지식경제부로부터 장흥이 왜 지정문학 특구로 선정됐는가를 알게 되었고 전남문인협회 회장님께서 정남진을 바라보며 밥상을 받아놓고 전국문인들과 “함께 하자”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도 더 듣고 싶은 것은 시간이 없어 다 말하지 못한 고두석 원장님의 인생 회고담이다. 문무를 겸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 같은 사람의 이야기 "인생은 살풀이 같다."는 회고담을 다시 한 번 끝까지 듣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