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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풀린 눈빛으로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추남은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산채를 뒤지고 돌아다니기 시
작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에 충격을 먹고 미쳐 생각
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정신이 수습 되자 아직 채주라는 인간을 만나보
지 못했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채주를 찾기 위해 산채를 이잡듯이 뒤져보고 있던 추남은 잠잠해졌던 분
노가 또 다시 급상승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안면정도는 알고 지냈던 10여 명 정도의
마을 여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이.. 이놈들이 바로 그놈들이 확실했었군! 채주.. 아직 채주라는 놈이 보
이지 않았어. 내 이놈을 당장 잡아다가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말테다. '
간신히 가라앉아 있던 마성이 또 다시 폭발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추남은 미친 듯이 산채를 돌아다니다가 다른 집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높은 곳에 위치한 집을 발견했다.
'저곳에 분명 채주 놈이 있을 것이다. 네 이놈을 당장.. 빠드득!'
이를 갈며 신형을 옮긴 추남은 문을 박살내버리고 안의 모습을 확인했다.
방안에는 역시 나신의 여인이 목이 잘려 쓰러져 있었고 그 외에도 2명의
사내들이 목이잘려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의 원흉인 채주라는 놈은 보이지 않았고 뒷문이 활짝 열려
있을 뿐이었다.
'이.. 이놈이 도망을 치다니! 으윽.. 이런 큰 실수를.. 곧장 채주를 찾았어
야 했거늘.. 아! 아까 싸움에 끼지 않고 멀리 떨어져 구경을 하고 있던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그놈이? '
추남은 기억이 날듯 안날 듯 가물가물한 어떤 얼굴을 기억해 내느라 혼신
의 노력을 다했고 마침내 그렇게 또렷하진 않지만 저주스러운 채주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네까짓 놈이 도망을 가봐야 얼마나 가겠느냐! 내가 네놈의 얼굴을 똑똑
히 기억하고 있으니 어디 얼마나 잘 도망 다니다 두고 보자고. '
추남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쫓아가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고 시신들을 잘 묻어줘야 했기에 마음을 바꿔먹어야 했
다.
마을 여인들의 시신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묻어주었지만 산적들의 시신
은 그냥 큰 구덩이 하나 파서 모두다 쓸어넣어 버리고 묻어버렸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버렸지만 추남은 강운과 화린이 걱정되어 곧장
산채를 떠나 객점을 향해 나아갔다.
추남이 떠나고 난 산채에는 11개의 정성스럽게 손질된 무덤과 약간 볼록
하게 튀어나왔을 뿐 무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산적들의 무덤만 남게
되었다.
강운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정말 한눈한번 안 팔면서 글공부를 했고 화린
도 옆에서 무공수련을 하면서 강운이 막히는 부분을 도와주면서 추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강운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글공부를 시작한지 하루 만에 어
렵지 않은 문장은 거의 다 읽어냈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화린도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운이는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가 틀림없을 거야. 하루 만에 글을 읽어내
다니.. 후~,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아침부터 줄곧 자리에 앉아서 밥도 안먹고 볼일도 안보고 오로지 글공부
만 하던 강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기지개를 켰다.
"아함~! 이거 정말 재미없다. 이젠 웬만한 건 다 읽을 줄 아니까 이제 그
만 할래. "
말을 마친 강운은 곧장 침대로 뛰어들어 뒹굴뒹굴 거렸다.
사실 강운이 이 만큼 공부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마 모
르긴 몰라도 오늘이 강운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공부한 날일
것이다.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강운을 쳐다보는 화린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
졌다.
"그래 운아.. 오늘은 그만하고 쉬는 게 좋겠다."
"오늘은이 아니라, 이제 공부 안한다니까! 음.. 화린아 거기 있는 책이나
줘봐. 심심한데 형 올 때 까지 그거라도 보고 있어야겠다. "
강운이 가리키는 책이 무공비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화린이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
"이 책은 지금 운이가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싶은데.. 나중에 오라
버니 오시면 그때 보는 게 어떨까? "
"아냐. 아냐! 나 볼 수 있으니까 그냥 줘. "
화린은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강운에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책을 넘
겨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운아.. 읽어보는 건 좋은데 무턱대고 따라하면 안 돼! 알았지? "
"그래. 알았다. 알았어. 무슨 꼭 누나처럼 말하네 자꾸.. 참! 근데 화린이
나이가 몇이라고 했더라? "
"17살인데.. 왜? "
"음.. 그래?.. "
강운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비쭉거리며 말을 했다
"쳇! 그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거잖아? 음.. 그럼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화린 누나라고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알어. "
사실 누나라고 부르나 이름을 불러대나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이 정도면
강운으로서는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해준 것이다.
"아니.. 뭐 그렇게 하지 않아도.. "
강운은 화린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중간에 말을 끊어버렸다.
"아냐! 누가 뭐래도 누나는 누나인거니까.. 싫어? 싫으면 말고.. "
"후훗.. 그래 그러면 앞으로는 누나라고 부르렴. 됐지? "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럼 나는 책이나 읽어야겠다. "
강운은 추남과 화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도
대체 저 책이 얼마나 재미있으면 그것만 들여다보는지 매우 궁금했었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같은 내용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추남과
화린이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읽었던 것과는 반대로 강운은 연신 하품만
하면서 내용을 살펴봤다.
"후우... 이거 정말 장난 아니게 재미없다. 으~~도대체 이런 게 뭐가 재미
있다고 밤낮으로 쳐다보구 있던 거야? "
무공비급을 재미로 읽어대는 인간은 아마도 강운이 처음일 것이다.
내용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어 대충대충 책장을 넘겨보던 강운도 인체
의 혈도에 관계되는 부분이 나오자 글 공부를 할 때 처럼 집중해서 내용
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호! 그래. 여기를 찌르면 말을 못하고 여기를 찌르면 기절한단 말이
지? 히히히! 이거 알아두면 나중에 잼 있게 써먹겠는걸. "
혈도의 자리와 점혈법을 보면서 강운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히히히... 이거 정말 잼있겠다. 빨리 써먹어 보고 싶은데.. 화린이한테
써먹어볼까? 음.. 아니지 아니야. 이젠 누나라고 불러야 되는데.. 에
구.. 화린누나한테 써먹었다가는 나중에 분명히 추남형한테 혼날 테니까
그건 안 되겠고.. 그럼 누구한테.. 아! 맞다. 그 사람이 있었지.. 흐흐"
혼자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밖으로 뛰쳐나가는 강운을 보며 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이가 왜 저러는 걸까?..추남오라버니가 운이가 보통 사람보다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말이 사실인가 보네..
후훗! 그래도 제법 귀엽단 말이야. "
객점의 1층으로 내려온 강운은 음식을 주문하고 누군가를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앗! 저기 있다. 히히.. 마음씨 나쁜 아저씨! 오늘 골탕 좀 먹어봐라. '
그때 막 주방에서 음식재료를 다듬고 있던 칠성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방 안에는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 자신을 쳐다볼 여유가 없어보였다.
'어헛.. 그것 참 이상하다. 분명히 누군가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음.. 뭐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너무 과민 반응이었
나? '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던 칠성은 별로 특이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을 확인
하고는 음식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칠성으로서는 주방 밖에서 강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
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강운은 칠성이 그런 느낌이 들지않게 쳐다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누군
가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을 수 있게 쳐다봤다.
평범한 사람은 방밖에서 방안에 있는 사람을 쳐다볼 수도 없겠지만
만약 쳐다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방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건 강운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운은 지금 당장 손을 쓸 수도 있었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칠성아. 우측 세 번째 식탁에 주문 음식 좀 갖다 드려라. "
"예. 알았어요. "
짧게 대답한 칠성은 곧 바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강운은 마침 칠성이 음식을 나르
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빛냈다.
'자! 침착하게.. 침착하게.. 그러니까 저곳이 아혈이었던가? 음.. 혼혈이
었던가? 으흠.. 이거 헷갈리네. 에잇 모르겠다! 그냥 찔러보면 알겠지
뭐."
너무나 무책임한 결정을 해버린 강운이 마구잡이로 칠성의 혈도를 찌르
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칠성의 안색은 수시로 바뀌었다.
강운은 방안에서 이론공부를 하고 칠성을 상대로 실습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 역시 실제로 해보는 것 하고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것 하고는 많은 차
이가 있었구나. '
강운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기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칠성
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 "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 봤지만 입만 벙긋 거릴 뿐 소리가 나오
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왜 몸이 말을 안 듣는 거
냐고? 설마.. 정말 귀신이? '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어버린 칠성은 눈알만 좌우로
굴리며 사람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칠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동안 눈알만 굴리며 도움을 요청하던 칠성의 눈에 정면에서 멀리 떨
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분 나쁘게 실실거리며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
는 강운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자식은 기분 나쁘게 왜 실실 웃고 지랄이야. 봤으면 좀 도와줄 일이지.
얌마! 좀 도와달라고! 이 싸가지 없는 꼬맹이 자식아. 너 정말 그따위로
웃고만 있을래? 으으으... '
강운은 자신이 훌륭하게 점혈을 성공 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내가 쓸데없이 이런 걸 배운거지? 이런 거 안 배웠어도 할 수 있
는 거였었잖아? 우씨! 으... 시간 낭비만 했다. '
신경질 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강운이 손을 한번 휘저으면서 칠성의 혈
도를 풀어주고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칠성은 강운이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홱하고 일어나 2층으
로 그냥 올라가 버리자 속으로 욕을 해댔다.
'이런 썅! 이런 빌어먹을 놈의 자식아!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 내가 움
직일 수만 있었어도 저런건 그냥 확... 에? 움직여지네? '
칠성은 무심코 주먹을 말아쥐었는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꼼짝도 못하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 움직인다. 움직여. 그럼 이제 말도 나오려나? '
"아! 아! 아~~~ 하하하.. 난 이제 살았구나 살았어. 어이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조상님께 제사라도 드려야지 안 되겠다. "
객점 주인은 음식을 나르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서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칠성이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며 웃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객점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자 화가 나서 칠성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칠성은 객점주인
의 말을 완전히 씹어버리고 뛰쳐나갔다.
"칠성아! 칠성.. 으~ 너 이 세끼 간이 배백으로 튀어나온 모양인데.. 넌
오늘부로 짤린 줄 알어라. 근데 뭐 저런 게 다 있어? "
객점 주인이 뭐라고 하건 말건 칠성은 몸이 자유로워 진 것이 조상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기일을 정해
조상님 제사를 지냈다.
화린은 아래층에 내려갔던 강운이 투덜투덜거리며 방안으로 돌아오자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강운에게 다가갔다.
"운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
"아니, 쓸데없는 걸. 배우느라 시간 낭비한게 아까워서 그래. 차라리 그 시
간에 잠이나 자는 건데.. 으~ 생각할수록 열 받네. "
툴툴거리는 강운을 달래주느라 애를 먹고 있던 화린은 밖에서 인기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 앞에서 잠시 멈춘 뒤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아! 오라버니 이제 오시는 거에요? "
"어.. 그래.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
추남은 객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옷을 새로 구입해서 갈아입고 왔고 또 나
름대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혈향만
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화린이나 강운은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