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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
온 세상 죄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일 1:1~2:2
I. 서론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사과 다섯 개 중, 두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지?” 그랬더니 한 학생이 대답합니다. “두 개요!” 그러자, 선생님이 다시 묻습니다. “아니, 다섯 개에서 두 개 먹으면 세 개가 남지. 왜 두 개냐?” 그러자, 그 학생이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랬어요.” 이 유머는 최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이 이야기를 배고픈 시절의 슬픈 유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의 시작과 끝이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죄의 시작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발생했고, 죄의 종말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현재 88세이신데, 약 3년 전에 걸린 암이 맹장에서 시작해서 현재 간으로까지 전이가 된 상태입니다. 항암 치료는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고,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16번 인터뷰를 한 내용을 마지막 책으로 남긴 것입니다. 이 책이 마지막 책이기 때문에, 이어령 교수님은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남기려고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어령 교수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한 이유는 오늘부터 우리가 몇 주간 함께 나눌 요한일서 저자 사도 요한도 이어령 교수님과 같은 그러한 심정으로 이 책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은 사도 요한이 말년에 기록한 책입니다. 아흔이 넘은 요한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나이였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그리고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서신으로 남기고자 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는 시니어 분들이 많으신데,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남기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첫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어 원문에는 1절에 동사가 없습니다. 하나의 명사와 그 명사를 수식하는 분사들만 있습니다. 하나의 명사는 생명의 말씀이고, 그것을 수식하는 분사는 네 가지로, 1) 태초부터 있는 - 생명의 말씀 2) 우리가 들은 - 생명의 말씀 3) 우리가 본 - 생명의 말씀 4) 우리의 손으로 만진 -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그가 기록한 다른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요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누구를 말할까요? 네, 육신이 되신 즉,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책,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시작할까요?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 요한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사도 요한을 좋아하십니까? 제가 사도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도 요한의 중심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제는 사도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을까요? 마리아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에게는 4명의 형제들과 여러 명의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맡깁니다. 요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사랑하시는 제자”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을 말합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라는 사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끝까지 충성한 사람”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유일하게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신 사명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성경을 자신의 노년에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요한서신은 초대교회 당시 만연했던 잘못된 이단 사상에 대항해서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밧모이라는 유배지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사도 요한이 본 것, 지금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모든 성경들은 신앙과 인생의 경륜 (경험과 능력)이 쌓여야만 기록할 수 있는 책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를 읽은 우리 모두도 사도 요한을 본받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맡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2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서두에도 “말씀” 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고, 요한일서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두 번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 나타나신 예수님의 직접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손으로 만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서신의 맨 처음부터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는 이단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단들은 가현설을 믿는 사람들로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이단에 대해서 강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요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면서 처음부터 강조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자, 2,000년 전에 성육신 하신 인간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요한에게 책망 받는 적그리스도는 아닙니까?
2. 둘째, 편지의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3절과 4절에서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말합니다. 3~4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사귐과 기쁨입니다. (Fellowship & Joy)
1) 첫째, 사귐.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전함 즉, 전도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의 교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제는 성도들간의 교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러니까,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 속으로 이웃을 초청하여 함께 교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전도의 목적은 단순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풍성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성도들과도 풍성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라고 요한복음에서도 말합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얻는 즉,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전도가 되지 않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귐 안으로 이웃을 초청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 않습니까? 내 신앙 생활이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초청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귐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법적으로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부부가 되었다고 그 관계가 자동적으로 행복하고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부부가 이혼을 하겠습니까? 법적인 신분이 풍성한 관계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신자의 법적 신분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신분이 자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사귐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저는 요한일서 나머지 내용이 이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둘째, 기쁨.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쓰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합니다.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이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누릴 때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확장되어 성도들과 풍성한 관계를 누릴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 가장 기쁨을 느낍니까?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입니까? 한 영혼이 신앙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될 때입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것에 우리의 기쁨이 있습니까?
3. 셋째, 요한이 전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가르쳐주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풍성히 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5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한 마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합니다.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해 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신데, 우리가 어둠 가운데 행하면, 그 관계는 결코 풍성해 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인지를 계속해서 설명해 줍니다. 그 내용이 1장 6절부터 2장 2절까지인데,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만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 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연필로 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1장 6절부터 2장 1절까지는 모두 “만일~하면”, 영어로 “If”로 시작합니다. 6절, 만일 ~ 어둠에 행하면 / 7절, 한글 성경에는 “만일” 이 빠져 있습니다. 연필로 적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 빛 가운데 행하면, / 8절, 만일 ~ 없다고 말하면, / 9절, 만일 ~ 자백하면, / 10절, 만일 ~ 아니하였다 하면, /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 하려 함이라) 괄호로 묶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만일”로 시작하는 문장이 보일 것입니다. 이 여섯 번의 “만일”로 시작하는 문장에서, 첫 은 부정적인 내용이 나오고, 다음 절은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이것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6절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둠에 행하면” 부정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7절은, “만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이렇게 부정과 긍정이 규칙적으로 세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번의 부정적인 문장은 모두 “거짓”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6절, 거짓말을 하고, 8절, 스스로 속이고, 10절,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점층법으로 그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머릿속에 두고, 사도 요한이 전한 내용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6~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6~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당시 이단들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진짜고, 육체는 영혼을 감싸는 빈 껍데기 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로 행하는 죄는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단들은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여전히 어둠 가운데서 죄를 짓고 산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7절 본문을 잘못 읽으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이것이 조건이 되어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과연 행위 구원을 본문에서 말하고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읽어 나가다 보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니까, 죄 사함에 대한 사도 요한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어진 7절 본문은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할까요?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눅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인간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훨씬 더 빛 가운데 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토색 (강도), 불의 (악한 행동),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돈을 받아서 침략자 로마 정부에 바쳤고,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받아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토색과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종교인들은 세리의 헌금은 더러운 돈이라고 해서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의롭다고 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자신을 높였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절에서 말하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낮출 때, 우리 공동체에 진정한 사귐이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8~9절에서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8~9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첫 걸음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때, 이단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부정했습니다. 육체로 짓는 죄는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요한인 단언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현대에도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요한의 단언은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원인으로만 죄를 해석하고자 함으로써 죄의 실제나 죄의 책임을 부정하는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도 앞에 소개해 드렸던 책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윤리학을 죽인 게 심리학이야. ‘내가 악해서 저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야.’ 이렇게 분석하는 거야. 심리는 윤리적인 게 아니니까, 바닥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 바탕에는 유물론적인 사고가 있어. 그리고, 유물론으로 가다 보면, 로봇과 인간은 다르지 않아. 마음도 화학 물질론이 되니까.” 로봇에게 무슨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사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 요한은 점층법을 써서, 처음에는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스스로를 속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하나님까지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을 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를 까닭 없이 죽게 한 어리석은 존재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2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전체 문맥 상, “나의 자녀들아 ~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괄호로 묶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패턴 2장 1절에 와서 지금까지의 패턴이 바뀌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는 부정적인 조건문 다음에 긍정적인 조건문이 왔습니다. 6절 다음에 긍정 조건문 7절이 왔고, (만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8절 다음에 긍정 조건문 9절이 왔습니다.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러한 패턴대로라면, 10절 다음에 나오는 2장 1절에서도, 긍정 조건문이 와야 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마지막에 와서 이 패턴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 아니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라고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사도 요한이 진정하고 말하고 하는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구원자가 필요한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마지막으로 1절과 2절을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III. 결론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분, 2) 의로우신 분, 3)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 이 세 가지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말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 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아버지 앞에서 대언하실 때에는 7절에 나와 있듯이 자신의 피를 근거로 대언하시는 것입니다. 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만일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 아니셨다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인이 죄인을 위해 대신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으로서 불의한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예수님의 신분이 우리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중에 아직까지 죽음이나 심판에 대해서 무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자신을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보라 봐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이유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무엇보다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다시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된 소식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를 6년 전에 개척한 이후로, 이 교회를 나오셨던 분들 중에, 적지 않는 분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또 다른 6년이 지나갈 텐데,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 중에 또 얼마나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까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 중에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몇 년 더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간, 조용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하면 좋을까요? 이 시간 생각나는 사람을 위해, 그분들의 영혼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