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수상자 : 전채연
수상년도 : 2021년
수상작 : 비에 젖은 샌들
비에 젖은 샌들
그 샌들을 만난 것은 작은 플리마켓에서였다. 오래되고 수명이 다해가는 낡은 것들이 즐비한 좌판에 그것은 버려진 것처럼 나와 있었다. 굽 높이가 십 센티는 되어 보였고, 딱 적당한 넓이의 스트랩이 앞볼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스트랩에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직사각형의 작은 메탈이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샌들의 형태였는데, 뒷굽에서부터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신발의 형태가 군더더기 없이 매끈했다. 첫눈에 마음이 가는 샌들이었지만, 플리마켓 특성상 중고로 나온 것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자리를 떴는데, 마켓을 한 바퀴 다 도는 동안 그 샌들만 아른거렸다. 하는 수없이 돌아가 그것을 샀다.
샌들을 신어보고서야 자기에게 맞는 물건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발은 할머니를 닮아 유난히 앞볼이 넓고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와 있다. 나중에야 그런 발이 무지외반증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의 형태가 모나다 보니 어떤 신발을 신어도 내 것처럼 딱 맞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샌들은 주문 제작한 수제화처럼 내 발에 꼭 맞았다. 스트랩은 볼록 튀어나온 앞볼을 감쪽같이 감춰주었고, 십 센티나 되는 굽 덕분에 발목 라인이 길고 가늘어 보이는 착시 효과마저 있었다. 단순한 무지 티에 여러 겹의 주름이 장식된 스커트를 입고 샌들을 신으면, 밀린 일을 하러 가는 휴일의 출근길마저 무도회 가듯 경쾌해졌다.
아쉬운 게 있다면 가죽으로 된 샌들이 물기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는데, 장대비가 연이어 내리던 어느 여름날, 샌들을 잘못 신고 나갔다가 그만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물을 먹어 축 처진 샌들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나는 미련 없이 그것을 버렸다.
샌들의 브랜드는 캘빈클라인이었고 나는 매장에서 그와 비슷한 디자인의 신발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비슷한 샌들은 더러 있었지만, 그만한 샌들은 찾기 어려웠다. 비슷한 샌들을 찾아다닐수록 그 샌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환상적인 조합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첫눈에 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에 대한 첫인상도 그랬다. 어느 봄날의 강의실에서 우연히 뒤를 돌아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참 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렸고, 내내 그 웃음에 붙들려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인어공주를 읽고 책의 결말에 무척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때문에 며칠을 앓아누웠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한층 더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웃음에 한 번도 제대로 화답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캘빈클라인 샌들을 얻기 위해 플리마켓을 되돌아갔던 수고만큼도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그는 내 친구와 연인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강의실 바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내내 의식하며, 나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얼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인어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물거품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온 힘을 다해 그 시간을 버텨낸 다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나왔고, 그게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나는 내게 딱 맞는 구두 같은 사람이 어디엔가 분명 있으리라 믿고, 호기롭게 그들을 떠나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가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내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것이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 기억이 그렇게 오래 미련으로 남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의미 없는 밤을 지새우는지 알지 못했다. 왜 술을 먹다 엄한 동아리 선배 앞에서 느닷없이 울어서 혹시 나를 좋아하느냐는 오해를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영문을 모른 채로 오래 방황했다. 미처 나누지 못한 그와 나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찬바람 맞으며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캘빈클라인 샌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웠어야 했을 것이다. 그의 눈웃음에 선선히 답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서둘러 떠나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그를 친구의 연인으로 만나야 했다고 해도 그렇기에 맛봤을 아쉬움과 미련들, 가닿을 수 없는 그리움까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끌어안았다면, 그 시절이 내게 그렇게 긴 암흑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짧은 순간 내게 와서 기쁘게 수명을 다해주었던 캘빈클라인처럼 그에 대한 기억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소장품으로 남지 않았을까. 인생이란 결국 강렬하게 경험된 것들만 내 것으로 수납할 수 있는 작디작은 옷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수상 소감
멀리 돌아온 길
10월의 어느 늦은 밤에 한국수필 신인작가상 수상 통보를 받았습니다. 수상 소식 첫 줄에 ‘수필가 전채연’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수필가’라는 글자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참 멀리도 돌아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데, 제 마음속 소망을 알아봐 주시고, 그래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데, 가능성을 보시고 이런 영광스러운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저는 글 쓰는 사람이니 더 좋은 글로 보답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끌어내 진심 담은 글을 쓰라고 가르쳐주신 선생님 말씀처럼, 자만하지 않고 정직하게 쓰겠습니다. 수상 소식을 저보다 더 기뻐해 주시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모든 분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채연 약력
1974년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비아코 수필회 회원.
저서 : 『우리 뇌는 그렇지 않아』, 『고장 난 거대 기업』(공저), 『휴맥스, 다시 벤처 정신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