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선행(善行)이나 공로(功勞)를 예지(豫知)한 결과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은
신자들에 대한 값없는 선택을 특별히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보통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별하실 때
그들 각자에게 어떤 공로가 있을 것인지를
예견하시고
그 예견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예지(豫知)하시는 자들은 택하셔서
자녀들의 자리에 세우시는 반면,
천품상 악의와 불경건에 기울어지게 될 것이라고
분간하시는 자들은
죽음의 저주에 내맡겨 두신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이다.
이렇듯 그들은 예정을 예지의 천으로 감싸서
모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예정의 기원이 다른 것에 있기라도 하듯이 조작한다.
그들의 주제넘음은 참을 수 없는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그에게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실 자체가 알려졌다면
하나님에 맞서서 다투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는 실제적으로 명백히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는바,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자기의 은혜를 거저 베푸심에 있어서 항상 자유로우셨다.
무슨 까닭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명망을 지니게 되었는가?
나는 그 원인이 하나님 밖에서 발견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왜 그들이 소나 양이 아니라 사람인지에 대해서 대답하게 해 보자.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부터 죽을 사람으로 잉태되신다.
그가 바로 그 태중에서 천사들의 머리,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세상의 빛과 의(義)와 구원이 되신 것이(참조, 히 1:2-3)
어떤 덕성(德性) 따른 공로(功勞) 때문이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사려 깊은 충고를 한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바로 그 안에서
가장 빛나는 값없는 선택의 거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지체들 가운데 속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의로운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예를 거저 부여받으신 것은,
이후에 자기의 그 선물들을
자기와 하나가 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여기서 누군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지 못했는지,
왜 우리 모두는 그에게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는 순수함 그 자체인데
왜 우리는 모두 오염되었는지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광기(狂氣)뿐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자기의 뻔뻔함도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택(選擇)하고 유기(遺棄)하는
자유(自由)로운 권리(權利)를
하나님에게서 박탈하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동시에
그리스도께 부여된 것도 빼앗아 갈 수 있는지 놔둬 보도록 하자.
우리가 다가올 생명의 영광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서는
선택이 이러한 은혜에 앞서야 할진대,
하나님 자신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우리를 선택하게 되실 무엇을
과연 우리 가운데서 발견하실 것인가?
바울이 전하는 또 다른 본문은
내가 의미하는 바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전에………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려고"(적용. 엡 1:4-5; 참조. 골 1:22), 1402)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무엇이든지
우리의 공로(功勞)와 대조(對照)시킨다.
- 칼빈의 예정론(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1(라틴어 최종판 직역, 생명의 말씀사, 문병호 옮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