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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기록한 사람 : 마가
기록한 연대 : 주후57-58년경
기록한 장소 : 로마
제 1 장 세례요한
[대 지]
一. 세례 요한의 전도(1-8)
1. 그리스도의 선구자(1-3)
2 대중인도(4-5)
3. 자기처리(6)
4. 구주명증(明證)(7-8)
二.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9-11)
三. 예수님의 금식과 시험받으심(12-13)
四. 예수님이 전도하심(14-15)
五. 네 제자를 부르심(16-20)
六. 안식일에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심(21-28)
七. 시몬의 장모와 여러 병자를 고치심(29-34)
八. 새벽에 기도하고 여러 곳에 전도하심(35-39)
九. 문둥병자를 고치심(40-45)
[본문강해]
一. 세래 요한의 전도(1-8)
1. 그리스도의 선구자(1-3)
.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그 직분에 위임되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세 직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자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구속주이시다.
복음의 헬라 원어 (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와(롬1:2-4참조) 그를 통한 구원의 도리가 복음이다.
. 1:2-3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부터 기록하였다. 2절은 말라기3:1의 인용이며, 3절은 이사야40:3을 인용한 말씀이다. 마가가 초두에 이사야의 글이라고 소개하면서 왜 말라기3:1의 말씀을 인용했을까? 마가는 이사야40:3의 글을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다만 2절에서 말라기3: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서론으로 삽입한 것 같다. 그러므로 마가의 의도한 바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을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증거 한 것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다(요1:23). 사람의 소리는 말을 나타내고 사라지는 것과 같이 세레 요한은 말씀되시는 그리스도만 나타내 놓고 사라져야 될 자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고 자신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다(요3:30).
첩경을 평탄케 하라 첩경의 헬라 원어 (트리보스)는 다져진 길을 뜻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께로 가는 길을 평탄케 하라는 것이다.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다.
2. 대중 인도(4-5)
.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세례 요한의 세례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 자체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뉘우치고 자복하며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죄 사함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영접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회개운동으로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 온 유대 사람은 예루살렘 이외의 여러 지방에서 온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다 나아가 많은 사람이 나아갔다는 뜻이고.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나아갔다는 뜻은 아니다. 유대 백성 중 겸손하고 순전한 사람들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도리어 비방하였다(눅7:29,33).
3. 자기 처리(6)
. 1: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의 의복은 약대 털옷이요, 의식(衣食)에 제재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 세례 요한이 자기 직무를 감당하는데 있어서 적당한 음식과 의복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약대 털옷은 광야 생활에 적당한 옷이다. 밤에 입은 채로 자면 한편은 이불이 되고, 한편은 요가 된다. 또한 기도하고 일어나서 먼지가 묻었으면 털면 된다. 누구나 자기 직무에 적당한 옷을 입는 것이 좋다. 우리성도는 자기 분수에 적당하고 아담한 옷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의식에 제재를 받지 말고, 의식을 초월하여 살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도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다(빌4:11-12). 특히 교역자는 의식 문제에 얽매이면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풍부한 가운데 두시면 풍부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가난한 가운데 두시면 그 가운데에서도 물질에 구애받지 말고 믿음을 지켜 나아가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풍부하든 가난하든 마음을 물질에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의지하며,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 기선 목사님은 교역자의 의식에 대하여 중등(보통)으로 취하면 좋다고 말씀하셨다. 의복이 너무 고급스럽고 차려해도 복음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연스럽게 메뚜기를 잡아먹고 들에 있는 꿀(석청:야생꿀)을 취하여 먹었다.
이것이 의식에 제재를 받지 않는 생활이요 의식을 초월한 생활이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에서 얻기 쉬운 음식들이다. 교역자는 의식주를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고, 또 남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다.
4. 구주명증(明證)(7-8)
. 1:7-8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 요한은 자기를 바로 알았고, 예수님을 라로 알아 전파하였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알았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감히 그의 신들메도 풀 수가 없는 죄인임을 알았다.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지극히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하나님을 수종들 수 있겠는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세례는 정결케 한다는 뜻이다(마태복음 강해서 3:11, 16-17절 해석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아 정결케 될 것을 말한다.
二.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9-11)
. 1:9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③ 모든 택한 백성을 대신하여 세례 받기 위함이다.
④ 모든 성도의 모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려면 세례 받는 일까지 순종하여야 된다. 이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주도록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을 순종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세례요한은 세례를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이다.
.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물에서 올라오실새 예수님께서 물(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없는 데(육지)로 올라오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위로 올라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말이 없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물에 잠갔다가 꺼낼 수 있겠는가! 물을 떠서 끼얹는 것이 경건하고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세례의 원 뜻에 맞는다.
"세례주다"의 헬라 원어는 (배티조)로서 그 뜻은 "잠그다, 적시다, 씻다, 씻어서 정결케 하다"는 뜻이 있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의미로만 해석하여 침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세례 주다"라는 헬라 원어 (배티조)는 변형되어 (배티스모스), (배티스마), (배티스테스)등으로 성경 여러 곳에 사용되었다.
누가복음11:38에 "장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 하심을"의 손 씻지( )나, 요한복음13:26의 "한 조각을 찍으셔 다가"의 찍는다( )의 의미가 모두 (배티조)라는 말이 변형된 말이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뜻에만 국한시키고 다른 뜻을 무시한 것은 헬라 원어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잠그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원문의 뜻만 가지고는 잠그는 것인지, 씻는 것인지, 적시는 것인지 확실히 나타낼 수 없다. 그런데 침례교파에서는 일방적으로 "잠근다"는 뜻으로만 해석하여 침례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체를 무시하고 의식에 치우쳐 침례를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사람들을 물에 잠갔다가 꺼냈을까? 아니면 물을 떠서 머리에 끼얹었을까? 세례의 기원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시작 된 것이 아니다. 전에 있던 세례를 요한이 새로이 시행하였다고 하면 백성들이 당연히 세례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세례는 구약시대부터 유래한 것인데, 세례 요한이 특별히 많이 행한 것뿐이다. 세례의 참된 근원이 무엇인가?
① 모세가 송아지의 피를 뿌려 성소를 정결케 하였다(출29:16).
② 에스겔36:25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부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③ 문둥병에 걸렸다가 정결케 된 자는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제사장이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산 새의 날개로 찍어서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레14:5-6).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모든 정결케 하는 예식이 모두 물이나 피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도 뿌려서 정결케 하는 예식이 분명하다. 베드로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주었는데, 그 삼천 명을 모두 물에 잠그었다가 꺼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 물에 잠그었다가 꺼린다면 철야하여 24시간 동안 세례를 베푼다고 하여도 삼천 명을 다 세례 주지 못한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서 금식 기도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 기도를 받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했고 물에 나가서 바울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방에서 기도하다가 일어나 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행9:18).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16:33 참조). 강에 가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요, 목욕통을 만들어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었다. 즉시 머리에 물을 끼얹어 세례를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고전10:1-2 참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왔는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고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그것을 곧 세례라고 하였다.
침례교파에서는 세례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물 속에 들어간 것은 옛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변 것을 상징하고,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사람이 살아 올라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참 들쓴 "씻어서 정결케 한다"고 해야 성경 전체의 사상에 맞는다. 그러므로 세례 받을 때 꼭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적수(滴水) 세례가 옳다고 본다. 침례 교파에서 적수 세례를 받은 자라도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미 삼위의 이름으로 건전하게 세례를 받은 것은 피차 인정하는 것이 옳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은 취소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독선적인 의식주의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성령의 모양이 비둘기 같이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한 것에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 비둘기는 하나님께 제물로 이용되는 새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 그러므로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도록 역사 하는 성령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내 아들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예수님이 아들로서 다 받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아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전부 전달하여 주신다.
기뻐하노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완전히 다 이루어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
三. 예수님의 금식과 시험받으심(12-13)
. 1:12-13 성령이 곧 예수를 황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계속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볼 수 있다. 이 시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를 많이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는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이겨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다(히4:15 참조). 예수님이 인성으로는 연단을 받아 자라나야 하므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힘입어야 했다. 이를 위해 광야에 나가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고 사십 일 동안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시험받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들짐승이 많이 왔으나 하나님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고, 모든 시험을 다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주신 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광야 생활"은 아무 의지할 데도 얼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쓸쓸하고 거친 지경에 처하는 것이다. 성도가 시험받을 때에도 영적 광야가 된다. 그리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들짐승과 같이 된다.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모두 짐승과 같이 해하려고 하고 물어뜯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때가 많다. 그때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손해 받지 않게 해주시고 망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받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대로 걸어가면서 그 시험을 이겨야 한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했으나(마4:4-11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다 이기셨다.
四. 예수님이 전도하심(14-15)
.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본절부터 갈릴리 전도의 시작이다.
요한이 잡힌 후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악행을 면책하였기 때문에 헤롯왕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막6:17-18).
.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가 찬 것을 가리킨다. 그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회개해야 하고 둘째, 복음을 믿어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을 가리킨다.
五. 네 제자를 부르심(16-20)
. 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성역 중 첫째는 제자를 택하여 연단시키며 길러 나가는 일이었다. 오늘날 복음 운동에도 일꾼을 택하고 연단시키며 길러나가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를 택할 때에 제사장이나 학자 중에서 택하지 아니하고 무식한 어부들을 택하였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고전1:26-29 참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제자는 본래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요1:35-42 참조).
六. 안식일에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심(21-28)
. 1:21-22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집이 있는 동네이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큰 권세와 능력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교훈에는 이러한 권세와 능력이 따랐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가버나움 사람들은 놀라기만 하고 믿지는 않은 것 같다.
. 1:23-24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일 줄을 알았다. 야고보서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다. 귀신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을 위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셨고 택한 백성만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귀신들을 제어하고 심판하여 멸하실 뿐이다.
. 1:25-26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귀신들은 사람을 해하고 괴롭게 하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귀신에게서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주셨다. 귀신들은 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벌벌 떨며 쫓겨났다. 인간을 해롭게 하는 귀신들도 예수의 능력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에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교훈에 다 놀라며 새 교훈이라고 하였다. 새 교훈은 그 내용이 새 것이요, 그 교훈의 역사가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교훈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의 소문은 점점 퍼져서 갈릴리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七. 시몬의 장모와 여러 병자를 고치심(29-34)
. 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 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은 다음에 예수님께 수종들었다. 예수님은 심령의 병을 고쳐 주시는 표적으로 육신의 병을 때때로 고쳐 주셨다.
. 1:32-34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이 심령의 병을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모든 역사도 물리쳐 주시는 것을 알게 해주시려고 병도 고쳐 주고 귀신도 쫓아내 주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으나 병 고치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으셨다. 영적인 정을 고치고 그 표적으로 가끔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뿐이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이적도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생명의 떡으로 주실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한 두 번 행한 것이고 먹을 것이 없을 때마다 늘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다.*
八. 새벽에 기도하고 여러 곳에 전도하심(35-39)
.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항상 기도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바르게 기도하기를 배우고 실천해야겠다.
첫째,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새벽 시간은 가장 고요하고 심령이 맑아 기도하기 좋은 시간이다.
둘째, 일어나 나가서 기도하셨다. 누워 자던 자리에서 기도하게되면 손을 모으고 기도하다가 다시 눕게 되기 쉽다(잠6:10). 그러므로 부득이 하여 집에서 기도할 경우에도 자던 방에서 하지 말고 다른 방에서나 마루나 다락이나 뜰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도하는 장소가 중요하다. 자던 방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다른 방이나 밖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고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 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이 더욱 좋다. 산도 늘 가는 산보다는 높은 산이나, 전에 가보지 않은 깊은 산에 가서 기도하면 더욱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힘쓰고 사모하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서 기도하셨고 자주 산에 가서 기도하셨으며 제일 높은 헤르몬 산에도 올라가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늘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가서 기도하셨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신 것은 뒤숭숭하고 복잡한 곳을 떠나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시기 위함이다. 복잡한 곳에서는 깊은 기도를 할 수가 없다. 복잡하고 뒤숭숭하면 마귀가 들어오기 쉽다. 장날같이 복잡한 날에 마귀가 잘 들어온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성도는 은밀한 생활을 하며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언제나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안정된 심령을 갖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성도가 부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하려 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안정되고 고요한 심령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빠진다. 기도는 새벽 시간에 고요한곳에 나가서 하는 것이 좋다. 새벽 기도 후에 세상일을 시작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잘 이길 수 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부르짖는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고넬료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행10:3).
믿는 사람에게는 기도 생활이 더없이 중요하다. 마가복음9:29에"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이런 유는 마귀를 가리킨다. 기도 없이는 마귀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종노릇을 면할 수가 없다. 또 믿는 사람이 참으로 영적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영적 호흡과 같아서 멈추게 되면 영적 교통이 막혀 그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일 기도하는 일이 억지가 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평안하다고 하면 그것은 죽은 심령이다.
현대인들이 말하기를 피곤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한다. 왜 피곤한가? 절제하지 않고 세상과 육신 중심으로 살고 영적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절제하여 믿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대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이다. 게으른 생활은 썩어진 생활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데 힘쓰고 공책을 많이 들여 마음을 기울이고 피땀이 들어가야 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피땀을 흘리면서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다(눅22:44).
. 1:36-39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업으시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며 환영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접을 잘 받으며 평안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가서 가르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환영하는 그들을 떠나 다른 동네로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날매도 교회와 전도자들이 복음을 여러 곳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교역자가 환영받는 곳에서만 안일하게 목회 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또 다른 곳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九. 문둥병자를 고치심(40-45)
. 1:40-42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증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자기의 문둥병을 고쳐 주기를 간청하였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실 때에 즉시 문둥병이 깨끗하여졌다. 문둥병은 인간의 심령을 썩게 하는 죄를 상징하고 있다. 사람이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육체가 썩어져 들어가 마침내 생명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죄는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멸망하게 한다. 이 문둥병자는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고 겸손히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그 문둥병을 깨끗이 고쳐 주셨다. 사람들이 자기 육신에 병든 것은 잘 알 수 있으나 심령에 병든 것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 요한계시록 3장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심령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으나 그 수치를 알지 못하고 외부적인 면, 즉 교회 사업적인 면만 보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령에 병든 것을 발견하여 예수님께 고침을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간구 할 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위로와 응답이 오게 된다. 우리가 문중병자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예수님이 우리를 만져 주시고, 건져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신다.
. 1:43-44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은혜 받은 다음에 그것을 자랑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성경대로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자기의 외무와 책임을 다하며 순종하여 나가라는 뜻이다.
모세의 명한 것 레위기14:2-13에는 문중병자가 나은 다음에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에 필요한 예물, 즉 정한 산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 흠 없는 어린 수양 둘,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암 양 하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들과 기름 한 록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라고 했다.
예수를 믿고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 해야 될 의무가 있고 자기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있다. 문중병과 같이 더러운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성도는 이제 성경대로 바로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받쳐야 한다.
.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문둥형 나은 자에게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했으나(43절) 그 사람이 나가서 그 사실을 계속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나가서 기쁨으로 전했을 것이나 그 일이 도리어 예수님께 큰 방해가 되었다.
고린도전서6:12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둥병 나은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복잡하게 되겠으므로 동네에 들어가지 못했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은 복잡한 곳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고요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사귀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것이 영적 양식을 먹는 것이요 새 생명이 사는 길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곳까지 찾아와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 진리가 있는 곳에는 성도들과 구원받을 자들이 항상 모여들게 마련이다.